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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기자의 사람 속으로

열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참고 견뎌야지, 뻥치지 말아야지”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열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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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김 총장은 또 “옛다, 식권” “이쁘게 찍어줄 거야?” “알았어, 갈게” 하며 일일이 다 받아준다. 아니면 먼저 “밥 먹었니?” “담배 피우면 나중에 애 낳을 때 고생한다” “어딜 그렇게 뛰어가?” 하며 자꾸 말을 붙인다. 친구 같기도 하고, 가족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익히 상상하는 바 도무지 대학 총장과 학생들 사이로는 뵈지 않는다.

총장실로 돌아가 차 한 잔 놓고 마주앉는다. 김 총장은 무슨 얘길 해도 ‘허허’ 웃기부터 한다. 그럼그럼, 맞아맞아… 그런 말들이 입에 붙었다. 답변은 짧고 단순하다. 명쾌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하는 데 영 취미가 없단 말이다. ‘좋다 싫다’가 분명치 않은 것은 물론이요, 과거사를 물으면 “그거 잘된 거야,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하며 무조건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참 밍밍하기 짝이 없는 대화인데, 또 한편으론 죽치고 앉아 자꾸 수다를 떨고 싶어지니 이상하다.

열아홉 겨울, 각혈을 하다

김 총장은 1930년생이다. 경기도 강화가 고향이다. 강화는 1889년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성공회 선교사가 최초로 대중 선교활동에 나선 곳이다. 이 때 김 총장의 조부가 성공회에 귀의함으로써 그의 집안은 초기 대한성공회의 틀을 닦는 데 힘을 보태게 된다.

“아버지의 사촌형제 중에는 신부님도 계셨어요. 강화도 온수리 교회를 오래 지키셨지. 그러니 꽤 일찍부터 가족 모두 성공회 신자가 됐던 거야.”



그는 서울 교동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열 때문이었다.

“처음에 원서를 넣었지만 집이 강화라 그랬나 떨어졌지. 그래, 온수리 길상국민학교를 1년 다니다 교동으로 전학을 갔지요. 세 살 터울의 여동생, 여섯 살 터울인 남동생도 그랬어. 삼남매가 다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 유학이라니, 우리 어머니가 참 대단하셨지.”

‘농사도 짓고 사업도 좀 한’ 집안 형편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아주 미안한 얘기지만 일제시대에 밥 굶지 않고 살았으니…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어. 어머니도 무서웠지만 그래도 늘 밀어주시고 끌어주시고… 그런데 내가 큰 실망을 드렸지.”

교동국민학교 시절 그는 보이스카우트에 해양소년단에, 군사훈련 대대장까지 도맡아 한 팔방미인이었다.

“착한 어린이지만 개구장이였지 뭐. 그런데 너무 잘한다 잘한다 하면 아이가 비뚤어지거든. 그 칭찬을 받아서 꼭 그렇게 가야 할텐데, 우쭐해가지고, 내가 제일이라고….”

결국 그는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던 경기중학생이 아닌 배재중학생이 됐다. 배재중 2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어떻든 그는 공부는 뒷전, 운동에만 정신을 쏟았다. 그는 “그때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했으면 신부가 못 됐겠지, 그럼그럼” 하며 껄껄 웃는다.

4학년(지금의 고교 1학년) 때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었다. 장비를 마련할 길이 없으니 혹은 직접 만들어 쓰고 혹은 미국인들 경기에 구경 가 ‘슬쩍’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5학년이 되고 6학년이 되고, 졸업 전 마지막 겨울이 시작될 즈음 기막힌 일이 생겼다. 각혈을 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무식한 거야. 얼른 집에 가서 주사 맞고 그랬어야 하는데, 겨울 내내 시합이니 안 뛸 수도 없고 말이야.”

시즌이 끝나고 강화도 집에 가서야 비로소 병원을 찾았다.

“폐결핵 3기라는 거야. 의사 말이 얼마 못살고 죽는다고 그래. 아이고 이거….”

그래도 혹 몰라 아이스하키팀이 있는 연세대에 체육 특기생 입학을 신청했다.

“시험도 보고 신체검사도 하고…. 떨어졌지. 내 딴에는 ‘아, 나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하는 거지. 그럼그럼, 그렇게 생각해야지. 공부 못해서 떨어졌다 할 수는 없잖아, 허허.”

“바보처럼, 돼지처럼 산 거지”

곧이어 전쟁이 터졌다. 강화에도 북한군이 들이닥쳤지만 ‘동네 사람 다 아는 폐병쟁이’인 그는 인민군 치하 3개월을 별탈 없이 넘길 수 있었다. 1·4 후퇴 후에는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 와중에 경기여고 졸업 후 피란지에서 대학에 다니던 여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서울 수복 후에는 서울대 상대에 다니던 남동생이 여의도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 후에 여동생은 교수 생활을 하다 평화봉사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사회사업가가 됐다. 남동생은 현지 증권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유능한 금융인으로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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