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좌충우돌, 한나라당 영남의원 성향 정밀분석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입력2005-08-16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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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주병 투척, 검찰에 ‘반성문’ 쓰기, 툭하면 터져나오는 케케묵은 색깔론…. 한나라당 일부 영남 출신 의원들이 잇달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과거 이들의 수구보수적 행보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많기에 최근 벌어진 이들의 좌충우돌 행태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한 진보주의 논객은 “영남 의원들이 바뀌지 않기에 한나라당은 절대 바뀔 수 없다”고 일갈한다. 당사자들은 “일부의 돌출행동을 갖고 특정지역 의원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한다.
    좌충우돌, 한나라당 영남의원 성향 정밀분석
    ▶법조인·관료·재력가 3각 편대

    ▶과도한 엘리트 의식, 폭력으로 돌출

    ▶‘튀면 죽어, 끼리끼리 뭉쳐!’ 소집단주의

    ▶‘공천=당선’ 등식이 빚어낸 ‘한국판 네오콘’

    “요즘한나라당은 사고만 일어났다 하면 영남 의원들이야.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술에 취해 맥주병을 던지질 않나, 60대 경비원을 폭행하지 않나, 대낮 호텔 객실에 여자와 함께 있다가 망신당하고, 검찰 비판하는 글을 올려 용기 있다고 칭찬했더니 얼마 뒤 “검찰에 사죄합니다”라며 ‘반성문’ 쓰고, 선거법 위반한 아내를 1년 넘게 도피시키고….”



    “사고만 치나? 수구 꼴통들의 집합소 아냐. 북한 노동당원 암약설을 거침없이 흘리고, 호주제를 지킬 자신이 없으면 ‘그것’을 떼버리라고 국회 단상에서 당당하게 외치니.”

    “옛날 의원들이야 그렇다 치자. 그런데 영남 물갈이 공천했다는데, 새로 들어온 초선 의원들도 똑같아.”

    한나라당의 텃밭이자 뿌리, 알파요 오메가인 영남 지역에서 배출된 의원들을 향해 요즘 쏟아지는 지탄들이다. 영남은 한나라당에 이중적이다. 지금은 든든한 후원지역이지만, 한번 민심이 돌아서면 한나라당이 와르르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곳이다.

    한나라당에서 영남 의원의 수는 소속 의원(125명)의 절반에 이르는 61명이다. 대구·경북·부산·경남·울산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 61명이고, 비례대표 중 영남 출신을 합하면 그보다 더 많다. 영남 의원들은 당의 핵심이자 주류다.

    그런데 요즘 일부 영남 의원들이 어이없는 추태를 연출해 다른 영남 의원들까지 ‘도매값’으로 도마에 오르는 처지가 됐다. 젊고 냉정한 당직자들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흔든다. 한나라당은 요즘 정당 지지도에서 열린우리당에 앞서 있다. 그래서 내부의 문제가 감춰진 측면이 있다. 가장 심각한 내부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영남 의원의 ‘과거회귀적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텃밭이 오히려 위기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는 영남발(發) 위기론도 물밑에서 확산 중이다.

    ‘쪽수’는 많으면서 수에 걸맞은 정치적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의 현실이다. 영남 의원과 관련된 논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분석해 본다. 첫째, 영남에서 공천에 문제가 있었나. 둘째, 최근의 돌출행동은 일과성인가, 아니면 구조적 문제인가. 셋째, 영남 의원들은 개혁적인가.

    “쪽수만 많고, 대접은 못 받고”

    우선 공천 문제. 한나라당은 ‘거대한 로펌’으로 봐도 될 만큼 법조인 출신 의원이 많다. 그 가운데서도 영남에 지역구를 둔 법조인 출신이 많다. 한나라당 의원 중 변호사 자격 소지자는 30명으로 전체 의원 125명의 24%. 30명 중 20명이 영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이 13명이다. 한나라당 영남 지역 공천의 가장 큰 특징은 ‘법조인 대거 발탁’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또한 이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후자의 질문에 대한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는 부정적이다. 예비 법조인이 1년에 1000명씩 배출되는 요즘 판·검사 출신이 갖는 희소성, 참신성은 많이 희석됐다. 공천 당시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개혁적 보수세력’을 적극 등용하는 ‘물갈이 공천’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판·검사 출신의 법조인은 대체로 ‘엘리트 의식’이나 ‘체제수호’적 성향이 강해 한나라당을 향한 시대적 요구인 ‘물갈이’에 딱 들어맞진 않았다는 얘기다. 영남에서 공천받은 법조인 중 사회개혁운동을 활발히 한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왜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법조인을 대거 공천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인물난’이었다. 지난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이던 A의원은 “영남 지역에서 물갈이를 하긴 해야 하는데 마땅한 대안이 있어야지…그저 만만한 게 법조인이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영남권 법조인 출신 의원들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중진 그룹으로 박희태 국회부의장, 강재섭 원내대표, 여의도 연구소장을 맡은 김기춘 의원, 정형근 의원 등이 포진해 있다. 강재섭 의원(대구 서)은 5공 말기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임명된 뒤 13대 국회에 들어와 내리 5선을 기록한 인물이다. 김기춘 의원(경남 거제)은 중앙정보부장 보좌역 시절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일화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 뒤에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것은 일명 ‘초원복집’ 사건이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당시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자고 모의한 사건이다.

    정형근 의원(부산 북·강서갑)은 더 설명이 필요없는 보수적 법조인이다. 그의 이력에선 1983년 안기부 법률담당관을 시작으로 대공수사국장, 제1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5·6공 당시 시국사건을 진두지휘한 것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그에겐 ‘색깔론’ ‘공작정치의 귀재’ ‘저격수’ 같은 말들이 따라다닌다.

    엄호성 의원(부산 사하갑)은 행정고시와 사법고시를 모두 합격한 뒤 경찰에서 뼈가 굵었다. 서울 중부경찰서장이던 1998년 경무관 승진에서 탈락하자 “DJ 정부의 PK 죽이기”라며 옷을 벗었다. DJ의 대북송금 의혹을 터뜨린 주인공이다.

    법조인 득실, ‘색깔론과 주먹’

    법조계 출신 영남권 초선 의원들 중 상당수는 이들 법조 출신 영남권 선배 의원의 성향을 그대로 계승했다. 신·구 보수성향 법조인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의 전체적 성향이나 색깔이 권력 지향적, 보수적으로 보이게 됐다는 분석이다.

    가장 눈에 띄는 영남권 초선 의원은 검사 출신의 주성영 의원(대구 동갑). 그는 “386은 베짱이”, “NGO는 기생충”, “이철우 의원은 간첩으로 암약 중” 등의 거친 발언을 쏟아냈다. 덕분에 그는 일순간 진보세력의 ‘표적’이 됐으며, 동시에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의 전체 이미지를 더 오른쪽으로 옮겨놓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전주지검 검사로 근무할 때 관내 공안기관 간부 회식 자리에서 사소한 말다툼 끝에 술병을 집어들어 내리친 것이 당시 유종근 전북지사 비서실장의 이마를 찍어 눈썹 주위가 6㎝ 정도 찢어지는 불상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 일로 천안지청으로 전보되는 경징계를 받아 검사 생명을 이었다.

    장윤석 의원(경북 영주)은 법무부 검찰국장을 지내다 노무현 정부의 서열 파괴인사로 서울고검 차장검사로 좌천되자 사표를 던졌다. 문민정부 초기 12·12, 5·18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으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개발, 주목받았다.

    김정훈 의원(부산 남갑)은 1996년 신한국당 법률자문위원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었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법률특보로 활동했으며 1998년부터 4년여 동안 한나라당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박승환 의원(부산 금정)은 부산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85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바로 부산에서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지난해 말 국회에서 주성영, 김기현 의원과 함께 “이철우 의원은 북한 노동당원”이란 발언을 했다. 한편으로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적극 참여, 2003년에는 민변 부산·경남지부회장으로 일한 이력이 있다. 반면 판사 출신 김기현 의원(울산 남을)은 국회에 들어오기 전 SK케미칼 노조와 전국택시노조 울산시본부 자문변호사를 지내는 등 노조 변론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한나라당 영남 의원 중엔 관료 출신도 많다. 이들 대부분은 유신정권과 5·6공 정부에서 뼈가 굵었다. 사석에서 만나면 화려했던 옛 여당 시절을 얘기하는 이가 많다.

    3선의 이상배 의원(경북 상주)은 1966년 27세의 나이로 경북 울진군수로 발령받아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5공화국 때 대통령 교육문화비서관과 정무비서관을 역임했으며 6공화국 들어 대통령 행정수석을 지냈다. 이해봉 의원(대구 달서을)은 내무부, 청와대, 국무총리실을 두루 거쳤고 체육청소년부 차관, 대구시장을 역임했다.

    박종근 의원(대구 달서갑)은 조흥은행 행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후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관여하면서 정책의 큰 틀 짜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1980년 국보위가 탄생하면서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에서 강제해직됐다. 2년 가까운 취업금지 규제에서 풀려난 뒤 금성사 전무로 일하기도 했다.

    ‘극우의 상징’ 김용갑 의원(경남 밀양·창녕)도 관료 출신이다. 5공 말기 청와대 민정수석, 6공 초기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그는 정부의 대북 정책을 원색적으로 비난해왔는데, 선거 때마다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곤욕을 치렀다. 아들 셋 중 둘은 병역 면제, 한 명은 보충역으로 근무했다.

    재력 1∼3위 모두 영남 의원

    재선의 김정부 의원(경남 마산갑)은 30년 가까이 국세청에서 일한 세무 전문가. 중부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관직 생활을 마무리한 뒤 3년간 서안주정㈜ 대표이사로 일했다. 그의 부인은 17대 총선 때 2억900여 만원의 불법 선거자금을 쓴 혐의로 1년 넘게 수배 중이다. 그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당선된 국회의원의 배우자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으면 당선을 무효화하는 선거법 조항이 연좌제를 금지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제기해 “파렴치하다”는 비난도 받았다.

    초선의 권경석 의원(경남 창원갑)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베트남전 참전 경력이 있다. 1977년 이른바 ‘유신사무관’으로 부산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97년 경남 행정부지사로 취임, 5년3개월간 경남 행정을 이끌었다.

    한나라당 내 재산가는 대부분 영남에 몰려 있다. 당내 재산가 1, 2, 3위인 김무성, 정의화, 김양수 의원이 모두 PK 출신이다. 정의화 의원(부산 중·동)은 신경외과 전문의이자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손꼽히는 재력가다. 그의 공식 재산은 정몽준 의원(무소속) 다음으로 많은 184억900만원이다. 수련의 시절, 갑작스런 사고로 타계한 장인의 작은 병원을 맡아 부산에서 손꼽히는 종합병원으로 키워냈다고 한다.

    김양수 의원(경남 양산)은 유림건설 창업주 겸 회장으로, 한나라당 의원 평균 재산을 올려놓은 인물이다. 80억대 재산가로 초선 의원 가운데 2위에 오르더니 올해 초 재산변동 내역 공개 때는 증액 1위를 기록했다. 이상득 의원(경북 포항남·울릉)은 코오롱상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오랜 기업계 경험을 바탕으로 한나라당에서 대표적 경제통으로 분류된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친형이란 점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

    김태환 의원(경북 구미을)은 한때 TK지역의 맹주였던 김윤환 전 의원의 친동생이다. 그는 재계에서 비교적 성공한 CEO로 평가됐다.

    재력가라면 김무성 의원(부산 남을)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현 사무총장인 김 의원은 100억대 재산으로 재산 신고 순위에서 늘 앞자리에 있다. (주)전방 창업주 김용주씨가 선친이며,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 누이다. 김문희 이사장은 현정은 현대 회장의 모친. 따라서 그는 현정은 회장의 외삼촌이 된다. 형 김창성씨는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이다.

    결국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법조인·관료·재산가의 ‘3각 편대’가 굳건히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엘리트 계층, 기득권 계층에서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이 주로 배출됨을 알 수 있다.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에서 출신계층의 정서를 표출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영남 의원들은 사회·경제적으로 기득권 계층 출신이면서 동시에 ‘공천=당선’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기득권’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영남 의원들을 은연중에 엘리트 의식, 권위주의적 사고에 젖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진보적 인사 등 ‘타 계급’을 향한 막무가내식 돌출발언이나 지역 경제인, 경비원 등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행사는 이러한 잠재적 엘리트 의식이 과도하게 표출된 양태일 수 있다. 또한 비경쟁적 환경은 영남 의원들을 배타적 사고와 소집단주의적 경향에 빠져들게 하는 유혹으로도 작용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가 한창이던 2003년 말. 공천심사위원 중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큰 B의원의 집으로 늦은 밤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왔다. 한 명은 영남권 한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한 후보자였고, 또 한 명은 공천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의원과 친분 있는 기자였다. 자신이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다 후보자는 대뜸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B의원은 “어허, 왜 이러시나”하며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싫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 후보자는 이후 공천을 받고 영남권 17대 의원으로 당선돼 활동 중이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보장되는 영남 지역 공천 경쟁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영남 의원과 다른 지역 의원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는 뭐니뭐니 해도 공천이 곧 당선이란 등식이다.

    겸손을 미덕으로 치는 영남 정서

    이 등식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영남 출신 의원들과 다른 지역 의원들의 차이는 대부분 이 등식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 의원들의 행동은 선수(選數)와 지역구를 막론하고 이 등식이 그려내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양태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다.

    한나라당 경북도당은 최근 경선을 통해 3선의 권오을 의원(경북 안동)을 도당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권 의원은 경선에서 임인배 의원(경북 김천)과 이병석 의원(경북 포항 북)을 제쳤다. 그의 승인(勝因)을 두고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왔지만 그 가운데 재미있는 분석의 하나는 “그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란 것이다.

    권 의원은 TK 의원 같지 않은 TK 의원이다. 그는 이른바 ‘개혁성향’ 의원이다. 비주류 개혁파 의원들의 모임인 ‘수요모임’의 전신격인 ‘미래연대’를 만드는 데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의총에서도 ‘튀는’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16대까지 그는 소장파 의원으로 분류됐다. 그런 그를 TK지역 의원들이 곱게 본 것은 아니었다. 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으로 대표되는 소장파에 대한 TK 의원들의 인식은 극히 부정적이다. 따라서 그들과 어울리는 권 의원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잘난 척하기는…” “왜 저렇게 튀냐”는 얘기가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17대 총선 이후 선거법에 발목이 잡히면서 의원직 상실 위기에 처한 권 의원은 지난 1년을 사실상 의정 공백 상태로 보냈다. 그 시기 그에게 변화가 보였다. 그는 눈에 띄게 입을 닫았고 소장파와도 거리를 뒀다. TK 중진 의원과의 친목 모임에도 활발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머리 숙일 줄 아네”란 얘기가 나왔다.

    “튀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지켜지는 곳이 바로 영남이다. 다음은 초선 김재원 의원(경북 군위·의성·청송)의 말이다.

    “TK지역 초선 의원들은 처음엔 소신대로 뭔가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국회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여러 모로 견제가 들어온다. 한두 번 겪다보면 ‘에이 뭐, 이래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한나라당 공천의 목표 중 하나는 영남 지역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하자였다. 그 결과 42%인 26명(TK 11명, PK 15명)의 초선 의원이 등장했다. 여당 경험도, 거대 야당 경험도 없는 초선들의 대거 등장은 ‘영남 변화’의 가능성으로 읽혔다. 그러나 요즘 들어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자주 입을 모은다. “별로 바뀐 것 같지 않다”고.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흐름에 신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동화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TK 출신 초선 C의원의 말이다.

    “‘수구꼴통 소리 듣는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 ‘지역주의에 안주하지 말자’는 게 총선 직후 초선들이 은연중에 한 다짐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얘기 꺼내는 사람도 없다.”

    그 한켠에는 ‘겸손’을 미덕으로 치는 영남 지역 특유의 정서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선배들을 밟고 가서는 안 된다’는 서열 의식도 어느 지역보다 강하다.

    하지만 한나라당 관계자 L씨는 문화적 영향 이전에 ‘공천=당선’ 공식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튀는 것을 꺼리고 선후배간 서열을 중시하는 문화는 보스가 가운데 앉아 공천권을 통해 일률적으로 통제하던 과거 정치 스타일이 화석처럼 남은 결과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인데 굳이 튈 이유가 없다. 괜히 나섰다가 보스에게 잘못 보일 게 뭔가. 지금도 영남권 의원들은 ‘공천이 곧 당선인데, 공천만 받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에 튀는 행보, 소신 행보를 극도로 자제하는 것이다.”

    영남 지역 한 재선 의원의 비유는 설득력 있다.

    “예선(공천 통과)에 필요한 자질과 본선(총선)에 필요한 자질은 분명 다르다. 튀는 것은 본선에 필요하다. 영남에선 예선만 통과하면 되는데 굳이 튈 필요가 있겠는가.”

    한나라당에서 영남 출신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얽어 매는 족쇄이기도 하다. 두 번의 대선 실패 후 더 그렇게 되고 있다. 당 대표, 원내대표, 사무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이지만 영남 의원의 의정활동은 왠지 활발하지 못하다. 고개 숙인 채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자괴심에 빠진 같다.

    총선 직후 당선자 연찬회가 열린 2004년 4월. 서울에 지역구를 둔 이재오 의원이 등단했다.

    “이제 영남권은 병참기지 역할을 하고 수도권이 전진기지가 될 수 있게 체제를 바꾸자.”

    이른바 영남 2선(線) 후퇴론이다. 그 바닥엔 두 차례 대선 실패가 영남 출신 때문이 아니냐는 책임론이 깔려 있었다.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영남 초선 의원들이 불만을 쏟아냈다. “영남이 뭘 잘못했는데?” “대선에서 득표 많이 한 게 죄인가. 왜 우리더러 물러서 있으라는 거야.”

    영남 의원들은 당직, 국회 상임위원장직 배분 등에서 지도부와 파열음을 냈다. 이는 지역 모임이 활성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한다. 영남 의원들의 ‘지역 모임’은 당내 어떤 모임보다 활발하다. 영남권 초선 의원 27명이 회원인 ‘낙동 모임’도 만들어졌다. 이들 중 일부는 박근혜 대표를 대신해 술을 마셔준다는 ‘흑기사 모임’의 멤버이기도 하다. 곽성문, 권경석, 유기준, 김정훈, 주호영, 주성영, 이명규, 장윤석, 김재원 의원이 그들이다.

    이 같은 ‘동향출신 끼리끼리’ 모임은 ‘계보 정치’ 이후의 공백을 메우는 구실도 한다. 공천권 보장과 돈으로 유지되던 계보정치는 16대를 끝으로 거의 사라졌다. “TK에선 허주(고 김윤환 전 의원)를 마지막으로 보스가 사라졌다”고 한다. PK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이렇다 할 지역 맹주가 없다.

    축이 사라지고 헐겁다. 그 헐거움을 메워주는 뭔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끼리끼리 뭉치자’다. 이 같은 성격의 영남권 의원 모임을 더욱 촘촘하게 엮어주는 것은 고교 동문회다. 국회의원 선수(選數)보다 고교 졸업기수가 의원들을 좌지우지한다.

    영남 의원의 모임은 정치인의 모임이면서도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수렴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모임은 주로 친목 위주로 흐른다. 한 영남권 의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모이면 늘 목소리는 비분강개다. ‘꼭 정권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정작 술 마시고 골프 치는 시간이 너무 많은데….”

    골프 뒤풀이 자리 맥주병 투척도 이런 친목 모임 활성화 와중에 빚어진 사건이다.

    집토끼만 잘 지키면 된다

    중앙정치 무대에서 거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든 의원들이 영남 지역엔 꽤 있다. “지역구에만 전력투구하면 되는데 굳이 중앙 무대를 기웃댈 필요가 없다”는 게 이들의 생존법이다.

    경북지역 D의원이 대표적 인물. 중앙 정치권에서 그는 손사래를 내젓게 하는 대표적 기피 인물로 찍혀 있다. 여러 ‘추문’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의 분위기는 완연히 다르다. “다음 선거도 보장돼 있다” “경쟁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에만 전력투구한 결과라고 한다.

    이들이 즐겨 쓰는 논리가 이른바 ‘집토끼, 산토끼론’이다. 영남 병참기지론의 대항마 격이다. 이 논리는 최근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다. 기존 지지층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구지역 초선 E의원의 말은 당당하다.

    “지난 번 대선 결과를 냉철하게 분석해보라. 다른 지역에서 득표율 몇 퍼센트 더 올리려는 수고를 영남에다 쏟으면 충분히 정권을 잡을 수 있다. 서진(西進)이니 중도(中道)니 아무리 얘기해보라, 대권 잡는 데 도움이 되나. 산토끼 잡으려들다가 집토끼마저 놓친다.”

    지방자치단체장마저 석권한 상황이라 한나라당은 지금도 영남에선 ‘여당’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영남의 여당은 늘 한나라당이다. 영남은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지(領地)다. 그곳에서 오로지 자신의 집토끼만 지키면 된다는 것이 상당수 영남 의원의 주장이다. “그러다 정권을 못 가져와도 상관없다”는 것이 어쩌면 영남 의원들의 솔직한 생각인지 모른다.

    반성과 개혁의 조짐 싹트기도

    그러나 영남에서도 이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영남 유권자들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남 의원들 중 일부도 변화에 동참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영남권을 제대로 물갈이하는 태풍이 될지, 국지성 미풍에 그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지난 총선 때 PK지역에서, 지난 4·30재보선 때 경북 영천 지역에서 ‘탈(脫)한나라당’ 정서가 폭넓게 감지됐다. 유권자들의 이반 현상은 향후 10월 재보궐선거, 내년 지방선거, 2007년 대통령선거를 잇따라 남겨둔 한나라당에 심각한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PK지역을 중심으로 기존의 영남 스타일과 다른 의원도 등장했다. 이른바 개혁 소장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박형준, 이성권, 김명주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한 영남 출신 의원 보좌관 F씨의 해석이다.

    “지지율 80%와 60%의 차이다. 영남에서도 지지율 80% 지역은 ‘공천=당선’을 보장한다. 그러나 지지율 60% 지역은 당선을 보장하지 못한다. TK를 중심으로 한 상당수 영남 지역에선 당내 예선(공천)만 통과하면 당선이지만, PK 일부 지역에선 이제 공개경쟁(선거)을 거쳐야 하는 구도로 변하고 있다. 결국 그 차이가 의원의 스타일을 앞으로도 계속 바꾸게 할 것이다.”

    TK에서도 변화의 기미가 조금씩 느껴진다. 4·30재보선 때 불거진 맥주병 투척 사건은 영천 유권자들에게 기름을 끼얹었다. “만날 한나라당 뽑아줘도 한 게 뭐가 있는데?” “보릿자루도 한나라당 간판만 달면 뽑아줬더니 저 모양이다.” 이 같은 위기의식을 대변하는 말이 “이젠 집토끼도 달아나고 없다”는 말이다.

    좌충우돌, 한나라당 영남의원 성향 정밀분석
    이런 가운데 화려하진 않지만 내실 있는 의정활동을 펴는 TK 의원들도 나타나고 있다. 판사 출신이면서 대구에 지역구를 둔 주호영 의원. 지난해 국정감사 때 두 시민단체에서 각각 ‘국감평가 법사위 1위 의원’ ‘법사위 베스트 5’에 선정됐다. TV 토론, 한나라당 관련 재판 등에서 ‘어떤 경우에도 흥분하지 않으며 쉽고 논리적인 말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음’을 당 인사들에게서 인정받고 있다. 당내에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합리적 보수주의, 개혁적 보수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주 의원을 평가한다.

    두 번의 대선 실패 이후 영남 민심은 한나라당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18대 총선(2008년 4월)이 대선(2007년 12월) 직후 이어지는 정치 일정은 매우 중요한 변수다. 두 선거가 너무 가까이 접해 있다. 2008년 2월 신임 대통령 취임식의 들뜬 분위기가 불과 두 달 뒤인 2008년 4월 총선으로 그대로 이어져 선거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2007년 대선의 승자가 2008년 총선까지 독식할 가능성이 높은 구도이다.

    영남 의원 大몰락 시나리오

    정권을 빼앗아오는 것은 지키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렵다. 대선엔 워낙 변수가 많아 한나라당의 대권 탈환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이 2007년 대선에서도 승리하지 못할 경우 한나라당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영남의 민심 이반은 불보듯하며 ‘공천=당선’ 등식도 깨질 수 있다. 유권자에 의한 물갈이, 한나라당 영남 의원들의 대거 탈락, 한나라당의 몰락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영남 의원들에게 선택은 두 가지다. 당의 집권을 위해 발벗고 나서거나, ‘공천=당선’ 등식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당선될 수 있도록 본선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선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영남 의원들이 구습, 기득권 집착, 끼리끼리 의식, 소지역주의를 벗어던지고 시대의 변화에 맞게 환골탈태, 개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의 집권을 위해서나 당사자의 본선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나 절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상황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다음은 김재원 의원이 4·30재보선 이후 당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글이다.

    “…그렇다. 지난 시절 우리 TK 정치인들은 그야말로 춘삼월 호시절을 구가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지역 민심보다 한나라당 공천이 더 중요한 기묘한 선거판을 훑고 다니는 바람에, 민심을 천심으로 아는 겸손함과 성실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역 정서를 볼모로 현실에 안주하는 구태 정치인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선배 정치인들도 ‘굴러다니는 금배지를 주워 여의도에 입성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상마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앞서 세 질문(영남에서의 공천에 문제가 있었나, 최근의 돌출 행동이 구조적 문제인가, 영남의원들은 개혁적인가)을 한나라당 영남 의원 스스로 던져봐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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