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영화 ‘달콤한 인생’은 ‘피범벅 누아르’라 칭한 감독의 말처럼 시종일관 욕조에서, 빙판에서 피가 번진다. ‘장화 홍련’에서는 여주인공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피로 복도 전체를 물들이더니 블랙 코미디를 표방한 ‘반칙왕’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포크 끝으로 찍힌 정수리에서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데뷔작까지 가보자. ‘조용한 가족’에서 산장의 첫 손님은 부엌칼로 배를 난자당해 죽는다. 침대 시트와 방바닥까지 흘러내린 검붉은 피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 정말 비린내를 풍기는 것 같다.
그런데 김지운 감독의 ‘피’는 아름답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화면 전체로 분사되는 피를 계속 접하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박 감독의 피가 잔혹함을 느끼게 한다면 김 감독의 피는 강렬하고 화려하다.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색감이다. ‘달콤한 인생’을 보면서도 머리통이 총탄에 바스러지고, 회 뜨듯 칼로 배를 휘젓는 잔인한 영상에 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새삼 ‘피의 미학(美學)’을 떠올렸다.
김지운 감독과의 인터뷰는 ‘달콤한 인생’ 개봉 시기에 맞춰 ‘신동아’ 5월호용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달콤한 인생’ 일본 프로모션 일정과 겹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이 영화가 칸 영화제 공식 섹션 중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만 해도 유일하게 공식 섹션에 진출한 한국 영화였다(이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 공식 섹션 중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그래서 “칸에도 갔으니 인터뷰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제로는 ‘피맛’을 아는 이 감독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였다.

-실내에서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야 이유가 있었죠. 낯가림이 심한 편이거든요.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말을 안 해도 되며, 인사하기 싫은 사람한테 인사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하지만 이젠 습관이 됐어요. 제가 모자와 선글라스를 안 쓰면 주변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고 심지어 못 알아보기도 하죠.”
영화주간지 ‘씨네 21’의 편집장을 지낸 조선희씨는 저서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에서 “그는 늘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뭔가 우수에 찬 듯, 또는 심각한 듯 다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코미디 반죽’인 자신을 은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자분자분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하면서도 어느 순간 선글라스를 벗었고,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게 하는 특유의 ‘김지운식’ 유머를 자주 선보였다.
지독한 자기애가 부른 파멸
-칸에 처음으로 초청받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영화제 가려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니까 그저 보너스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국제적으로도 좋은 영화로 인정을 받았다는 정도의 충족감이랄까. 사실 가면 귀찮은 일이 너무 많아요. 턱시도도 입어야죠, 한국에서도 제작 발표회 같은 부대행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런 데 참가해야죠. 칸에 간다니까 지인들이 ‘네가 턱시도를 입어?’라고 했을 정도예요.”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이 아쉽진 않나요.
“경쟁 부문에 초청돼야만 세계 영화사 조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뿐인 것 같아요. 공식 섹션이든 부대행사든 우리 영화가 많이 초청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둬야 합니다. 순위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또 심사위원장의 성향에 따라 섹션별 출품작이 많이 달라져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도 처음에는 비경쟁으로 갔다가 심사위원장인 쿠엔틴 타란티노에 의해서 경쟁으로 옮겨진 거고요. 경쟁에 갔고 또 수상했다고 해서 경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아쉬워하거나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그것보다 ‘달콤한 인생’에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들지 않은 게 아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