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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사전 검열한 아버지 “이것이 정말 명문이구나”

  • 글: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서울대 기술정책대학원 과정 CEO 초빙교수 mjkim321@snu.ac.kr

연애편지 사전 검열한 아버지 “이것이 정말 명문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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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경기여중에 입학한 후에도 그 후유증은 남았다. 선생님은 내게 “입학 때부터 성적이 좋은데 왜 그렇게 나서질 않느냐”고 하셨다. 앞에 나서는 일은 단념하고 조용조용 지내는 내가 딱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중학교에서 나는 나보다 훨씬 조숙한 짝을 만났다. 그 친구는 고민이 많아서 일찍 어른이 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 탓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리고 배다른 동생을 낳아 사춘기의 딸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가 모두 우리 아버지 같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와는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어졌는데, 고2 때인 어느 가을날 그는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내 인상이 차가워 가까이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여학교 시절부터 빈틈없이 짜여진 사고와 행동의 틀 속에서 모범생 노릇을 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줄곧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다. 규율부에서 따졌던 품행에도 별로 하자가 없었다. 학기말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로렌스 올리비에와 진 시몬즈가 주연을 맡은 ‘햄릿’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훈육주임 선생님한테 붙잡힐 뻔했던 것이 내 불량기의 전부였다. 그날 운수 나쁘게 걸린 다른 그룹은 정학을 당했다. 요즘 말로 하면 운칠복삼(運七福三)이었다.

내가 모범생을 지향한 것은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아주 잘 나온 성적표를 들고 하교하는 날은 왜 그리 버스가 더디게 느껴졌던지…. 내 성적표를 보고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는 것이 학창시절 최대의 보람이었다.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까닭



나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한다. 지금도 KBS 1-TV의 ‘노란 손수건’을 꼭 보고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도무지 취향에 맞는 영화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드라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볼 때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고 “그렇게 슬프냐”고 묻는다. 내가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영화 중에 에바 가드너 주연의 ‘맨발의 백작부인’이란 게 있다. 내용은 잊혀지고 나무 가리개 밑으로 보이는 여자의 맨발 장면밖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지만 아버지는 아마도 문화에 대한 눈을 틔워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어린 나에게 어느 영화사의 특작이냐 대작이냐에 따라 그 영화가 볼 만한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다고 일러주시기도 했다.

1962년 서울대 문리대로 진학하면서 나는 화학과를 선택했다. 예일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계셨던 아버지 말씀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지금은 멸종(?)된 말이지만 아버지께서는 “단과대학 중에는 문리과대학이 꽃이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최신정보에 의하면 앞으로는 자연과학분야가 유망해 보인다”고 진학지도를 해주셨다.

나는 국어와 영어 성적이 가장 좋았으니 문과 쪽으로 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친구들은 나에게 “법과대학에 갔더라면 아주 잘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과학 분야에서 교육과 훈련을 쌓아온 것이 장관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문리대 동숭동 캠퍼스는 정다웠다. 젊은이들의 패기와 열정이 있어 더욱 그랬다. 나는 이과 여학생의 전형답게 단짝친구와 조용히 교실과 실험실을 오가며 4년을 보냈다.

청춘남녀가 모여 있는 캠퍼스에서는 이런저런 얘깃거리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때만 해도 편지 띄우는 게 고작이었는데, 우리 집에도 몇십 통이 배달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말하자면 연애편지였는데, 아버지는 내게 온 편지를 모조리 읽고 넘겨주셨다. 바로 ‘사전검열’을 하신 것인데, 당시 나는 당연한 일로 여겼다.

편지를 보고 나서 아버지는 논평까지 하셨다. 철학과 학생이 보낸 편지가 몇 통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보기 드물게 잘 쓴 명문”이라고 칭찬을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내용이나 글씨가 내 수준에는 넘쳤던 것 같다. 연애편지 치고는 너무 현학적이었던 것이다.

학생운동 주도했다가 퇴학

아버지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그러다 스트라이크에 앞장서는 바람에 학교를 쫓겨나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를 졸업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학생운동을 주동했다가 퇴학당했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너무나 조용한 분이셨고, 친척들은 한결같이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그런 분이셨다니.

내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선산 김씨 문중에서 ‘반갑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딸이라서 나는 족보와 별 상관없이 살아왔는데 장관이 돼 시찰길에 구미·선산에 들르니 사당에 절을 하는 행사도 있었다.

선산 김씨 판서공파(判書公派)가 단천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으로 이어(移御)할 때 따라갔던 판서공파들은 태조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자 단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조상 가운데 점필재 김종직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개인적인 취향이 그분과 맞았던가 보다.

나는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으로 따지면 ‘함경도 또순이’다. 한 살 때는 어머니 등에 업혀 단천에 갔었다는데, 물론 내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 언젠가 친구 아버지께서 내게 “외모는 여려 보이지만, 일에서 당찬 것이 또순이 탓이로구나” 하셨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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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명자 전 환경부장관·서울대 기술정책대학원 과정 CEO 초빙교수 mjkim32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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