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길을 왔지만 정작 험로는 지금부터다. 2005년 9월 핵 폐기 원칙에 합의한 6자회담은, 앞으로 북핵 사찰 검증절차에 관한논의를 핫이슈로 다루게 된다. 그 구체적인 방안과 폐기방법 등을 논의하는 작업은 참가국들 사이에 이전 못지않은 팽팽한 긴장을 야기하며 전개될 것이다. 과연 사찰대상으로 거론되는 항목은 무엇이며,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불거질 주요 대립점은 무엇인가. 미리 보는 2006년 북핵 문제 논의 로드맵.
기억해야 할 것은 1994년의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검증과정, 즉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사찰하는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최대의 난제는 핵 프로그램의 검증과 폐기라는 데 이견이 없다. 확실한 검증을 위해 기존의 IAEA 핵사찰보다 더 강력한 수준의 검증을 요구하는 미국과 이에 반발할 북한의 행보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 9월19일 공동성명에서 북한은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의거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검증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6자회담이 파국을 맞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이렇듯 폭발력을 지닌 북핵 프로그램의 사찰검증 문제는 향후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6자회담 실무회의에서 이와 관련해 빚어질 주요 대립점은 무엇일까.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검증하고 폐기대상을 논의하려면 검증과 폐기의 대상이 될 북한 핵 활동 현황을 사전에 파악해야 한다. 실무회의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불거질 쟁점은 북한의 현재 핵 활동과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를 두고 형성될 것이다. ‘무엇을 사찰할 것이냐’의 문제는 ‘어떻게 사찰할 것이냐’보다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검증할 것인가
북한 핵 활동의 현황에 대한 최근 자료는 지난 11월8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카네기핵비확산회의에서 시그프리드 헥크 박사가 발표한 문건이다. 미국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헥크 박사는 2004년 1월초 미국 민간방북단의 일원으로 영변 핵시설을 방문해 당시 북한이 주장하던 ‘핵 억지력’의 상징인 플루토늄 금속을 눈으로 확인한 바 있으며, 2005년 8월말 영변을 다시 방문해 북한측 책임자들과 인터뷰했다. 헥크 박사가 파악한 내용을 분석하면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핵 활동의 현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북한의 핵 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원자로를 이용한 플루토늄 생산능력, 지금까지 영변의 5MW 흑연로에서 방출된 사용후 핵연료(폐연료봉)의 재처리 여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유무, 핵무기 보유 여부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사찰 절차 논의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이 비교적 쉽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뒤의 두 가지를 놓고서는 만만치 않은 대립이 예상된다.
우선 원자로를 이용한 플루토늄 생산능력 부분을 살펴보자. 연간 플루토늄 5~7kg을 생산할 수 있는 영변 5MW 흑연로는 2003년 2월부터 2005년 3월까지 100% 출력으로 재가동됐다. 그 결과 플루토늄 10~14kg이 포함된 폐연료봉 8000개를 2005년 4월부터 재처리하기 위해 원자로에서 인출했으며, 새 핵연료봉 8000개를 다시 장전했다. 이후 5MW 흑연로는 6월 중순 재가동됐다. 이로써 북한은 1994년 이전에 제작한 5MW 흑연로용 핵연료를 모두 사용했다.
따라서 북한은 핵연료 제조 시설을 재가동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건설이 중단된 영변의 50MW 흑연로도 다시 건설작업이 준비 중이다. 50MW 흑연로를 완공하려면 앞으로 2~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흑연로가 완공되면 연간 56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초기단계에서 건설이 중단된 태천의 200MW 흑연로도 건설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데, 완공될 경우 연간 2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영변의 5MW 흑연로에서 방출된 폐연료봉의 재처리 문제를 살펴보자. 북한이 그동안 폐연료봉을 얼마나 인출했으며 그 안에 플루토늄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는 세 부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1986년부터 가동한 5MW 흑연로는 1989년에 약 70일 동안 가동을 중단하고 폐연료봉을 최대 절반 정도 방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속에는 플루토늄이 최대 8kg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흘러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의해 동결해 보관된 000개 폐연료봉은 25~30kg의 플루토늄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2003년 1월부터 이들 폐연료봉의 재처리에 돌입해 6월말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주장해왔다.
2003년 2월 원자로에 장전됐다가 2005년 4월부터 방출된 새로운 8000개 폐연료봉은 10~14kg의 플루토늄을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폐연료봉은 3개월 동안 냉각과정을 거친 뒤 재처리에 들어갔으며 2005년 12월 중순 재처리가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변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의 용량은 1994년 제네바 합의 당시에 비해 30% 늘어나 하루 약 0.5t의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수 있다. 무게로 약 50t인 8000개 폐연료봉은 냉각 후 100일이면 재처리 완료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상을 종합하면 현재 북한이 폐연료봉으로부터 추출한 것으로 보이는 플루토늄 양은 최대 43±10kg 정도다. 참고로 IAEA에서는 핵무기 제조를 위한 플루토늄 양을 8kg이라고 정하고 있으나, 핵기술의 발전에 따라 5~6kg의 플루토늄으로도 핵무기 1개를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핵무기 7~8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그간 미국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유무 문제다. 실체가 분명한 플루토늄 프로그램과 달리, 2002년 10월 이른바 2차 북핵 위기의 발단이 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아직도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두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미국은 북한이 원심분리기 시설을 만들기 위한 물질과 장비를 획득했다는 증거와, 북한에 우라늄 농축 관련 기술 및 중고품 원심분리기를 제공했다는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진술 등에 근거를 두고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관련된 계획, 장비, 기술적 전문성이 전혀 없다며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논란은 앞으로 열릴 사찰관련 실무회의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2차 북핵 위기 이후 나온 많은 증거는 북한이 최소한 연구개발을 위한 소규모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보유하려 시도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05년 6월5일자 ‘아사히신문’은 북한이 유럽의 우라늄 농축기업인 유렌코사가 개발한 원심분리기에 사용된 알루미늄과 동일한 치수와 소재인 고강도 알루미늄관 150t(원심분리기 2600대 분량)을 러시아 업자에게서 입수했다는 정보를 미국이 확보했다고 전했다. 2005년 9월13일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칸 박사가 북한에 12기의 원심분리기를 제공한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다.
핵무기 1개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HEU) 25kg을 생산하려면 고강도 알루미늄을 사용하는 P1 원심분리기 1000기를 2년 정도 가동해야 한다. 그러나 고강도 알루미늄관과 고속회전을 위한 전동모터 등 원심분리기에 필요한 부품들은 국제수출통제 때문에 북한이 수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한이 설령 원심분리기 여러 대와 설계도를 가졌다 해도 HEU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마지막 쟁점은 북한이 과연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다. 이에 대한 논란은 2005년 2월10일 북한이 핵 보유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잠잠해졌다. 북한이 1980~90년대 핵무기 기폭장치를 정상 작동시키기 위해 고폭실험을 수십 회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음을 감안하면, 1940년대 미국이 개발한 조잡한 형태의 핵무기 기폭장치 개발에 성공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핵실험을 했다는 징후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지만, 성능이 입증되지 않았다 해도 작동이 가능한 기폭장치와 5~6kg의 플루토늄이 있으면 최소한 TNT 1000t 이상 폭발규모의 핵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핵실험 여부가 핵 보유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앞서 설명한 헥커 박사는 북한이 현재 조잡한 형태의 핵무기를 최소한 2~3기 생산했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북한 핵 활동의 현황은 각각의 항목이 6자회담 실무회의 테이블에 올라와 격론의 대상이 될 것이다. 각각의 대상을 구체적인 사찰을 통해 검증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지 왼쪽 표에 정리했다(이 가운데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핵무기 프로그램은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를 가정하고 작성한 것이다). 이렇듯 사찰 및 폐기의 대상이 분명해지면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 논의될 것이고, 실무회의에서 각국의 검증능력을 고려해 구체적인 사찰방법과 절차, 시기를 논의하는 단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HEU 프로그램 검증의 어려움
이러한 구체적인 사찰방법에 대한 논의 또한 앞서 설명한 북한 핵 활동의 네 가지 항목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전의 외국사례를 감안할 때 이들 사안은 IAEA 특별사찰의 형태로 다루어질 공산이 크다. 우선 플루토늄 프로그램의 경우 IAEA 특별사찰의 형태로 진행된다면 북한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전제 아래 3~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는 IAEA가 북한과 핵 사찰 검증범위를 협의하는 데 수개월, 사찰을 위한 특수장비를 제조하고 설치하는 데 1년 내외, 검증을 위한 핵 사찰 수행에 2~3년 내외, 최종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북한의 실제 핵 사찰 수행기간을 최소 2~3년으로 잡은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핵 사찰의 전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남아공의 핵개발은 독일 기술이 바탕이 됐기 때문에 관련기록의 신뢰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데 비해 북한의 경우 자체 기술로 핵개발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더욱 만만치 않다. 더욱이 북한 핵개발을 검증하려면 최소한 10년 이전의 기록까지 확보해 검토해야 한다. 따라서 남아공에 대한 사찰기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경우 시설의 규모가 워낙 작은데다 탐지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북한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 한 높은 수준의 검증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북한에 실제로 핵무기가 존재하는지, 핵무기 생산을 위한 프로그램이 어느 단계까지 진척되었는지 검증하는 작업 또한 예상소요시간을 설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까다롭다.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사찰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측이 검증의 신뢰도를 높이는 다양한 장치를 요구하리라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기존의 IAEA 안전조치(핵사찰)보다 강화된, 미신고 핵 활동을 탐지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추가의정서(additional protocol)’에 북한이 서명해야 한다는 요구다. 북한이 추가의정서에 서명하면 IAEA는 핵 물질 미사용 미신고 핵연료주기시설, 즉 IAEA에 신고되지 않은 우라늄 광산, 우라늄 전환시설, 우라늄 농축시설, 핵연료 제조시설, 재처리시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시설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고 의혹 시설 내외의 시료를 채취해 핵 물질 생산 여부를 확인하는 환경시료를 채취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핵사찰로는 확보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검증이므로 신뢰도가 크게 향상될 수 있다. 2004년 10월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국원자력연구소의 IAEA 미신고 핵 물질 실험 파동에서 목격했듯, 추가의정서의 환경시료 채취는 과거 수십년 전의 미미한 핵 물질 실험까지 밝혀낼 정도로 정밀하다. 사찰과정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사이의 첫 번째 대립은 이 추가의정서 서명 여부를 두고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추가의정서의 맹점
2005년 9월28일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워싱턴 평화연구소에서 열린 현안 설명회에서 “북한은 자진해서 HEU 프로그램을 공개하고 핵사찰에 협조하라”고 강조한 바 있다. 기존에 IAEA에 신고하지 않은 핵시설을 포함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성실히 자진 공개하는 초기 신고보고서를 북한이 작성할 경우 검증의 신뢰도를 크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이 이에 순순히 응할지는 미지수다. 앞으로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두 번째 대립점이다.
이러한 쟁점을 거쳐 북한이 추가의정서에 서명하고 초기 신고보고서를 성실히 작성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검증에 ‘완벽’을 기하려면 그 정도로는 안 된다는 게 국제사회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선 추가의정서는 핵물질이나 핵연료주기 관련시설에 대해서만 사찰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 실험장으로 사용할 부지를 이미 마련해 준비해왔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실제로 핵실험이 이뤄지기 직전까지는 이 부지에 핵물질을 반입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북한이 추가의정서에 서명한다고 해도 핵 실험장 부지에 대한 사찰은 허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른바 추가의정서의 맹점이다. 지난 11월 열린 카네기 핵비확산회의에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도 이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이 제출한 초기 신고보고서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확인될 경우도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IAEA는 그 해명을 위해 북한측 관련인력에 대해 인터뷰나 서류 제출 등을 요구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확보하는 정보가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추가의정서는 이 두 가지 중요 사항을 강제로 집행할 의무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북한이 추가의정서에 서명한다고 해도 개별 인터뷰 및 자료제출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련인력’이란 핵 프로그램 연구진뿐만 아니라 행정원, 군인 등 관련된 모든 인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핵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검증하려면, 핵실험 부지에 대한 사찰과 함께 관련인력에 대한 자유로운 개별 인터뷰 및 관련자료에 대한 무제한적인 접근이 추가로 필요하다. 미국을 필두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한이 이 수준까지 사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북한이 이를 쉽게 수락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세 번째 대립점인 셈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부분에서 한국이 북핵 사찰검증과정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는 점이다. 북한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측 인력은 IAEA나 타국의 핵 사찰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북한측 관련인력을 비교적 거부감 없이 인터뷰할 수 있고 번역을 거치지 않아도 관련자료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사찰검증 과정을 두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빚어질 다양한 대립점은 추후 또 다른 핵 위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는 2006년의 북핵 논의를 낙관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검증요구는 최소화하고 북한의 협조는 최대화할 수 있는 정치외교적 노력과 함께 치밀한 기술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북핵 검증기구의 구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6자회담 실무회의에서 여러 가지 방안이 논의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축적된 핵사찰 경험과 노하우를 고려해 IAEA가 주도하게 되겠지만, 핵무기 프로그램의 검증 및 폐기를 위해서는 실제로 핵무기를 건조·해체한 경험이 많은 미국과 러시아의 협조가 긴요하다. 중국과 일본이 어떠한 자격으로 사찰에 참가할 것인지는 또 다른 쟁점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들은 북한의 핵무기나 핵물질 등 민감한 분야의 검증과정에서 한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핵무장 의지에 대해 오랫동안 의혹을 품어온 국제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북핵 사찰과정에서 비핵무장 국가인 한국측 인력이 무기화와 관련된 핵심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려면 향후 6자회담 실무회의 등에서 한국 정부는 우리측 전문인력이 참여하면 완벽하게 검증할 수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 번역이나 통역이 필요 없는 자유로운 정보접근과 북한측 관련인력과의 문화적 공감대가 실제 검증과정에서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논리다. 이를 통해 한국 정부와 전문가들이 핵심 사찰작업에 깊이 관여한다면 실제 검증과정에서 불거져 나올 북-미간 대립을 상당부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고비, 핵시설 폐기
사찰을 통해 검증이 끝나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도 6자회담 실무회의를 통해 논의가 진행될 텐데, 여기에도 검증 절차 못지않은 난항이 예상된다. 폐기는 검증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검증단계에서는 우라늄 프로그램과 핵무기 프로그램이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비해 훨씬 어렵고 까다롭다. 반면 폐기단계에서는 플로토늄 프로그램이 훨씬 더 복잡하다. 핵물질에서 나오는 방사능 때문이다.
우라늄 프로그램의 우라늄 농축시설, 우라늄 전환시설, 이미 생산된 HEU는 방사능이 극히 미약하고, 핵무기 프로그램의 핵무기 제조시설, 생산된 핵무기 또한 방사능이 약하다. 따라서 해체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이 그다지 크지 않고 비용도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북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원심분리기 등 우라늄 농축 관련장비와 우라늄 전환시설 관련장비를 파괴한 뒤 북한 국외로 반출하면 된다. 이미 생산된 HEU가 있다면 미국이나 러시아 등 핵무기 보유국으로 반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우라늄 농축 및 우라늄 전환 관련자료는 분쇄하거나 소각해 북한 국외로 반출하고, 관련 연구인력은 직업전환을 통해 다른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핵무기 프로그램의 실체가 확인되는 경우에는 핵무기 제조시설 및 핵실험 관련장비를 파괴한 뒤 국외로 반출하는 등 거의 동일한 절차를 거치면 된다.
플루토늄 프로그램 폐기도 절차 자체는 우라늄 프로그램이나 핵무기의 폐기와 유사하다. 흑연로 및 재처리시설 관련장비를 파괴한 뒤 국외로 반출하고, 이미 추출한 플루토늄과 플루토늄이 들어 있는 폐연료봉은 미국이나 러시아 등 핵무기 보유국으로 반출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상황은 크게 다르다. 플루토늄 생산 및 추출 관련 핵심시설인 흑연로와 재처리시설 등은 관련장비가 고준위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폐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기술, 인력의 규모가 대단히 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국가간 이해관계도 엇갈릴 것이다.
아직 축배는 이르다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 및 추출 능력을 제거하고, 이미 추출된 플루토늄과 플루토늄이 포함된 폐연료봉을 수거하는 작업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한국과 북한은 환경오염을 우려해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해체한 후 남은 시설의 방사능 오염도를 줄이는 ‘제염작업’에 관심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해체 과정에 제염까지 고려하면 흑연로의 폐기비용은 비슷한 출력용량의 경수로에 비해 10배 이상에 달한다.
더구나 원자로가 아닌 재처리시설을 폐기하는 데 들어갈 비용까지 감안하면 플루토늄 프로그램 폐기 비용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까지 소요될 것이다. 미국과 한국 등 6자회담 참가국 사이에서 비용 문제를 두고 논란이 빚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방사능 오염을 염려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측이 이를 막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라고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반면 원자로 및 플루토늄 관련 시설의 해체와 제염에 경험 있는 인력이 풍부한 미국은 최소한 관련기술과 인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올 것이다. 폐기절차를 둘러싸고 빚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이다.
앞서 IAEA의 특별사찰이 마무리되는 데 최소 3~4년이 걸릴 것이라 언급한 바 있다. 방사능에 오염된 북한 핵시설을 폐기하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장기적인 계획이나 별도의 기구를 설치해야 하는 이유다. 동북아 외교무대의 핫이슈로 떠오를 북핵 사찰 및 폐기 관련 논의와 관련해, 북한과 미국 등 관련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해 위기로 비화하는 것을 예방하고 한국의 실질적 국익을 확보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외교안보 당국이 2005년의 성과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아직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