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연애편지 사전 검열한 아버지 “이것이 정말 명문이구나”

  • 글: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서울대 기술정책대학원 과정 CEO 초빙교수 mjkim321@snu.ac.kr

    입력2003-08-25 17: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연애편지 사전 검열한 아버지 “이것이 정말 명문이구나”

    1974년 동생 김영과(현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의 경기고 졸업식장에 참석한 김명자 전 장관(오른쪽에서 첫번째)과 그의 부모.

    캠퍼스의 풋풋한 분위기 속에 묻혀 나이 먹는 줄도 모르고 살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1999년 6월25일) 환경부 장관으로 옮겨 3년8개월을 채우고 지난 2월26일 홀가분히 짐을 벗었다. 내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옆의 어른들이 하신 첫 말씀은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였다.

    그랬다. 나도 그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임명될 당시에는 몇 날 몇 달을 하게 될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여자’가, 그것도 정치와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교수’가 옛말로 하자면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것이므로,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자식에겐들 부모의 자리가 소중하지 않겠는가마는, 아버지(金在根·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역임)는 내 삶의 방향을 이끌고 세상살이의 좌표를 말없이 일러준 소중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의 삶과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25년.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4반세기 동안 내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의 자리’는 그렇게 훈훈하기만 하다.

    왕따가 된 전학생

    아버지는 1남5녀의 맏딸인 나를 유난히 소중히 여겨 업어가며 키우셨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내게 갖고 계신 ‘큰’ 기대를 반드시 만족시켜드려야 할 것 같았다. 소꿉장난을 하던 시절 내가 가졌던 첫 번째 생각은 커서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유치원도 가지 못한 주제에 대학원엘 갔으면 좋겠다는 지적 허영심을 키우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 있던 수많은 책에서 비롯됐다. 6·25전쟁이 터져 피란갈 때 아버지는 그 책들을 김장독에 고이 넣어 땅 속에 묻으셨다. 가재도구는 다 내버려두고 유독 책만 챙기신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애지중지한 영문학 책들은 나에겐 그림의 떡이었지만 학문을 해보겠다는 열망을 키우는 자극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맏딸에 대한 아버지의 크나큰 기대, 그리고 아버지의 책으로 둘러싸인 집안 분위기는 내게 학문에 대한 동경심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학문의 길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신당동의 흥인국민학교에서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시체말로 ‘귀족학교’라고 할 수 있던 사대부국으로 전학간 나는 ‘인생초년’에 단단히 쓴맛을 봐야 했다.

    그전 학교에서는 거의 공주병에 빠져 있던 내가 전학간 학교에서는 졸지에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사대부국에 다니던 애들은 매우 똑똑했고 배경이 대단했다. 장관 집 아이들은 거의 다 모여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 하면 왕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음악시험에서 음표의 각 부분 이름을 쓰는 문제가 나왔다. 나는 ‘꼬리’라고 써야 할 답안에 ‘꼬랑지’라고 써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뿐인가. 갓 전학 가서 지지세력이 하나도 없는 터에 전교 어린이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정견 발표 등 이것저것 다했는데, 막상 개표를 하고 보니 꼴찌였다.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지는데,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꼴찌의 심경은 ‘참담’ 그 자체였다. 그때 빨간 나비넥타이 매고 당당하게 어린이회장에 당선된 어린이가 지금의 정대철 의원이다. 그 뒤로 나는 언제 어디에서건 출마라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1956년 경기여중에 입학한 후에도 그 후유증은 남았다. 선생님은 내게 “입학 때부터 성적이 좋은데 왜 그렇게 나서질 않느냐”고 하셨다. 앞에 나서는 일은 단념하고 조용조용 지내는 내가 딱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중학교에서 나는 나보다 훨씬 조숙한 짝을 만났다. 그 친구는 고민이 많아서 일찍 어른이 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 탓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리고 배다른 동생을 낳아 사춘기의 딸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가 모두 우리 아버지 같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와는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어졌는데, 고2 때인 어느 가을날 그는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내 인상이 차가워 가까이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여학교 시절부터 빈틈없이 짜여진 사고와 행동의 틀 속에서 모범생 노릇을 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줄곧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다. 규율부에서 따졌던 품행에도 별로 하자가 없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로렌스 올리비에와 진 시몬즈가 주연을 맡은 ‘햄릿’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훈육주임 선생님한테 붙잡힐 뻔했던 것이 내 불량기의 전부였다. 그날 운수 나쁘게 걸린 다른 그룹은 정학을 당했다. 요즘 말로 하면 운칠복삼(運七福三)이었다.

    내가 모범생을 지향한 것은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아주 잘 나온 성적표를 들고 하교하는 날은 왜 그리 버스가 더디게 느껴졌던지…. 내 성적표를 보고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는 것이 학창시절 최대의 보람이었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까닭

    나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한다. 지금도 KBS 1-TV의 ‘노란 손수건’을 꼭 보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도무지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드라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볼 때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고 “그렇게 슬프냐”고 묻는다. 내가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영화 중에 에바 가드너 주연의 ‘맨발의 백작부인’이란 게 있다. 내용은 잊혀지고 나무 가리개 밑으로 보이는 여자의 맨발 장면밖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문화에 대한 눈을 틔워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에게 어느 영화사의 특작이냐 대작이냐에 따라 그 영화가 볼 만한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다고 일러주시기도 했다.

    1962년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하면서 나는 화학과를 선택했다. 예일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계셨던 아버지 말씀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지금은 멸종(?)된 말이지만 아버지께서는 “단과대학 중에는 문리과대학이 꽃이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최신정보에 의하면 앞으로는 자연과학분야가 유망해 보인다”고 진학지도를 해주셨다.

    나는 국어와 영어 성적이 가장 좋았으니 문과 쪽으로 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나에게 “법과대학에 갔더라면 아주 잘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과학 분야에서 교육과 훈련을 쌓아온 것이 장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문리대 동숭동 캠퍼스는 정다웠다. 젊은이들의 패기와 열정이 있어 더욱 그랬다. 나는 이과 여학생의 전형답게 단짝친구와 조용히 교실과 실험실을 오가며 4년을 보냈다.

    청춘남녀가 모여 있는 캠퍼스에서는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때만 해도 편지 띄우는 게 고작이었는데, 우리 집에도 몇십 통이 배달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하자면 연애편지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온 편지를 모조리 읽고 넘겨주셨다. 바로 ‘사전검열’을 하신 것인데, 당시 나는 당연한 일로 여겼다.

    편지를 보고 나서 아버지는 논평까지 하셨다. 철학과 학생이 보낸 편지가 몇 통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보기 드물게 잘 쓴 명문”이라고 칭찬을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내용이나 글씨가 내 수준에는 넘쳤던 것 같다. 연애편지 치고는 너무 현학적이었던 것이다.

    학생운동 주도했다가 퇴학

    아버지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그러다 스트라이크에 앞장서는 바람에 학교를 쫓겨나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를 졸업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학생운동을 주동했다가 퇴학당했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너무나 조용한 분이셨고, 친척들은 한결같이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그런 분이셨다니.

    내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선산 김씨 문중에서 ‘반갑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딸이라서 나는 족보와 별 상관없이 살아왔는데 장관이 돼 시찰길에 구미·선산에 들르니 사당에 절을 하는 행사도 있었다.

    선산 김씨 판서공파(判書公派)가 단천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이어(移御)할 때 따라갔던 판서공파들은 태조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단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조상 가운데 점필재 김종직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개인적인 취향이 그분과 맞았던가 보다.

    나는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으로 따지면 ‘함경도 또순이’다. 한 살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단천에 갔었다는데, 물론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언젠가 친구 아버지께서 내게 “외모는 여려 보이지만, 일에서 당찬 것이 또순이 탓이로구나” 하셨다. 정말 그럴까.

    아버지는 할머니께서 오십에 이르러서 낳은 유별난 늦둥이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큰형이 아버지뻘이 되었다. 선산 김씨 문중은 곡물 무역 등에 성공해 갑부가 됐다 한다. 좀 보태서 말한다면 ‘단천 사람들은 김씨 문중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하신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땅도 돈도 아니고 미국 유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유학가기엔 너무나 먼 나라였다. 여기에 집안의 반대가 보태져 아버지는 가까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셨는데 미국에의 꿈은 훗날 예일대 교환교수로 가면서 이루셨다.

    1950년대 말 아버지를 초청했던 예일대의 피어슨 교수는 아버지께 “전액 장학금을 지원할 테니 박사학위를 끝내고 귀국하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마다하고 돌아오셨다. 미국 대학의 학위를 따기 위해서 가족을 나 몰라라 남겨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분단은 우리 가족사에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우리 집은 오래 전부터 서울에 터잡고 살아서 아픔이 덜했지만, 아버지 친척들은 이산가족으로 갈렸다. 이러한 아픔은 몇십년을 두고도 아물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보스턴 백’이란 외래어에 익숙했다. 월남하면서 땅문서·집문서를 가득 채운 보스턴 백 하나만 들고 몸만 빠져나왔단 얘기를 듣고 또 들었기 때문이다. 집안 어른들은 실향의 아픔을 가슴에 품은 채 이제나저제나 고향땅을 밟게 되기만을 기다리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살이의 격변과 세월의 부침 같은 것에 상당히 초연한 분이었다. 학문생활에서 얻어진 혜안이었을까, 삶을 관조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구름 위에서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동서냉전이 첨예하던 1960년대 중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예각을 세우고 대치하고 있지만, 그리 머지않아 마치 구교의 성당과 신교의 교회당이 한 동네에 공존하듯이 서로 융화하고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

    그건 그렇고 훗날 돌이켜보니, 1950년대 말 미국은 소련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에 충격을 받아 ‘혁명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학기술교육에 변화를 꾀했다. 1960년대 미국은 우주개발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한 야심작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켰고 케네디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우주인을 실은 인공위성을 달에 착륙시키고 다시 지구로 무사 귀환시키겠노라”며 전국민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리고 성공을 거두었다.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진단, 간암

    나는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대 유학길에 올랐다. 나의 유학은 스푸트니크 충격에서 비롯된 과학교육 진흥의 일환으로 미국이 1960년대 아시아권의 자연과학계 유학생을 집중 지원했던 정책과 관계가 있다. 왕복 여비는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받았으므로 완전 자립형 유학이었다.

    1967년 버지니아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후 소정의 시험을 거쳐 곧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리고 물리화학을 전공해 1971년 스물일곱의 나이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여자가 박사학위 받는 일이 흔치가 않아서 신문에 날 정도였다.

    1971년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집안의 외며느리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귀국했을 때 시할아버님인 외솔(최현배) 내외분께서는 이미 세상을 뜨신 뒤였지만, 손부(孫婦)가 공부하는 걸 무척 대견해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 생활은 하루를 스물다섯 시간으로 살아도 모자랄 정도였다. 게다가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여자 과학자가 부딪쳐야 하는 벽과 대학에서의 연구 여건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도 순탄치 않았다. 더욱이 시어머니의 투병생활로 간병인 역할까지 해야 했으니, 한창 열기와 총기로 연구에 몰두해야 할 시간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가정과 전문직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시기에 따라 우선순위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내 자신과 부단히 타협을 했다.

    그러나 사회의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리값을 제대로 못한다는 갈등이 점차 가중되는 무게로 나를 눌러왔다. 그럴 즈음인 1976년 아버지는 다시 예일대학을 다녀오시고, 1977년 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정년퇴임 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얼굴에 병색이 돈다 싶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진단이 떨어졌다. 간암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맛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러나 모두 허망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병명도 모르는 채 조용히 1년을 투병하시다 1978년 8월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천방지축인 손자들에게 그저 “머리를 대는 베개를 발로 밟는 게 아니다”라고만 꾸중하셨던 온화한 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가신 빈 자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커지는 것만 같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구름바다에 오르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70년대가 마감될 즈음 사회적 혼란은 대학을 극심한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그 혼돈 속에서 나는 맹렬히 번역하고 글 써내는 일에 몰입했다. 원고를 집중적으로 쓴 탓에 오른손 엄지 인대가 늘어날 정도였는데 다행히 워드프로세서가 나와 고통을 면할 수 있었다. 특히 1980년대 초부터 내리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한 책 십여 권을 펴냈다. 그 덕에 매스컴도 많이 탔다.

    그 중에서 ‘엔트로피’는 뜻하지 않게 효자노릇을 했고, ‘과학혁명의 구조’는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유행시키면서 지금까지 20년 넘게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런 작업이 또 다른 일을 몰고 와 위원회 활동으로 가지를 치면서, 나는 1994년 대한민국과학기술상 진흥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반까지도 내 인생은 ‘철없던’ 시절이었다. 1987년 들어 인생의 예측불가능성의 한계가 얼마나 엄청날 수 있는가를 절감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의 본능적인 직관이랄까, 그 결과가 파국일 것임을 직감했으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이없게도 ‘속수무책’뿐이었다. 어쩔 수 없다면 가장 의연한 모습으로 살아보자, 그 길밖에는 없었다.

    이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소설을 무색케 하는 기이한 일들이 연속되면서 그 결과가 정음사라는 출판사의 부도로 나타났다. 개인적으로는 결혼의 파국으로 귀결됐다. 그 과정은 10년 가까이 끌었다. “나에게 닥친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 나는 참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했는가”가 포기의 기준이었다. 그 결단에 이르는 데 10년이 흘렀던 것이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역시 세 아이의 앞날이었다. 그러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시련의 와중에 셋째는 연세대를 낙방하고, 서울여대를 한 학기 다니다가 2학기 때 재수를 결행해 다음해 서울대에 들어갔다. 새벽 6시와 밤 12시 나는 딸아이를 집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실어 날랐다. 우리 모녀는 몇 마디 주고받지도 못할 만큼 지쳐 있었지만 어려움을 같이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어느 해 생일이었던가, 둘째인 아들이 메모와 함께 꽃 한송이를 남겼다. ‘엄마, 고생 많으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있잖아요. 근사한 선물을 하고 싶지만 자금이 없네요. 흔한 꽃이지만 기쁘게 받으실 줄로 알겠습니다.’

    엄마를 거두느라 신경쓰는 맏딸에게는 “사람은 정말 어려울 때 알아보는 거라더라”며 오히려 내가 태연한 척했다.

    ‘정직한 실패를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라’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외로움 속에서 ‘정직한 실패를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실상 그 이상의 것은 필요없었다. “시련은 그저 지나가지 않는다더라, 거기서 다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 얻어진다더라.” 주술처럼 속으로 뇌고 또 되뇌었다.

    “모든 것은 다 흘러갈 뿐이다, 기쁨도 고통도…. 그리하여 집착할 아무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과 버려도 좋을 군더더기가 보이는 듯했다. 나는 아버지께 나의 실패를 보여드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련과 실패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얻었다. 겸손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1999년 환경부 장관이 되면서 나는 더 바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열심히 살았다.

    나는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은 관료조직에 아무런 행정경험도 없이 들어간 여교수였다. 난마처럼 얽힌 환경행정을 과연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우려가 컸던 초기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최장수 ‘여성’장관, ‘국민의 정부’ 최장수 장관을 기록했고, 환경부는 정부 업무평가에서 두 번 다 최우수 부처로 선정되는 기록을 세웠다.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이다. 그리고 물러날 때를 잘 맞추어 나의 임무를 마감했다. 나는 인생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국가를 위해 여한 없이 봉사하는 과분한 영광을 누린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이제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다. 나와 시련을 함께했던 세 아이는 다 제 갈 길을 찾아갔다. 미국에서 낳은 맏딸은 서른이 훨씬 넘어 다시 미국엘 갔고 미국 청년과 결혼했다. ‘엄마가 반대하면 어쩌나’ 하고 1년여를 끙끙거리다가, “인종과 국적이 결혼의 결격사유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내 말을 듣고 오히려 놀라 입이 함지박만해졌다.

    둘째인 아들이 “엄마는 어떤 며느리감을 원하느냐”고 묻기에 “조촐한 집안의 참한 색시면 된다”고 했더니, 양친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인 집안의 둘째딸을 데려왔다. 셋째는 같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을 데려 왔기에 두말없이 허락했다. 세 아이의 결혼은 모두 내가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가까운 친지들만 모여서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렀다. 우리 올케는 “그런 자리에 있으니까 그렇게 간소하게 할 수 있지, 보통사람이 그러면 흉잡혀요” 하면서 웃었다.

    지난 3년8개월 동안 나는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우리는 동지로서 많은 일을 신명나게 했다. 대학에 27년간 몸담았지만 공무원 조직처럼 그렇게 묵묵히 일을 척척 해내는 데도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람 잘 날 없다는 환경부 장관 자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조용히 일을 잘했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다. 나는 “주위 분들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많은 덕을 입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면 “그런 덕을 아무나 입는 게 아니지요” 하는 얘기가 이어진다.

    그렇다. 나는 덕을 입는 조건으로 정직과 성실, 그리고 선량함을 꼽고 싶다. 이것을 갖춰야 남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게 그런 자질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일 것이다. 물질적 유산 대신 세상을 사는 데 가장 소중한 자산을 물려주신 분, 그러기에 아버지는 나의 삶과 원천적으로 연결돼 있다.

    11살 아래로 하나뿐인 남동생이 20여 년간 공직을 천직으로 알고 일하는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다. 막내제부도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내가 공직에서 봉사한 것에 대해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가 바라신 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 더 중요한 건 앞날이다. 지나간 세월의 실패와 성공에서 얻은 깨달음의 편린 위에서 더욱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언젠가 저 세상으로 떠난 아버지께서 “애 많이 썼구나, 이제 푹 쉬어라” 하시며 반겨주실 날까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