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로부터 5일 후 하나로통신 임시주총회장. LG그룹이 하나로통신 인수를 위해 추진한 유상증자안이 2, 3대 주주인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반대로 부결됐다. LG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정사장은 그 날 오후부터 나흘 간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구본무 LG 회장은 정사장이 제출한 사표를 반려했다.
그러나 두 달여간 계속된 LG의 하나로통신 인수 총력전을 지켜본 통신업계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했다. “그럼 될 줄 알았나” “쉽게 빨리 가려다 큰 코 다쳤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주총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신 지금, LG 내부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명분 있으니 될 줄 알았다. 업계 현실을 잘 모른 채 이지 고우잉(easy going) 한 점에 대해 반성한다.” 인수전에 참가했던 한 고위관계자의 심경 토로다.
그렇다면 LG가 ‘현실을 모른 채 이지 고우잉한’ 부분은 무엇인가. 업계 역학구도 분석에 바탕한 유효 전략 수립 대신, ‘국부유출’ ‘통신 3강 정책 실현’ 등 명분을 내세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끌어내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점이다. 그러나 정통부는 LG안(案) 지지를 암시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고, 경쟁사들은 명분엔 아랑곳없이 각 사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와 관련 ‘신동아’는 LG가 청와대에, 통신시장 구조조정 구상과 정부의 이해 및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 사실을 확인했다. 보고서는 6월 중순 무렵과 7월31일, 2회에 걸쳐 제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2차 보고서는 기자가 직접 그 실체와 보고 시점을 확인했다. 1차 보고서의 경우 관계자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전해들었다.
정부에 ‘전폭적 지원’ 요청
먼저 6월 중순경 제출된 것으로 보이는 A4 8장 분량의 보고서는 크게 ▲하나로통신 외자유치의 문제점 ▲외자유치의 대안 ▲정책 지원 요청 사안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당시 하나로통신은 유동성 문제 해결을 위해, 환란 위기 이후 단일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인 11억달러(약 1조3200억원)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로통신의 1대주주(15.88%)인 LG는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헐값 매각’에 ‘국부 유출’이라는 것이었으나 속내는 달랐다. 외자유치가 성공할 경우 LG는 AIG-뉴브리지캐피탈컨소시엄에 1대 주주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는 곧 지난 3월 신윤식 회장 사퇴 후 유리하게 이끌어 온 하나로통신 경영권 장악 구상이 물거품이 됨을 의미했다. 보고서는 이런한 상황에 처한 LG가 요로에 자사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LG는 보고서에서 예의 외자유치 문제점을 적시한 후 대안으로 ‘선 구조조정, 후 외자유치’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로·데이콤 합병 후 이를 주축으로 두루넷·온세통신까지 합병, 후발주자 간 구조조정을 단행한 뒤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외자유치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에 성공할 경우 예상되는 추가 수익(5450억~8050억원)과 비용절감액(1050억~2180억원)도 명시했다.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8개항의 ‘정책 지원 요청 사안’이다. △휴대인터넷 서비스에 필수적인 2.3기가헤르츠(GHZ) 주파수 허가시 후발 사업자 우선 배려 △노조 등 이해 관계자들이 하나로·데이콤 간 합병을 지원할 수 있도록 여건 조성 △파워콤에 하나로·데이콤 통신망 매각 허용 △하나로·데이콤의 온세통신·두루넷 인수 시 합리적 조건으로 인수 가능토록 지원 △합병회사 증자 및 외자유치시까지 산업은행 등 하나로통신 주채권자들의 채권 일부를 롤 오버(만기연장)할 수 있도록 지원 등이다. 한마디로 LG는 후발사업자 합병에 있어, 정부에 전폭적이고 거의 전방위적인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7월3일, 하나로통신 외자유치안은 LG그룹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후 LG는 5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안을 상정했다. 주당 2500원에 유상증자를 추진하되, 실권주 발행시 전량을 LG가 인수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되면 LG는 하나로통신의 명실상부한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2, 3대 주주인 삼성전자, SK텔레콤이 가만있지 않았다. 조건이 월등하게 유리한 외자유치안을 마다하고 유상증자를 밀어붙이는 것은, 싼값에 하나로통신을 인수해 LG그룹의 통신사업 부실을 해소하는 데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내 초고속통신망 시장의 27%를 차지하는 하나로통신은 외국자본의 남다른 구애를 받아온 몇 안 되는 한국 기업 중 하나다. LG로서는 얼마든지 ‘데이콤 망의 파워콤 매각으로 파워콤 인수 시 발생한 부채 해결→경영 사정이 어려운 데이콤과 하나로통신 합병→외자 유치 및 두루넷·온세통신 합병, 이 때 정부의 적극적 지원 요구→유무선통합사업자 변신→유무선 번들링 상품 개발로 매출 신장→기업가치 상승’의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