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때부터 경영자의 시각과 마인드를 갖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사장의 눈엔 이 기획안이 어떻게 비칠까?’ 늘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일했죠. 밤 12시 안에 집에 들어간 적이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을 정도로 회사 일에 미친 듯 매달렸어요. 아마도 입사동기들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이 일했을 겁니다. 덕분에 회사 윗사람에게 인정받았고 덤으로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란 별명도 얻었죠.”
그는 입사하면서부터 탁월한 사업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료곡물 수입 관행은 곡물상을 상대할 때 무조건 값을 깎고 보는 식이었다. 그는 이런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가격을 깎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신 곡물상에게 고급정보를 달라고 요구했다.
사료에 쓰이는 곡물은 주로 옥수수나 소맥 등으로 그 생산량과 가격은 수출국의 기호 변화와 정치경제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그는 미리 이런 정보를 알고 곡물 가격이 저렴한 시기를 골라 수입하는 전략을 세웠던 것. 게다가 값을 깎지 않자 곡물상들은 앞다퉈 그에게 정보를 주었고, 그는 경쟁업체보다 싼 가격에 곡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동기보다 빠르게 진급했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하루빨리 현장에서 실전경험을 쌓아가며 일을 배우고 싶었다. 기업경영인이 되기로 한 꿈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에게 현장은 아주 좋은 배움터였기 때문이다.
“이천 사료공장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때 회사 운영과 대리점 관리, 생산과 영업라인 업무 등에 대해 상세히 배웠습니다. 지금 제너시스를 운영하는 전략도 그때 현장에서 배운 경험이 큰 보탬이 되고 있어요.”
부도업체 맡아 업계 매출 1위로 탈바꿈
1994년 미원은 부도난 닭고기 도육업체인 ‘천호마니커’를 인수하면서 그에게 마니커 영업부장직을 맡겼다. 당시 그는 미원이 중국에 세운 사료공장에 사장으로 취임하기로 한 상태였는데 느닷없이 부도난 회사인 천호마니커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내심 중국행을 기대했던 그였기에 실망이 컸지만 회사에서 정해준 일이니 어쩔 수없이 따라야만 했다.
당시 천호마니커의 하루 평균 닭고기 판매량은 부도 전 5만수, 부도 후엔 1만수도 채 되지 않았다. 그가 출근해 보니 신입으로 보이는 영업사원 3명만 빈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업무 파악을 해보니 제대로 된 서류는 하나도 없고 갚아야 할 미수금만 쌓여 있었다. 참담했다.
“그렇다고 그냥 신입사원 얼굴 보면서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좀 허황되다 싶은 전략을 세웠습니다. 3개월 내에 5만수를 판매하겠다고 하니 아무도 믿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는 매달 닭고기 판매량 1만수를 늘려나갔고 1만수이던 판매량을 6개월 만에 10만수로 만들어냈다.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마니커는 폭발적 성장세로 업계 매출순위 1위를 넘볼 정도가되었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일이 대리점주들을 찾아다니며 닭고기 판매 활로를 열어줄 것을 부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에서 사료부문 관리를 맡았던 것과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재직한 경험은 윤회장을 닭고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스스로 ‘타고난 영업맨’이라고 자부할 만큼 영업능력도 탁월했다.
그냥 마니커 영업부장으로 있어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은 됐으나 그는 거기서 눌러앉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회사에 입사해 몸 사리지 않고 일한 것은 한 회사를 제대로 운영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동안 실전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업다운 사업을 한번 펼쳐보자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루 20만 마리나 되는 닭고기를 대리점에서 모두 다 처분할 수는 없었다. 또 다른 판매처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치킨전문점이었어요. 치킨은 모든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잘만 하면 장사가 될거라고 판단했던 거지요. 당시 우리나라 외식업 프랜차이즈는 KFC나 맥도널드 같은 외국계 기업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순수 국내 치킨전문점으로 프랜차이즈 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어요.”
4년 만에 비비큐 가맹점 1000개 돌파
그러나 윤회장의 이런 바람은 회사 중역들과의 이견으로 갈등을 빚게 된다. 윤회장은 치킨이라는 상품에 걸맞은 소형점을 주장했고, 회사측은 회사 이미지에 맞는 대형 프랜차이즈를 주장했던 것. 일부 중역들의 계속적인 반대에 부딪쳐 치킨전문점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그냥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미원이라는 브랜드 이미지, 미원연구소가 개발한 맛, 마니커 생산라인 등 성공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중대 결심을 했죠. 제가 직접 치킨전문점을 운영하기로 하고 제너시스(창세기)라는 회사를 설립했어요. 치킨전문점 이름은 비비큐라고 지었고요. 매뉴얼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가맹점 교육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가맹점 지원을 위해 초기부터 본사 직원을 30명이나 두는 모험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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