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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눈으로 본 정치

국회의장, 의원에게 양주 선물하며 법안 ‘로비’

  • 글: 박민혁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mhpark@donga.com

국회의장, 의원에게 양주 선물하며 법안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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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장은 회의가 지루하게 진행될 때는 의장석에 앉아 나름대로 터득한 ‘놀이’를 하기도 한다. 놀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의원들의 신상명세가 적힌 국회수첩을 꺼내들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의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일일이 확인하기도 하고, 또 회의장에 몇 명이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숫자를 세어보기도 한다.

“한번은 대정부 질문을 하는데 본회의장이 거의 텅 비어 있는 거야. 그래서 남아 있는 의원 수를 세어봤지. 22명이더라고. 그러다가 26명으로 늘었다가 다시 줄어들고…. 회의에 끝까지 남아 있던 의원들 이름을 공표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

국회는 7월11일 북핵문제에 대한 긴급현안 질의를 위해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 등을 출석시킨 가운데 본회의를 열었다. 이날은 남북장관급회담이 예정되어 있어 정장관의 본회의 출석이 어려운 상황. 그러나 박의장의 요청으로 정장관은 어렵게 출석했다. 그러나 정작 회의 시간인 오전 10시가 한참 지나도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대북비밀송금 특검법 처리문제와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굿모닝시티 자금수수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의원총회를 길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의장은 오전 10시3분경부터 의장석에 앉아 의원들이 들어오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단 한마디도 없이, 별다른 거동 없이 무려 50여 분간 의장석을 지켰다. 일종의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의장실 관계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의원들 없는 의사당에 의장이 저렇게 오래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여야가 국회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오전 10시56분이 되어서야 회의는 시작됐고 마침내 박의장이 입을 열었다. 박의장은 “각 정당별로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국민은 (개회 약속시간인) 오전 10시가 되면 TV를 쳐다보고 기다린다. 본회의 개의시간을 맞춰달라”며 “남북장관급회담 때문에 나오기 어려운 통일부장관이 국회의 요구로 회담시간을 미루고 나왔다”고 말했다.

박의장은 그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장석에 앉아 있는데 정말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지. 바쁜 장관을 나오라고 해놓고 회의를 늦게 시작했으니. 고건 총리와 정장관에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하고 회의 끝나고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장은 의장실에 마련된 구내 TV를 통해 본회의장에 의원들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본회의장으로 나가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관례. 그러나 박의장은 의원들의 ‘상습적인’ 지각 버릇을 고치기 위해 그날 일부러 일찍 나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 각 당은 의원총회를 꼭 본회의 시작 30분 전에 열어서 번번이 늦어. 지각을 반복할 때마다 특정 교섭단체가 국회를 좌지우지하는구나 생각이 들어 심하게 나무라야겠다고 생각도 하지만 의원들을 존중해서….”

의원들은 회의에 지각하는 것을 늘 있는 일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부 기자들은 각종 회의가 정시에 시작되는 경우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

“치고 박고 할텐데 한번 해보라”

한나라당은 7월11일 대북송금과 관련된 모든 의혹을 수사대상으로 하는 ‘초강도 특검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나라당이 이날 오전 의원총회에서 8일 법사위를 통과한 ‘비자금 150억원+α’ 특검법 수정안을 백지화시키고 이 같은 초강도 특검법을 제출한 데에는 8일 ‘북한의 고폭실험 확인’이라는 국정원의 보고 내용이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표결처리에 앞서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실을 점거하고 의결정족수도 부족해 이날 한나라당의 특검법 처리는 무산됐다. 의장실을 점거한 민주당 김옥두(金玉斗) 이협(李協) 의원 등 20여명은 박의장에게 “일방적인 의사진행은 안 된다”고 항의했다.

이날 민주당 의원들의 의장실 점거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특히 이날 민주당 정균환 총무는 박의장에게 두 차례나 전화를 걸어 “단상 점거나 의장실 점거는 하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했던 터였다.

한나라당에선 민주당의 의장실 점거를 예상했는지 박의장에게 본회의장을 떠나지 말고 의장석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의장은 정총무의 약속을 믿고 “그런 걱정 하지 말라”며 오히려 한나라당 의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민주당으로서는 당시 의장 단상이나 공관을 점거하지 않는 한 한나라당의 초강도 특검법 처리를 막을 수 없었다.

박의장은 이날 의장실 ‘감금’을 피할 수도 있었다. 이날 오후 3시 의장실에서 앉아 있던 박의장에게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국회 정무수석이 “민주당이 의총에서 분위기가 격앙돼 의장실을 점거할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박의장은 예상보다 빨리 의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이미 민주당 의원들이 문 앞까지 들이닥쳤고 김옥두 의원 등은 박의장에게 “의장실로 다시 들어가시죠”라고 언성을 높였다.

박의장은 “내 발로 들어가면 들어갔지 물리적으로 들여보내려고 하면 나는 거꾸로 하는 사람이다. 의사봉을 쥘 수도 있다”고 맞섰다.

결국 민주당 의원들은 수십분간의 의장실 점거 끝에 자진해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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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민혁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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