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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⑥

예술가의 시선으로 뒤집어보기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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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쌈지공원 점심시간 풍경.

내가 살던 동네 파시에선 그보다 더한 장면도 보았다. 빨간불일 때 한 사나이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길 저편에서 멋진 스포츠카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사나이는 유유히 길을 건넜다. 자동차는 횡단보도 앞에서 급정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 안의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그보다 먼저 길을 건너던 사나이가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야! 너 나 죽이려고 그래? 죽여봐!”사나이는 운전자와 한참 승강이를 벌이더니 길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서울 사람들은 신호등을 철저하게 잘 따른다. 차가 없어도 빨간불이면 침착하게 기다린다. 동네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인데 차가 없었다. 나는 파리에서의 습관대로 그냥 길을 건넜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들 나를 외계인 쳐다보듯 했다. 파리는 사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 가운데 횡단보도 신호등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다. 내가 어린 시절 “선진국 사람들은 교통신호를 잘 지킨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선진국은 바로 일본이었던 것 같다. 도쿄에 가보면 일본사람들은 정말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

그런데 중국 관광객들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파리사람들 뺨치게 교통신호를 안 지켰다. 아무 때나 막무가내로 길을 건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2008년 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 파리의 중국 관광객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옷차림이나 행색만 달라진 게 아니라 교통신호도 꼬박꼬박 잘 지키게 된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 중국에서도 “선진국이 되려면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캠페인이 요란하게 진행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파리에서 무단횡단, 가래침 뱉기, 쓰레기 버리기, 노상방뇨 등 공중도덕을 위반하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한중일 세 나라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파리지앵은 여전히 빨간불에도 길을 건너고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음주운전을 하고 불법주차를 한다. 프랑스는 그런 점에서 선진국이 아닌지 몰라도 그런 작은 위반을 벌금으로 처벌하지 않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국가의 강제력을 최소화하고 시민의 권리를 최대화하려는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 운영의 법칙이 아직도 건재하다.

풍경 #50 샴푸와 첫사랑

내가 ‘파리의 밤 생활’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을 단 유흥업소들이 밀집한 ‘피갈(Pigalle)’이라는 동네를 제외한다면 파리의 밤은 무척 고요한 편이다. 서울의 밤이 파리의 밤보다 몇 십 배 화려하다. 서울에선 어둠이 내리면 건물 외벽을 화려한 조명 장치로 장식하는 건물이 늘어나고 있다. 압구정동의 어느 백화점 건물은 밤이 되면 건물 자체가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반짝인다. 서울의 밤은 세계 어느 대도시의 밤 못지않게 밝고 화려하다. 대로변 건물 벽이나 옥상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들이야말로 서울의 밤을 불야성으로 만드는 조명 장치다. 전광판 위를 흐르는 화려한 이미지와 문장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보다 더 빠르게 바뀌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전광판과 더불어 네온사인 간판도 서울의 밤을 들뜨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서로 보색을 이루는 붉은색과 초록색 글자들이 반짝이고 깜빡이며 운전자나 보행자의 눈길을 빼앗는다.



서울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늦게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택시가 한남대교를 넘자 어느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 간판이 눈앞에 명멸했다.

‘첫사랑.’

핑크빛 네온사인이 반짝였다. 그때 나는 내가 여전히 한글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임을 직감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으로 ‘첫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 같았다. 요즈음은 영어를 쓴 간판도 많이 생기고 있지만 만약에 ‘첫사랑’ 대신 ‘First Love’라고 써 있었다면 간판이 갖는 흡인력은 한참 줄어들었을 것이다. 나이트클럽 안에서는 선남선녀들이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서 서로 몸을 맞대고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택시는 고속터미널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샴푸.’

이번에는 네온사인이 아니라 전광판 위에서 ‘샴푸’라는 글씨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전광판을 보자 옛날에 보았던 영화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 영화에서 칠수와 만수라는 이름의 두 젊은 노동자가 전광판을 설치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첫사랑’에 뒤이어 나온 ‘샴푸’라는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신선함, 개운함, 깨끗함, 청결함, 향기, 설렘이라는 느낌을 환기시킨다. 만약에 한글전용론자의 주장에 따라 나이트클럽의 간판에 ‘샴푸’라는 말 대신 ‘물비누’라는 말을 썼다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훨씬 약해졌을 것이다.

이제 서양에서 물 건너온 제품과 그것을 일컫는 단어들은 우리 생활 속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샴푸라는 영어는 이제 우리말처럼 되어버렸다. 아무튼 서울의 밤이 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그 어느 대도시보다도 강렬한 밤의 분위기를 연출한다면 그건 빠르게 움직이는 전광판의 이미지들과 네온사인 글자들의 끊임없는 명멸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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