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동생 김영과(현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의 경기고 졸업식장에 참석한 김명자 전 장관(오른쪽에서 첫번째)과 그의 부모.
그랬다. 나도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임명될 당시에는 몇 날 몇 달을 하게 될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여자’가, 그것도 정치와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교수’가 옛말로 하자면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것이므로,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자식에겐들 부모의 자리가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아버지(金在根·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역임)는 내 삶의 방향을 이끌고 세상살이의 좌표를 말없이 일러준 소중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의 삶과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25년.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4반세기 동안 내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의 자리’는 그렇게 훈훈하기만 하다.
왕따가 된 전학생
아버지는 1남5녀의 맏딸인 나를 유난히 소중히 여겨 업어가며 키우셨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내게 갖고 계신 ‘큰’ 기대를 반드시 만족시켜드려야 할 것 같았다. 소꿉장난을 하던 시절 내가 가졌던 첫 번째 생각은 커서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유치원도 가지 못한 주제에 대학원엘 갔으면 좋겠다는 지적 허영심을 키우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 있던 수많은 책에서 비롯됐다. 6·25전쟁이 터져 피란갈 때 아버지는 그 책들을 김장독에 고이 넣어 땅 속에 묻으셨다. 가재도구는 다 내버려두고 유독 책만 챙기신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영문학 책들은 나에겐 그림의 떡이었지만 학문을 해보겠다는 열망을 키우는 자극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맏딸에 대한 아버지의 크나큰 기대, 그리고 아버지의 책으로 둘러싸인 집안 분위기는 내게 학문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학문의 길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신당동의 흥인국민학교에서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시체말로 ‘귀족학교’라고 할 수 있던 사대부국으로 전학간 나는 ‘인생초년’에 단단히 쓴맛을 봐야 했다.
그전 학교에서는 거의 공주병에 빠져 있던 내가 전학간 학교에서는 졸지에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국에 다니던 애들은 매우 똑똑했고 배경이 대단했다. 장관 집 아이들은 거의 다 모여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 하면 왕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음악시험에서 음표의 각 부분 이름을 쓰는 문제가 나왔다. 나는 ‘꼬리’라고 써야 할 답안에 ‘꼬랑지’라고 써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뿐인가. 갓 전학 가서 지지세력이 하나도 없는 터에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정견 발표 등 이것저것 다했는데, 막상 개표를 하고 보니 꼴찌였다.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데,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꼴찌의 심경은 ‘참담’ 그 자체였다. 그때 빨간 나비넥타이 매고 당당하게 어린이회장에 당선된 어린이가 지금의 정대철 의원이다. 그 뒤로 나는 언제 어디에서건 출마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