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길과 언론의 길이 다르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언론과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리라. 그는 “언론개혁은 언론 스스로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듣기 좋게 하는 소리이고 실상은 다르다.
노무현 정부는 제도적으로 장악이 가능한 방송사와 재정상태가 취약해 정부와 맞서기 어려운 일부 중소신문, 그리고 인터넷매체를 우군(友軍)으로 삼고 있다. 이들을 키워서 ‘동아’ ‘조선’ ‘중앙’ 3대지를 견제하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언론정책이다.
후보 시절 노대통령은 정부 주도로 과감한 언론개혁을 단행할 뜻을 내비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거론했던 언론개혁 방안의 골자는 이 글의 뒷부분에서 살펴볼 시민단체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 온 언론개혁 방안과 흡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개혁 방안은 야당이 국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펼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노대통령은 자신은 ‘반(半)대통령’에 불과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
하지만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노대통령은 야당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소신 있게 정책들을 밀고나갈 것이다.
최근에 터져나온 청와대 양길승(梁吉承) 제1부속실장의 향응 및 몰래카메라 촬영사건은 노대통령의 언론관을 보여준 좋은 사례이다. 첫째, 이 사건은 청와대 비서실 간부의 기강해이가 드러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신속한 징계절차를 밟지 않았다. 대신 이를 크게 보도한 언론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켰다.
양실장의 행동은 지난 5월부터 실시한 2만원 이상의 금품과 선물 향응 등을 받지 않기로 한 ‘청와대직원윤리규정’을 위반한 사건이다. 게다가 본인도 즉시 사표를 제출했으니 노대통령은 응당 바로 인사조치를 해 신속히 여론을 가라앉혔어야 했다.
6월28일 충북 청주에서 있었던 양실장 향응사건이 처음 현지 언론에 보도된 것은 열흘 후인 7월8일이었다. 이때 청와대가 당사자인 양실장의 말에만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조사해 처리했더라면 그로부터 23일 후인 7월31일, ‘한국일보’를 선두로 한 중앙지들은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8월2일 노대통령은 장·차관급과 대통령비서실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제2차 국정토론회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고,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전제하면서도, “언론의 후속기사가 두려워 아랫사람 목을 자르고 싶지는 않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언론의 비판에 개의치 않겠다는 오기로밖에 볼 수 없다.
이어 노대통령은 “언론이 부당하게 짓밟고, 항의한다고 더 밟고, ‘맛 볼래’ 하고 가족을 뒷조사하고…, 집중적으로 조지는 특권에 의한 횡포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격렬히 비난한 다음 “한마디로 내 자존심과 인내심, 안 죽는다. 정부, 무너지지 않는다. 대통령, 하야하지 않는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에 공동취재단으로 들어가 노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어느 기자는 “심한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노대통령의 언론 비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노대통령은 심지어 “언론계 출신 가운데는 질이 안 좋은 사람도 많다”는 등의말까지 내뱉었다고 한다.
한국신문협회는 사흘 후인 8월7일 “노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은 언론인에 대한 모욕이다”는 내용의 공식 성명으로 대응했다. 과거 관례로 볼 때 신문협회가 대통령에게 이러한 수준의 비난 성명을 내놓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정부와 언론 사이의 갈등이 심화됐다는 이야기다.
청와대가 실시한 양실장 향응사건에 대한 2차 조사결과는 노대통령의 언론비난이 일방적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청와대 발표에 의하면, 양실장은 탈세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던 나이트클럽 공동소유주로부터 215만원 상당의 호화로운 향응과 43만원 상당의 선물도 받았다. 술자리에서는 수사무마 청탁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양실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그동안 거짓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노대통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언론에 화살을 날렸다가 진상이 밝혀져 “국민에게 사과하라”는 야당의 요구를 받는 등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중앙의 언론들이 양실장 사건에 대해 대대적인 2차 보도를 하지 않았다면 청와대는 2차 조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가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사건은 언론의 권력감시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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