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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갈등 지도 (9)|캄보디아

내전·공포정치가 초래한 지구촌 최대의 ‘킬링 필드’

  • 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내전·공포정치가 초래한 지구촌 최대의 ‘킬링 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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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에 항복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미국은 그러한 프랑스를 대신해 1950년대 중반부터 인도차이나에 깊이 개입, 남베트남의 고딘 디엠 독재정권의 후견자로 나섰다. “동남아시아에 반공전선을 구축한다”는 명분이었다.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정책은 ‘친미 군사동맹’인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1954년 출범)를 축으로 북베트남과 중국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당시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를 중립국으로 유지함으로써 미국과 거리를 두려 했다. 하지만 1955년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는 캄보디아를 북베트남에 맞서는 전진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국무장관과 CIA 국장인 덜레스 형제를 잇달아 캄보디아에 파견해 시아누크 국왕에게 캄보디아의 SEATO 가입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은 중립국 인도와 마찬가지로 SEATO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왕의 회고록 일부를 옮겨본다.

“존 F.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캄보디아도 SEATO에 가입하라고 거듭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나는 SEATO가 (북베트남 같은) 이웃 국가들을 겨냥한 침략적인 동맹이라 여겼고 이같은 생각을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그의 동생 CIA 국장 알렌 덜레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캄보디아 왕국과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SEATO의 보호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증명’하는 서류들로 가득 찬 가방을 내게 건넸다. 그 ‘증거’들은 내가 갖고 있는 증거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했던 말, ‘캄보디아는 SEATO의 일원이 되길 바라지 않으며 중립국이자 불교국으로서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를 반복해서 말했다. CIA 국장은 그 의심스런 서류가방을 다시 챙겨 캄보디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노로돔 시아누크 회고록, ‘나의 CIA와의 전쟁’).

미 CIA는 반(反) 시아누크 무장세력인 ‘크메르 세레이’와 ‘크메르 크롬’을 배후지원하면서, 프놈펜 정부군에 맞서도록 부추겼다. 1959년 초 미 CIA는 다프 추온 장군을 중심인물로 한 일부 캄보디아 군부를 움직여 쿠데타를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캄보디아 정책을 마땅찮게 여기던 프랑스와 중국의 첩보기관들이 시아누크에게 이를 귀띔했다. 관련자들은 체포되고 쿠데타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미 CIA가 개입한 쿠데타 기도와 시아누크 암살음모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럴수록 시아누크는 위기를 느꼈다. 그의 활로는 외교였다. 중국, 옛소련, 폴란드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았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이틀 전 캄보디아 의회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경제·기술 원조를 모두 거부한다”고 결의했다. 약소국이 미국의 원조를 스스로 거부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 공습으로 수많은 캄보디아인 희생

이런 시아누크 국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이 격화되자 끝내 캄보디아는 그 태풍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공산군(월맹군과 베트콩)을 겨냥, 공습을 펴기 시작했다. 미군의 공습은 미 의회에도 비밀이었다. 대외적으로 인정된 ‘캄보디아 공습’이란 없었다. 1964년 10월 캄보디아 정부는 “미국이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계속한다면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이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5월 미군의 공습으로 수십 명의 캄보디아 농민들이 죽고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시아누크는 대미 외교관계를 끊었다(1960년대 후반 캄보디아는 다시 미국과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원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CIA가 지원하는 크메르 세레이 캄보디아 반공 민병대의 군사작전과 미군 공습은 그치지 않았다.

미군이 떨어뜨린 네이팜 탄과 지뢰들은 많은 캄보디아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시아누크 국왕은 공습으로 인명사고가 날 때마다 미국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쿠데타로 시아누크가 실각하길 바랐다. CIA 베트남 지부는 일찍부터 론 놀 장군과 손 녹 탄(미 CIA가 후원했던 크메르 세레이 지도자), 두 사람을 시아누크를 대신할 이상적인 친미인물로 꼽고 있었다. 1970년 3월 시아누크 국왕의 외유중에 이 두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닉슨 행정부는 즉각 그 정권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두 사람은 번갈아가며 캄보디아 친미정권의 수상직을 맡았다. 권력의 중심은 론 놀 장군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6일 전에 CIA 프놈펜 지부가 작성한 ‘프놈펜에서의 쿠데타 징후’란 제목의 정세분석 보고서를 보면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준비하려고 군에 비상을 걸었다”고 적혀 있다. 미국의 폭로전문 언론인인 시무어 허시는 저서 ‘키신저, 권력의 대가’에서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아누크 정권 전복을 노려왔으며 1969년 미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론 놀 장군을 만나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요청했다”고 썼다. 미국이 캄보디아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했고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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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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