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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⑥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jookdang37@naver.com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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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3당의 통합과 분열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법정에 선 공산당원들.

이승만의 단독 자율정부 수립 주장이 크게 부각되자 수세에 몰린 좌익은 ‘뭉쳐야 산다’는 구호 아래 좌익 3당의 연합을 모색했다. 7월29일 북한에서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을 창립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자 남한에서도 좌익 합당운동이 가속화됐다. 여운형의 인민당이 8월2일 중앙정무위에서 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 문제를 거론하자 좌익 3당의 연합 문제가 정가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여운형은 “3당 합당은 민족 통일의 기초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이에 8월4일 박헌영은 조공 중앙위 총비서 자격으로 여운형에게 인민당·공산당·신민당의 합당 제의를 수락한다는 내용의 회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조선인민보에 실렸다. 8월13일 조공은 남조선에 수감 중인 이관술 김성숙 안기성 송언필 박낙종 등을 석방하라고 요구해 군정 당국과 또 한 차례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상호 이해가 날카롭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좌익 3당은 합당의 방법론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했다. 각 당 모두 합당파와 합당 반대파로 갈려 이전투구 양상을 보였다. 그 와중에 북조선은 박헌영을 지지했다.

9월4일 조공의 간부파, 인민당의 48인파, 신민당의 합당 추진파는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합당 반대파가 별도로 사회노동당을 창설함으로써 좌익 내부의 분열은 한층 심화됐다.



미 군정은 공산당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펴 조선인민보 등 3개 신문을 정간 처분하고, 박헌영 이강국 이주하 등 조공 지도부에 대한 검거령을 발동했다. 여기에는 친(親)군정파인 우익의 입김도 작용했다.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일으켰다. 체포령이 떨어진 지 3주 후 남한 전 지역에 파업과 폭동이 일어났다. 박헌영은 도피 상태에서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을 배후조종해 남한 전역을 혼란과 무질서, 공포로 이끌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1월23일부터 양일간 3당 합당을 기반으로 남조선노동당(남노당) 결성대회를 열었다.

남노당의 노선에 대해 허헌은 “근로대중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호한다”고 천명했고, 박헌영을 지지한 이승균은 “근로대중을 투쟁대열로 영도한다”고 했다. 또 인민당의 김오성은 “남로당은 근로인민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후 남노당은 우익과 미 군정에 맞서면서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등을 일으켜 남한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한편 소련 군정은 1945년 12월17일 김일성을 조공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로 임명했다. 다음해 1월5일 반소·반공을 주장한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감금한 뒤 2월8일 실질적 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 33세의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을 위원장에 선출했다. 그러므로 남한에서 이승만이 먼저 단독정부 수립을 기도해 한국을 분단국가로 몰아갔다는 좌파의 주장은 궤변이다.

과도정부에서 배제된 김구와 이승만

김일성은 3월5일엔 토지개혁법을, 3월23일엔 정강정책, 남녀평등법, 산업국유화법을 잇따라 공표하면서 ‘국정’을 수행했다. 북조선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꾼 김일성은 당·정·군을 장악하고 파업, 파괴, 살상, 납치 등 남한 교란을 책동했다. 1947년 2월17일 ‘북조선인민회의’가 출범했다.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게양됨으로써 남북은 완전히 분단됐다.

북한이 정적(政敵)을 살육, 숙청하면서 독재체제를 굳히는 동안 남한에서는 좌익이 우익을 매수하거나 동조세력으로 끌어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광복 후 남한에서 결성된 정당 중에는 혼란을 배제하고 민주주의 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우국적인 관점에서 좌우합작을 지향하는 중도파가 많았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우익이 극심하게 대립하면서 중도파의 존재 의의가 크게 약화됐다.

혼란이 가중되던 1946년 10월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 우익인사 5명과 중도 좌익 5명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토지개혁 실시와 입법의원 구성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좌우합작 7개 원칙을 발표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는 민족의 통합이라는 원대한 꿈을 성취하기 위한 대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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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jookdang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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