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인 중앙인민방송(中央人民廣播電台·China National Radio)은 9월22일부터 한국음악 전문 프로그램 ‘한국을 들어보세요(聆聽韓國)’를 방송한다. CCTV와 함께 중국 광전부(廣電部) 직속기관인 중앙인민방송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전국을 커버하는 라디오 방송. 덕분에 ‘한국을 들어보세요’는 중국의 126개 주요 도시에서 같은 시간에 전파를 탄다. 한국음악 관련 프로그램이 중국 전역에서 방송되는 것은 처음이다.
전국 네트워크를 이용해 중국 정부나 공산당의 선전·계몽 프로그램을 주로 내보내던 중앙인민방송이 외국음악, 그것도 한국가요를 전문으로 소개하는 정규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부터가 파격적이다. 중국도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구조조정 바람을 피할 수 없었는데, 그 와중에 중앙인민방송도 최근 경영노선을 수정, 광고방송을 시작하는 등 수익사업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 속사정 때문에 이제는 청취율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 중앙인민방송이 지금 한창 중국대륙을 달구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에 편승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전략적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앙인민방송과 손잡고 이 프로그램을 실질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이 우전소프트(宇田SOFT) 김윤호(金允皓·42) 사장이다. 김사장은 중국에 한류의 불씨를 지핀 인물. 1998년 5월, 중국 최초의 한국가요 음반인 H.O.T 앨범을 내놓으며 충격적인 중국상륙작전을 감행한 이래 한국가수 음반 50여 종을 펴내고 이들의 중국 공연을 유치하면서 중국 청소년들을 ‘합한족(哈韓族·한국 마니아)’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래서 중국 언론은 그의 이름 앞에 ‘합한왕(哈韓王)’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우전소프트는 김사장이 중국 내 음반 발행, 콘서트·이벤트 기획, 방송활동 등을 위해 베이징에 설립한 회사.
‘한류(韓流)’라는 말도 김사장이 음반 홍보용 포스터에 처음 쓴 단어로, ‘한국의 유행음악’이라는 뜻이다. ‘한류(寒流)처럼 강하게 중국팬들에게 다가서라’는 바람에서 쓴 말이었는데, 이제는 중국 언론과 음악계에서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우전소프트가 중국에서 발행한 음반은 앨범당 대개 10만장 넘게 팔렸다. 히트 음반의 경우 불법 복제음반 유통량이 정판의 20∼30배에 달하는 중국 음반계의 실정을 감안하면 실제 판매고는 200만∼300만장에 이른다는 얘기다. ‘한류기지(韓流基地)’라는 이름의 우전소프트 홈페이지는 하루 페이지뷰가 30만∼40만건에 달한다. 김사장도 밤이나 주말에는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게 쉽지 않을 정도다. 우전소프트 사무실에는 매주 1000여 통씩 날아드는 팬레터가 더미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 한국 가수들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들인데, “김선생 덕분에 한국음악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격려편지도 적지 않다.
첫 음반을 낸 지 3년 만에 이만한 열기가 조성됐으니 김윤호 사장은 운이 억세게 좋다고 할 수도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우연히 바람을 만나 삽시간에 요원의 불길로 번져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사장의 한류 열풍은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에 입각한 경영전략과 마케팅의 개가(凱歌)다. 무작정 중국 진출→실패→실패원인 연구→시장분석→틈새시장 파악→초기 시장선점(先占)전략 전개→전방위 마케팅과 소비자 관리→사업 다각화 및 수익기반 확대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비즈니스 요소들이 적절한 시기에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 결과다. 그 과정에 ‘수업료’도 적지 않게 치렀다.
배수진, 그러나 참담한 실패
김사장은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음반회사나 기획사 같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그는 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를 나와 S투자증권에서 10년간 근무한 증권맨 출신이다. 한때는 증권붐을 타고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그는 늘 ‘뭔가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늘 결과로만 평가받는 게 속상했어요. 증권사 일이란 게 그렇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안 좋으면 욕만 얻어먹고, 그저 운이 좋아서 주가가 올라도 돈만 벌어주면 좋은 평가를 받거든요.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간 노력은 노력대로 하고도 사람까지 잃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업 관계로 중국을 드나들던 처남이 우연한 기회에 베이징의 한 FM 방송국(北京音樂台) 관계자를 만나 매주 1시간씩 한국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기로 계약했다. 처남은 김사장에게 이 사업을 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방송국은 방송시간만 임대해주고, 방송원고 작성과 선곡, 음반 준비는 이쪽에서 맡는 조건이었는데, 학창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한 김사장에겐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거대한 중국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마음을 정한 그는 당장 사표부터 냈다. 회사에선 “아이템도 신통찮은데 그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그러느냐”며 “정 가겠다면 휴직하고 왔다 갔다 하라”고 말렸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결국 손들고 돌아오게 될 것 같아 퇴사를 고집했다. 아예 귀국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전재산을 처분하고 베이징에 집부터 샀다. 처음부터 아내와 두 아이를 다 데리고 서울을 뜬 것도 나름의 배수진이었다.
그는 1996년 3월부터 꼬박 1년간 ‘서울음악실(漢城音樂廳)’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다. 비록 베이징 한 도시에서만 들을 수 있었지만, 한국음악 프로그램이 중국의 공중파로 방송된 것은 처음인 만큼 그 의미는 남달랐다. 원고를 쓰고 곡을 고르는 것도 적성에 맞았다. 중국 청취자들의 관심도 조금씩 높아졌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처음에 그는 전파 임대료와 프로그램 제작비, 인건비 등으로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사업을 낙관했다. 프로그램 1회당 5분의 광고시간이 할당됐는데,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이 기꺼이 광고 스폰서가 돼줄 것으로 기대한것이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기대는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베이징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과 접촉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은 값이 비싸도 TV 광고나 옥외 광고판처럼 광고효과가 높은 매체에만 관심을 보였다. 광고수입에 100% 의존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광고를 하나도 유치하지 못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1년 동안 수입은 한푼도 없이 서울에서 가져온 돈만 바닥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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