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팝송의 시대’ 끝낸 70년대의 기린아 김창완

  •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3/6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산울림의 데뷔시절. 왼쪽부터 김창훈(베이스), 김창익(드럼), 김창완(기타).

-한때는 대여섯 편의 CF에 동시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상품효과가 높다는 뜻인데, 본인 스스로는 대중들이 왜 그렇게 호응한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후배 누군가가 저더러 ‘형의 연기가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마 제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라는 사실 때문 아닐까요. 전 데뷔하던 1978년부터 지금까지 어떤 형태로든 단 하루도 대중과 떨어지지 않았어요. 앨범이든 TV든 라디오든 줄창 함께했죠. 휴지기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제 스스로 너무 싫어서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거위 배를 갈라 황금알을 다 꺼내는 기분으로 대중적 활동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얼굴을 내미니까 시청자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 거겠죠.”

-그래도 맡는 역할이 주로 어리숙한 인물이라는 점이 걸리진 않습니까? 실망했다는 옛 산울림 팬들도 있습니다.

“전 찰리 채플린이나 우디 앨런에게도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고하신 코미디언 서영춘씨도 마찬가지죠. 그 또한 하나의 캐릭터, 그것도 아주 의미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어리숙한 캐릭터여서 실망스럽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음반 내면 팝송이 타격받을 거야”

김창완은 미8군 군속 설계사였던 강원도 화천 출신의 아버지 김재혁씨(1925년생, 작고)와 경기도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장은성씨 사이에서 1954년 출생했다. 동생들은 모두 두 살 터울로 창훈은 56년, 창익은 58년에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어느날 아침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입학해 보이지 않자, 그들을 찾아 무작정 학교에 놀러다니다 결국 자동 입학한 셈이 되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다. 덕분에 54년생이지만 52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것.

학업성적이 우수해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한 김창완과 두 동생은 1970년대 중반부터 열심히 기타와 드럼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어갔다. 학창시절에는 이들의 악기와 앰프에서 터져 나온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동네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덕분에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동네사람들에게 사정하며 살다시피해야 했다.

1976년 군에서 전역한 뒤 취직이냐 음반 제작이냐의 갈림길에 놓였던 김창완은, 음악과 연을 끊을 수 없어 이듬해 레코드사를 찾아다니다 자신들의 앨범을 발표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1977년 개최된 MBC대학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서울대 그룹 샌드페블스의 ‘나 어떡해’가 둘째 창훈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의 가능성은 이미 확인된 상태였다. 이어 오래 전에 써두었던 ‘아니 벌써’ 등이 수록된 데뷔앨범은 발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세 형제는 평범한 인생코스를 일탈해 ‘결코 목표가 아니었던’ 록밴드로 숨가쁘게 내달리게 된다.

-1977년 12월에 나온 데뷔앨범이 빛을 보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꼭 음악활동을 해야 한다거나 록그룹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서 낸 앨범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왜 음반을 만들었던 겁니까?

“첫 앨범은 우리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세상에 알려졌어요. 음반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음을 수록한 고정물(固定物)’이라고 돼 있습니다. 우린 그야말로 그 음반, 우리 음악을 수록한 고정물을 갖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걸 대량으로 복제해 홍보한다거나 성공을 거둔다는 일체의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뜻이 없었죠. 심지어는 우리 노래를 팔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파는 격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중의 반응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공 여부를 떠나 음악적인 측면에서 어떤 자신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무나 음반을 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농담 삼아 말하자면 마음속으로 ‘우리가 음반을 내면 팝송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죠. 팝에 비해 떨어질 게 없다는 거였죠. 이후에 팝송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가요가 많이 상승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잖아요.”

확실히 1970년대는 내내 팝송의 시대였다. 누구나 팝송을 듣던 시절이었고 음악인들도 예외 없이 팝송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김창완 자신도 그 시절 보브 딜런, CCR, 레드 제플린,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등 외국 팝을 애청했다고 한다. 지금도 ‘내 인생의 팝송’이라는 앤디 킴의 ‘베이비 아이 러브 유(Baby I love you)’를 들으면 ‘전주만 나와도 코끝에 싸한 풀 냄새가 스친다’는 것이다. 그는 서구 음악으로부터 악기편성의 역학과 전반적인 록의 감수성을 터득했다고 설명했다.

3/6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연재

한국대중음악 스타열전

더보기
목록 닫기

“동요풍 노래는 어린 시절 아픈 기억 때문”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