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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④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 “이제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연해주 남부 교통요지 바라바쉬 일대의 한인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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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몽구가이강 아래쪽으로 흐르는 케도르바야 파지(Kedorvaia Pad)강 주변에도 한인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강의 이름과 같은 케도르바야 파지의 집들은 해안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 마을은 몽구가이로부터 약 15km 거리에 있었는데, 다시 방천목(Panchaimoigi)과 치무허(Tsimukhe)라는 두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치우허가 본래의 케도르바야 파지마을이다. 러시아 지명으로 수호레치예(Sukhorech’e)라고 불리기도 한 방천목은 아무르만 건너편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운송되는 물산, 특히 만주로부터 실려오는 가축들이 집결됐던 곳이다. 1885년 당시 케도르바야 파지를 거쳐 운송되는 가축의 수는 연간 7000두에 달했다. 당시 이 마을에는 23가구가 거주하였는데, 20가구의 한인들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여호인(餘戶人)이었다.

방천목의 주민들은 극히 소수만이 농업에 종사했고 대다수는 만주로부터 가축을 실어오는 마부들과 각지로부터 와서 기항하는 거룻배 선원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비해 치무허 마을 주민들은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다.

오늘날의 모습은 어떨까. 2002년 7월초 필자는 조사단을 이끌고 바라바쉬, 즉 옛 몽구가이를 찾았다. 바라바쉬에는 지금도 러시아 군영이 있다. 마을 곳곳에 군인들의 막사가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옛 한인마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사단은 한 러시아 노인의 안내를 받아 몽구가이강 일대 6개 마을 가운데 아직까지 옛 이름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는 오브치니코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한인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한 러시아 할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집 앞뜰에 있는 우물을 보여주었는데, 한인들의 우물을 보고 이를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했다. 깊은 우물을 돌로 둘러싼 완연한 한국형 우물이었다. 텃밭 한가운데 오래 전에 한인들이 사용했음직한 우물도 남아 있었다. 또 집안 여기저기에는 돌절구, 맷돌 등 한인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어 만난 일리야 포도르비치씨로부터 보다 생생한 증언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집 옆에 남아 있는 작고 낡은 집을 가리켰다. 한인 콜호스(옛 소련의 공동체마을)의 상점으로 ‘트락토르’라고 불렸던 곳이라고 했다. “그 상점의 주인은 콜호스 책임자인 김파벨이라는 고려인이었는데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고 포도르비치씨는 회고했다.

비옥한 농토, 풍부한 농업용수

1928년에 출생해 올해 75세가 된 이 노인은 아홉 살 때이던 1936년 한인 콜호스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한인들과 함께 한글을 배웠다. 학교 교장인 아버지는 한인이었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아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하니 기억을 더듬으며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열’을 세더니 “한글을 좀더 오래 배웠으면 지금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당시 자기보다 아홉 살 위였던 형은 한국어를 잘해 통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포도르비치씨에 따르면 몽구가이에는 1000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비교적 잘살았다고 한다.

러시아정부의 강제이주 당시에 대해 그는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들은 이주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모든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결국 집들만 남게 됐다. 한인들이 떠난 후, 러시아 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5가구만 남았다. 현재의 오브치니코바 주민들은 후에 러시아 중부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포도르비치씨는 과거를 회상하듯 “이제 한인들이 다시 와서 살아도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오브치니코바에 사는 여러 노인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1937년 강제이주 직전 몽구가이는 1000명 규모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고, 적은 수의 러시아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1906년경 23가구 125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것이 30년 만에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셈이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와 바라바쉬 사이 곳곳에도 한인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라즈돌리노예강 하구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라즈돌리노예도 그 중 하나다. 1895년경 형성된 이 마을은 초기에 여호인(餘戶人) 30가구가 살았으나 10년 후인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다. 지금은 라즈돌리노예강, 즉 옛 수이푼강 하구 일대에 광활한 습지의 삼각주가 형성돼 있는데 비옥한 농토에 농업용수가 풍부해 농사를 짓는 데 최적지라는 환경여건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라즈돌리노예를 지나 남쪽 아무르만의 서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라즈돌리노예강 하구로 들어가는 4개의 지류가 나타난다. 중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발원해 동쪽의 아무르만으로 흘러드는 이들 강은 페르바야 레츠카(Pervaia Rechka, 첫 번째강), 후타라야 레츠카(Vtaraia Rechka, 두 번째강 또는 칭거우재 Chingouza), 산두거우(三道溝, San’daugou, Sadagou 또는 Sandagu, 현재의 네진카강 Rechka Nezhinka), 얼두거우(二道溝, Erdaogou 또는 El’dagou, 현재의 아나녜프카강Rechka Anaen’evka), 그라즈나야강(Rechka Griaznaia)이다. 이들 강 주변에는 강 이름과 같은 이름의 한인마을들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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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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