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반미(反美) 감정의 뿌리를 캐는 일에 있어 다음 몇 가지 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9·11 테러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족 알 왈리드는 뉴욕의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파드(Fahd) 국왕의 조카가 되는 그는 국제적 사업가로서 200억달러 이상의 개인재산을 소유한, 세계 10위권 내의 거부(巨富)다. 그는 애도의 뜻을 표한 뒤 복구비로 뉴욕시장에게 거금 1000만달러의 수표를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수표 전달식이 끝남과 동시에 알 왈리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테러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은 문제의 근본원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미국은 중동정책을 재수정해야 합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균형 있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이 성명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9·11 테러사건의 근본원인은 미국의 중동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미국이 지나치게 이스라엘을 두둔했다는 것이다.
성명서를 전해들은 뉴욕시장은 알 왈리드에게 수표를 반려했다. 2001년 10월12일 뉴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명서 내용이 아랍세계의 반(反)이스라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알 왈리드의 성명서가 미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의 아버지인 왕족 탈랄(Talal)은 아들을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랍세계가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것은 그 행동이 옳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친(親)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는 미국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탈랄의 말은 아랍인들의 반이스라엘 감정,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반미 감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셋째,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하지만, 수차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전세계 TV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성명이다. 그의 인터뷰 전문(全文)을 면밀히 살펴보면 철두철미한 반이스라엘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미국을 증오하는 주된 이유는 미국이 친이스라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얼마나 반이스라엘적이냐 하는 것은 그가 이끄는 조직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알 카에다(Al Qaeda)’의 다른 이름은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성전(聖戰)의 세계 이슬람전선(The World Islamic Front for Jihad against Jews and Crusaders)’이다. 여기서 ‘유대인에 대항(against Jews)’한다는 말은 알 카에다 조직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십자군’은 미국을 뜻한다.
9·11 테러사건의 뿌리 중 하나는 분명히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의 대결과 갈등에서 찾아야 한다. 혹자는 ‘문명충돌론’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확대포장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유대인)과 팔레스타인(아랍인) 사이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과 투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테러문제는 뿌리뽑히기 어렵고 테러와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미 감정 뿌리는 反이스라엘 정서
오늘날 난마같이 뒤얽힌 중동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지금부터 55년 전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부터다. 1948년 5월14일 오후 4시.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박물관에서 나중에 초대 수상이 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은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포했다. “유대인 국가가 다른 나라들처럼 독립된 주권국가로 살아가는 것은 천부의 권리다. 이에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수립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