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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동서양의 접점 -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④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풍요와 여가의 땅 밀레투스

  • 임성진|철학자 limsj20@daum.net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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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철학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초의 서양철학자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리스 본토 출신이 아니라 터키 서쪽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밀레투스 출신이다. 서양철학이 이곳에서 탄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유와 사유의 교류, 서양철학을 낳다

밀레투스

밀레투스는 현재 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내륙으로부터 약 1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서양철학이 생겨날 당시에는 이오니아 지방(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방)의 항구 도시였다. 그리스인이 기원전 11세기 이오니아 지방에 진출해 밀레투스를 세웠다. 밀레투스는 아나톨리아 내부에서 해안으로 운송된 자원과 가공품을 교역하는 중심지였다. 북쪽으로는 흑해,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 남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역 활동을 펼쳤다.

생산과 교역 활동이 풍요를 가져다준 덕분에 밀레투스 사람들은 신보다는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자연을 통제해야 생산과 교역이 원활히 이뤄진다는 점을 깨달아 자연 세계에도 관심을 뒀다. 신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신화적 사유 대신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사유를 한 것이다.

호기심이 철학의 산파

탈레스(기원전 625~545년),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540년)와 같은 최초의 서양철학자가 마주한 밀레투스의 풍요는 여가의 즐거움과 지적 탐구를 위한 자극을 줬다. 플라톤(기원전 427~347년)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년)가 말했듯 철학은 호기심 또는 경외심에서 생겨난다. 최초의 서양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사람들로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기술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 때문에 철학을 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수천 년 전의 이집트인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용적 기술을 개발했으나 철학을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진리와 지식에 대한 사랑을 갖추지 못했던 탓이다. 실용성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철학이 탄생하지 못한다. 철학은 직접적 경험 세계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레투스의 지리적인 위치, 이웃 세력과의 관계도 서양철학 탄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밀레투스는 그리스 세계의 동쪽 끝에 있었다. 밀레투스의 동쪽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바빌로니아 리디아 페르시아 등으로 이뤄진 지역, 즉 동방(東邦)이 있었다. 동방의 사유는 밀레투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밀레투스의 역사를 보면 동방의 사유가 그리스의 사유에 영향을 주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대부분의 이오니아 지방은 리디아의 알리아테스(재위 기원전 610~560년) 왕이 지배했다. 그의 아들인 크로이소스(재위 기원전 560~546년) 왕은 이오니아 지방의 해안지대를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이오니아 지방은 기원전 546년 크로이소스 왕이 키로스(재위 기원전 560~530년) 왕에게 패배한 후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됐다. 밀레투스는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리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이 밀레투스의 명성과 위력을 존중한 덕분에 밀레투스는 이들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지 않은 채 그 나름의 특권과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 밀레투스 사람들은 동방의 사유를 수시로 접할 수 있었다. 사유의 접촉은 이와 같이 수동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지만, 능동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았다. 진취적인 밀레투스 사람들은 육지로는 동방으로, 바다로는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최초의 서양철학자들도 밀레투스에 은둔하지 않고 동방의 사유를 능동적으로 획득하고자 했다. 특히 탈레스는 이집트를 방문해 기하학을 밀레투스에 최초로 도입했고 나일 강의 범람 원인을 제시했으며 그림자를 이용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고 전해진다. 동방의 사유, 이집트의 사유, 그리스의 사유가 교류하고 접하면서 서양철학이 탄생한 것이다.

생각의 자유 막은 이집트

그렇다면 서양철학이 하필 밀레투스에서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6세기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밀레투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누렸는데도 이 지역에서 철학이 탄생하지 않은 까닭은 뭘까. 생각의 자유를 인정한 밀레투스와는 달리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는 전제 정권에 종속된 종교로 인해 생각의 자유를 억압했고 사제들은 생각의 자유로 인해 왕의 권위가 훼손당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물론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역시 상당한 지적인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탈레스는 일식을 예언할 때 바빌로니아의 지식을 근거로 했으며 밀레투스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덕분에 농업, 도예, 벽돌 제조, 방적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밀레투스는 자신들이 명성을 떨친 직물 제조에서조차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기술을 모방했다.

밀레투스인 역시 그리스 수학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수학에 힘입어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5년)에 따르면 기하학은 이집트에서 시작돼 밀레투스로 전해졌고 밀레투스인은 바빌로니아인으로부터 하루를 12부분으로 나누는 법과 천구(반원천장 모양의 해시계), 그노몬(해의 방향과 고도를 가리키는 삼각자 혹은 직각 막대)을 배웠다. 이집트인은 기하학에서 뛰어났고, 바빌로니아인은 산술에서 우수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가 밀레투스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졌고 더 높은 수준의 수학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은 지식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실용적 목적에 도움이 되는 기술에만 관심을 가졌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이집트는 개인이 소유한 땅의 직사각형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나일 강의 범람으로 땅의 면적이 줄어들면 땅 소유주의 요청에 따라 왕의 측량사들이 와서 줄어든 땅의 면적을 재고서는 세액을 조정했다. 헤로도투스는 이집트에서 이런 문제가 기하학의 발전을 자극했다고 설명했다. 이집트의 기하학은 토지 측량이나 피라미드 건설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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