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

전천후 ‘도박공화국’ 호주

승률 0%에 인생 베팅하는 ‘심심한 천국’ 사람들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전천후 ‘도박공화국’ 호주

2/8
밝은 불빛 아래서 보니 얼굴이 아주 초췌했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실 뿐 필자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차비도 없을 만큼 몽땅 털렸으니 그 심정이 오죽 하겠나 싶어서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자동차 키를 흔들어 보이면서 “주차장에 차가 있습니다”했더니, 그는 정색을 하며 “정말입니다. 차비를 빌려주시면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라고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절대로 신용카드에서 돈을 인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S의 그토록 간절한 표정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100호주달러(약 8만원)를 인출해서 그에게 줬다. 그는 자신의 명함 뒤에다 ‘100달러를 차용했음’이라고 써서 건네줬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그에게 줄 100호주달러가 아닌 200호주달러를 인출했기 때문이다. 밑천이 달릴 때마다 자꾸 신용카드에 손이 갔지만 꾹꾹 눌러 참던 터인데, 그에게 돈을 건네면서 딱 떨어지는 핑계거리를 찾은 셈이었다.

S와 헤어진 필자는 거의 달음박질치듯이 포커머신(슬롯머신) 쪽으로 갔다. 그리고 밤새도록 내 돈을 삼켜댄 포커머신 앞에 다시 앉았다. ‘나일의 여왕(The Queen of Nile·호주의 대표적인 포커머신 게임의 이름)’이 왼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나 나일의 여왕은 돈을 걸지 않는 한, 기계적으로 왼쪽 눈을 찡긋거릴 뿐 절대로 도박 상대는 되어주지 않는다. 캐시박스에 지폐를 밀어넣었더니 모든 버튼이 환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카지노 동쪽 계단에서 느꼈던 후회나 쓸쓸함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었다.

다만 맹렬한 욕구가 ‘나일의 여왕’을 향해 솟구칠 뿐이었다. 미친 듯이 버튼을 눌렀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버튼을 누르는 횟수에 반비례하여 잔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나중엔 승부에 대한 의욕조차 사라져 빨리 잃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패배의식마저 생겼다.

바로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일의 여왕’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은전이 필자에게 베풀어졌다. 피라미드 다섯 개가 동시에 뜬 것. 포커머신에서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스크린엔 축하풍선이 가득 떠올랐다.

거의 바닥난 잔고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축하음악이 끝난 후 체크해보니 믿기 어려운 액수였다. 지난 여섯 시간 동안 잃은 돈을 만회하고도 남는 액수였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게임을 하던 중국계 여성이 “너는 럭키한 남자다. 당장 뽑아가지고 집에 가라”고 했다. 카지노 종업원을 불러서 돈을 뽑아달라고 했더니 그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간절히 기도하는 도박꾼

계산대로 가서 돈을 받아들고 맥주 한 잔을 마셨다. 달콤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일요일 아침은 이미 밝아 있었다. 밤새도록 포커머신에서 발하는 불빛에 시달린 눈에 비친 달링하버의 바다 빛깔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몹시 침울하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바다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젯밤의 일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시종일관 곤두박질치다가 마지막 순간 대역전을 이룬 해피엔딩의 드라마. 주머니가 두툼해진 것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자니 시장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스낵코너로 걸어가던 필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새벽 4시에 나한테서 차비를 얻어간 S가 블랙잭 테이블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의 앞자리엔 칩이 높게 쌓여 있었다. 끗발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서 우거지상을 한 중국계 도박꾼들과 달리 그는 테이블을 혼자서 주도하는 듯했다.

블랙잭 게임을 전혀 할 줄 모르는 필자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돈을 땄다. 그런데 그에게서 이상한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큰 베팅을 하면서 잠깐씩 눈을 감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집중을 하거나 무슨 결단이라도 내리는 것 같았는데, 달리 생각해보니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드를 받으면서 가벼운 미소를 흘리던 그가 큰 베팅을 할 때마다 간절한 몸짓을 보였기 때문이다.

카지노 내방객들에게 모닝커피가 제공됐다. 커피 잔을 집어들기 위해 몸을 뒤로 돌리던 S가 필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그가 “아직 집에 가지 않았냐?”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2/8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목록 닫기

전천후 ‘도박공화국’ 호주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