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협의단체 선정 놓고 입씨름만 하다 끝난 미소공동위원회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입력2006-02-16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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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 구성과 신탁통치를 구상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이행하기 위해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좌우익의 힘 겨루기 장이었다. 두 열강은 진정한 통일방안을 고민하기보다는 자국에 우호적인 세력 확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서로 자국에 유리한 사회단체를 많이 확보하기 위한 지루한 공방 속에 위원회는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협의단체 선정 놓고 입씨름만 하다 끝난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2회에 걸쳐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양국 대표들. 앞줄 왼쪽 4번째가 미 대표 하지 중장이고, 다음이 소련 대표 스티코프 중장이다.

    한국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하 ‘모스크바결정’)은 남북한에서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남한의 우익은 “신탁통치 주창자는 소련이고, 모스크바결정을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는 소련의 앞잡이이자 매국노이며, 반탁운동은 즉시독립을 위한 애국운동”이라고 선전하며 반탁운동을 반소반공운동으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반소여론을 조성하고 남한에서 우익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반탁운동을 방조했다. 반탁운동을 거치며 남한에서는 ‘반탁=반소, 친소=찬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좌우가 본격적으로 대립했다.

    북한의 정치지형도 좌우합작에서 우익타도 방향으로 빠르게 선회했다.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소군정은 모스크바결정에 찬성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사소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북한의 좌익은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하는 것은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모략적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이 결정을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들을 망라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의 좌익은 연소용공(聯蘇容共)을 표방해온 민주당과의 합작을 포기했다. 1946년 1월5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공산당은 조만식의 위원장직 사임을 전격 수리했다. 조만식은 이 날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2월5일 소집된 민주당 열성자협의회도 조만식과의 분리를 공식 선언했다.

    이처럼 남북한에서 좌우대립이 격렬해지는 상황에서 모스크바결정 4항에 따라 1946년 1월16일부터 2월5일까지 미소양군사령부대표회의(이하 ‘대표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대표회의는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으로 초래된 행정·경제 영역에서 남북분단 상태를 조정할 목적으로 소집되어, 모스크바결정 실천을 위한 미소의 협조 가능성을 시험하는 최초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행정·경제의 ‘상설적 조정’에 대한 양측의 접근방식 차이만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한국 문제의 해결 전망은 어두워졌다.

    소련측은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위를 소집하는 문제와 행정·경제 영역에서 남북한에 관련된 긴급한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대표회의를 소집하는 문제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안건으로 간주했다. 즉 임시정부 수립 문제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며’ 미소 양군 사령관을 수반으로 하는 통일적 행정기관 수립 문제도 양국 정부의 소관사항이므로 대표회의에서 논의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에 중앙집권적 관리기구 설치 제안

    소련측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석탄과 전력을 공급하거나 남한에서 북한으로 양곡과 공업원료를 공급하는 문제와 같이 남북한에 관련된 긴급한 행정·경제 문제만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대표회의의 성격을 이 문제들에 대해 심의하고 결정을 채택하는 것으로 기능이 종료되는 일회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향후 행정·경제에 대한 상설적인 조정을 위해 필요할 경우 대표회의를 별도로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대표회의를 통해 남북한간 자유왕래를 제한하는 모든 장애를 신속히 철폐하고 단일한 행정·경제 단위로 정상적인 관리체계를 확립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미군정장관 아널드는 30일 이내에 행정·경제 영역에서 분단 상태를 완전히 극복하고 ‘전 한국의 통일원칙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널드는 행정·경제의 통일 방안을 준비하는 것은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며 모스크바결정을 이행하는 하나의 단계라고 간주했다.

    미국측은 남북한 경제의 통합 방안으로 한국의 수도 서울에 중앙집중적인 관리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 기구의 통제 아래 단일한 재정금융, 전력공급, 우편, 전신전화, 라디오방송, 교통운수 체계를 복구하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앙기구의 관리 책임을 한국인에게 위임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향후 조정을 위해 남북한 전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권한을 갖는 전문가들로 연락그룹을 조직하여 교환할 것도 요구했다.

    행정·경제의 상설적 조정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지만, 미소 양측은 협의를 계속해 남북한간 철도·자동차 운수, 주민통행, 우편교환, 라디오방송 주파수 배분 등의 문제에 대해 일련의 결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행정경제의 상설적 조정에 갖는 의미는 보잘것없었다. 미군정이 추구한 행정·경제의 통일과 소군정이 요구한 교역은 양측의 상이한 접근방식 때문에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소련측은 남북한간 교역은 미소 양군사령부의 상호납입 형태로 전개되어야 하며, 상품납입액이 동등한 금액이어야 하고, 남한 납입상품의 3분의 2는 반드시 식량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측은 정상적인 교역을 항구적으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38선을 철폐하고, 주민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할 것을 주장했다. 협의과정에서 미국측은 상호납입에 의한 교역 방식을 받아들였지만 남북한간 교역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소련측, 반탁운동 비난

    대표회의는 미소 양측이 행정·경제의 상설적 조정을 규정한 모스크바결정의 실천에서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은 미소 양측이 임시정부 수립을 규정한 모스크바결정의 실천에 대해서도 상이한 접근방식을 보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미소 양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을 경우 미소공위도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고 결렬될 수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소군정은 대표회의에서 수세적 태도를 보였지만, 소련 정부는 이미 미군정과 반탁 진영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1월25일 타스통신은 신탁통치 제안자가 미국이며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단축한 것이 소련이었음을 공개하여 미국측에 타격을 가했다. 소련 외무성은 신탁통치가 한국의 민주적 자치 발전과 독립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이며, 김구와 이승만 등 ‘반동분자’의 반탁운동은 정부수립에서 좌익을 배제하고 민주독립국가 수립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1946년 3월20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공위 회담이 시작되었다. 소련측은 미소공위 사업을 모스크바결정 2항을 실행하는 제1단계와 모스크바결정 3항을 실행하는 제2단계로 나누어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한국 임시정부의 조직 문제를 심의하게 될 제1단계 사업을 통해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할 조건과 절차, 임시정부와 지방정권기관의 구성 및 조직원칙에 대한 권고안, 임시정부의 정강정책과 각료명단 등을 준비하고자 했다.

    소련측은 미소공위의 임무를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경제통일 문제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자 했다. 또 임시정부 각료직을 남북한에 공평히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측 구상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미소공위의 지도 아래 입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고, 일제 잔재 숙청,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등 광범위한 반제반봉건 개혁을 실시해야 했다. 소련측은 또 미소공위가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와는 협의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미국측은 전혀 다른 접근방식을 취했다. 미국대표단은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기 위한 중간기구로 협의위원회 조직을 제안했다. 협의위원회는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을 토대로 북한의 정당들을 보충해서 조직할 것으로 예정되었는데 남한의 좌익정당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협의위원회는 임시법규와 임시정부 각료명단을 작성하는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고, 미소공위는 협의위원회의 제안을 승인하고 자국 정부의 비준에 맡기는 권한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미국측은 남북한 경제와 행정기구의 신속한 통일도 주장했다.

    소련측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미소공위 사업절차와 협의조건에 대한 제안을 제출했다. 미국측은 미소공위 사업절차에 대한 제안은 접수했지만 협의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측, “반탁은 정당한 행동”

    미소공위는 이 문제로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다. 소련측은 미소공위가 모스크바결정을 실행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므로 이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측은 이러한 요구가 ‘미국적 민주주의 개념’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결정에 언급되거나 암시된 일조차 없으며 신탁통치 반대는 한국인들의 정당한 행동이라고 반박했다.

    소련측은 지금까지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했더라도 앞으로 이 결정을 지지하겠다고 밝히는 정당사회단체와는 협의할 수 있다고 수정제안했다. 미소 양측은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하겠다는 5호 성명을 채택하고 협의단체 명부작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미소공위의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소련측은 다시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결정과 동맹국 중 어느 한 나라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대표를 협의에 참가시켜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4월25일 소련대표단은 5호 성명의 선언에 대한 서명이 첨부된 북한의 정당사회단체 명부를 제출했지만, 미국대표단은 남한의 정당사회단체 명부만 제출하고 서명은 첨부하지 않았다. 소련측은 30일까지 서명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27일 좌익단체들은 서명제출을 완료했다. 그러나 우익단체들은 5월1일 민주의원의 결정이 채택된 뒤 비로소 서명 명부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민주의원은 선언에 서명하는 것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위에 협력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신탁통치에 반대할 수 있다’고 성명했다.

    소련측은 민주의원의 결정이 5호 성명과 모스크바결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민주의원에 가입한 단체와 협의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미국측은 소련측의 요구가 ‘의사표시의 자유원칙’에 위배된다고 반박하고, 임시정부 수립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고 경제통일과 38선 철폐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제안을 소련측이 거부하면 미소공위 사업을 중지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5월8일 미소공위는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여운형, 소련에 좌우합작 요구

    소련대표단장 스티코프는 미국측이 ‘한국인이 반대하면 신탁통치는 실시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전하며 남한 우익의 반탁운동을 고무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미국측의 이러한 행동에는 우익을 진정한 애국자로 소개함으로써 우익의 신망을 높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고 봤다. 또 한국인에게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국가로, 소련은 신탁통치를 강요하는 국가로 비치게 함으로써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는 좌익을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고 판단했다.

    스티코프는 미국측에 모스크바결정을 정확히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하고만 협의할 것을 요구하고, 정당사회단체로 하여금 이 결정에 지지한다는 선언에 서명하도록 ‘조건을 제기하는’ 전술로 좌익에 유리한 조건이 조성되면 좌익이 다수를 점하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울러 반탁세력을 정부에 끌어들여 우익이 다수를 점하는 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측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올린 보고에서 미소공위 결렬 책임이 미국측에 있기 때문에 소련측이 공위 재개(再開)에 적극성을 보여서는 안 되며, 협의조건에 대해서도 종전의 방침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6년 9월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한 시점에 소군정은 미소공위를 신속히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소공위 재개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을 미국측에 대한 양보로 간주한 소련측이 공위 재개를 고려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소련측의 정책전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소공위 결렬 이후 조성된 남한의 좌익운동 정세(情勢)에 주목해야 한다.

    좌익정당을 통합하여 좌익진영을 강화하는 정책은 북한에서는 비교적 쉽게 진척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여운형·백남운·강진 등의 반발로 무수한 갈등을 빚으며 좌익진영의 분열로 귀결되었다. 여운형은 특히 좌익정당의 합당(合黨)에 강하게 반발하며 좌우합작과 좌익의 입법의원 참여를 주장하고 나섰다. 소군정은 좌우가 합작하고 좌익이 입법의원에 참여하면 미군정의 지위가 강화될 것이라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미소공위를 신속히 재개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군정은 여운형을 소군정 주위에 묶어두기 위해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9월25일 방북한 여운형은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장 로마넨코와 회담하고 3당합당, 좌우합작, 입법의원 참여, 미소공위 재개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좌익정당의 합당에 반대하고 있어 합당이 이루어지면 로동당은 불법화될 것이기 때문에 합당을 추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좌우합작을 추진하여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와 모스크바결정의 정확한 실천을 요구하고, 입법의원에 참여해서 우익과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미소공위가 신속히 재개되면 ‘다른 정책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 김규식·여운형 노선에 반대

    로마넨코는 여운형에게 미소공위 결렬 책임이 미국측에 있다고 지적하고, 소련측은 ‘반동분자들을 배제하고 정부를 수립한다’는 조건이 충족되면 언제라도 공위를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은 한국을 소비에트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38선은 폐지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협의단체 선정 놓고 입씨름만 하다 끝난 미소공동위원회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와 인사하는 여운형(오른쪽).

    로마넨코는 미군정이 입법의원을 조직하는 것은 한국민의 관심을 임시정부 수립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좌익은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를 요구해야지 입법의원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회담에서 로마넨코는 미군정의 지위를 강화할 좌우합작과 좌익의 입법의원 참여에 반대하고 좌익정당의 통합을 성사시켜 좌익진영을 강화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로마넨코는 여운형을 소군정 주위에 묶어두기 위해 소련이 그를 신뢰하고 있으며 소련군은 해방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를 약속했다. 미군정의 지위를 강화할 좌우합작에 따른 입법의원 창설 기도를 저지하고 좌익진영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미소공위 재개 방침이 등장한 것이다.

    소군정은 미소공위 재개를 공론화하고 미국측 의견을 타진하기 위해 10월 초 미국 대표 번스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번스도 소군정과 마찬가지로 미소공위 재개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미소공위 재개를 위해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과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서한을 준비하지고 제안했다. 그러나 양측이 미소공위 재개에 합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견해 차이가 여전히 컸기 때문이다. 이는 번스가 김일성과 나눈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 조건으로 반탁세력을 용인하되, 이승만·김구·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좌우 양극단이 아니라 김규식과 여운형으로 대표되는 중도 좌우파를 내세워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김일성은 반탁세력을 배제하고 박헌영이 대표하는 좌익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를 요구했다.

    번스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미소공위 재개 교섭의 물꼬가 트였지만 이후 미소공위가 재개되기까지는 8개월에 가까운 시일이 걸렸다. 미소공위 재개 교섭 자체가 지체에 지체를 거듭한 것이다. 미소 양측이 타협한 협의조건도 이전보다 한층 복잡해졌다.

    1946년 11월26일 치스차코프가 제안한 협의조건에는 “①모스크바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할 것 ②협의에 참가하는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결정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대표들을 선정하지 말 것”이라는 종전의 방침 외에 “③협의에 참가하는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결정과 미소공위 사업을 반대하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도록 선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런 정당사회단체는 양국 대표단의 협정에 따라 협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새로운 조건이 추가되었다.

    소련측, “좌익이 과반수 넘어야”

    12월24일 하지 사령관은 소련측 제안을 아래와 같이 해석하여 미소공위를 재개하기 위한 신호로 받아들였다. ①선언에 서명한 것을 모스크바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호의적 의향으로 간주하여 선언에 서명한 정당단체에 협의할 권리를 준다. ②정당단체는 자신의 의견을 가장 잘 제기할 대표를 선정할 권리를 가진다. 이 대표가 모스크바결정 실행에서나 동맹국 중 어느 한 나라와의 관계에서 충돌을 일으키면 양국 대표단이 협의하여 다른 대표를 선정하도록 요구한다. ③정당단체가 모스크바결정 실행과 미소공위 사업 및 동맹국 중 어느 한 나라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행동을 고무·선동할 경우 양국 대표단이 협의하여 제외한다.

    소련측은 2개월간 검토한 후 1947년 2월28일 하지의 해석을 받아들여 미소공위 재개조건에 합의했다. 그러나 치스차코프가 내세운 조건과 하지의 해석 사이에는 강조점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 저변에는 상이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소련측은 이전의 주장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하여 끊임없이 반탁세력을 미소공위 협의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보인 반면, 미국측은 선언에 서명한 정당단체를 가능한 한 전부 협의에 참가시킴으로써 반탁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다.

    1947년 5월21일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소련측은 제2차 미소공위의 목표를 1947년 7~8월로 예정된 한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권고안을 작성하는 데 두었다. 소련측은 외관상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전보다 훨씬 복잡한 협의조건을 내세워 반탁세력을 끝까지 배제하려 했다.

    소련측은 임시정부 조직원칙으로 단원제(單院制) 의회와 의회 앞에 책임지는 정부로 구성되는 민주공화국을 설계했다. 이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내각의 형태로 조직하고, 각료직은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에게 공평히 분배하되 남한에서 추천된 각료 구성에서 좌익이 과반수를 넘어야 했다.

    소련측은 제2차 미소공위를 최종 회담으로 간주하고, 임시정부 구성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이 문제를 한국인에게 맡기고 외국군대는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미국측도 제2차 미소공위를 최종 회담으로 간주하고 소련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한국 문제를 미·영·소·중 4대국의 협의나 유엔으로 이관한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국측은 협의대상 정당사회단체의 선정과 협의 방식에서 되도록 여러 우익 단체를 참여시켜 우익의 수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광범위한 협의’ 원칙을 채택했다.

    임시정부 수립방안에 대해서는 ▲남북한 자유 총선거 ▲남북한 입법기구 통합 ▲미소공위에 의한 임시정부 구성이라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회담 진행을 지켜보며 유리한 방안을 선택한다는 구상이었다. 임시정부의 형태는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정부와 크게 달라서는 안 되며, 대통령 또는 총리로는 우파의 중간파 인사를 임명할 계획이었다.

    협의대상 단체 명부 놓고 논쟁

    미소 양측은 6월11일 협의 참가를 희망하는 단체들로 하여금 5호 성명에 대한 서명과 임시법규 정부 정강에 관한 답신서를 첨부한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의 공동성명 11호에 합의했다.

    6월 하순 신청서 접수가 끝나는 시점까지 미소공위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미소공위는 6월말과 7월초 서울과 평양에서 협의 신청 단체들과 회합을 갖고 협의 절차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다. 그러나 7월초 협의대상 명부 작성 문제를 논의하는 단계에 들어서자 난항을 거듭했다.

    미소 양측은 7월 한 달 내내 협의단체 명부 작성에 매달렸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소련측은 비(非)사회단체와 협소한 지방단체를 배제하고, 회원수와 그 존재가 분명하지 않은 단체들에 대해 조사하며, 반탁투쟁위원회(이하 ‘반탁투위’) 소속 단체를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모스크바결정에는 사회단체라는 용어에 아무런 해석도 없고, 지방단체의 참가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정이 없으며, 반탁투위가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반박했다.

    7월10일 소련측은 1만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단체들로 명부를 작성할 것과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는 탈퇴는 물론 모스크바결정과 미소공위에 반대하는 행동을 중지한 후에 협의에 참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국측은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이 6월19일 5호 성명에 서명한 이후 사실상 ‘비존재적 단체’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소련측은 성명에 서명했다고 해서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이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고 미소공위에 협력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소련측은 1만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서 미소 양측이 의심하지 않는 단체의 명부를 미국측에 제출했다. 이 명부에는 남한 118, 북한 28 해서 모두 146개 단체가 포함되었는데, 소련측은 남한의 118 단체를 우익 74, 좌익 34, 중간 10으로 분류하고, 이 명부가 ‘전한국의 정치적 사조와 사회생활의 각계각층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측은 이 명부를 우익 44, 중우 18, 중간 9, 중좌 6, 민전 41로 분류하고, 반탁투위에 가입한 1500만 이상의 회원을 가진 24개 단체가 명부에서 제외되어 좌익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련측 명부를 거부했다.

    “반탁단체 배제하라”

    7월24일 소련측은 협의단체 명부를 확정하여 구두협의를 개시하자고 제의하고,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에 대해서는 종전의 주장을 반복했다. 25일 미국측은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과 비사회단체를 포함한 협의대상 명부를 작성할 것을 주장했다.

    31일 미국측은 반탁투위가 미소공위 사업을 반대한 일도, 반탁데모를 주동한 일도 없다는 내용의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의 서한을 소련측에 전달했다. 8월5일 소련측은 서한에 서명한 단체들을 초청해 서한을 검토하는 데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해답을 듣자고 요구했다.

    소련측은 한국 국민 앞에 반탁투위 및 우익진영과 미군정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조건을 달았다. 미소공위는 1946년 5월 협의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7월말 이미 소련대표단장 스티코프는 정부수립을 한국인에게 맡기고 미소 양군이 철수하는 내용의 ‘최후의 종국적인 성명’을 고려했다. 미소공위 결렬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을 한국인에게 맡길 경우 반탁세력의 참여를 배제할 수 없고, 좌익보다 노련한 정치가가 많은 우익이 정부수립을 주도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

    불발된 남북한 총선 구상

    스티코프는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것이 소련측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이 성명에 서명한 후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했다는 증거자료가 적어 지난해처럼 이 문제로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미소공위 결렬은 남한 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켜 좌익에 커다란 타격이 될 것도 명확했다. 우익과 미군정은 선거를 통해 정권기관을 구성하고 부분적인 개혁조치를 실시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현실화해 그들의 지위를 강화할 것이 분명했다.

    소련측은 8월5일 협의단체 명부작성 문제를 수석대표와 제1분과위원회에 위임하고, 임시법규 정부정강 임시정부 구성 등에 대해서는 2, 3분과위원회가 즉각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미소공위를 결렬시키지 않고 협의를 계속하여 임시정부 조직원칙과 구성에 대한 미국의 관점을 폭로하고, 소련대표단의 체류기간을 연장해 좌익의 입지를 강화하며, 정부수립에 대한 소련측의 의지를 과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측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스티코프는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임시인민회의를 수립하거나 남북한 총선거로 헌법제정회의를 수립하는 두 가지 방안을 놓고 다시 고민했다.

    선거를 실시할 경우 미국대표들이 북한에 주재하게 되어 북한 우익의 활동이 고무될 것이고, 남한 우익이 북한에 대표파견을 요구할 것이며, 미국과 우익이 선거인단을 통한 다단계선거를 요구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과 난점’이 있었다. 결국 소련 정부의 훈령으로 임시인민회의 수립 제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협의단체 선정 놓고 입씨름만 하다 끝난 미소공동위원회
    田鉉秀
    ●1960년 출생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국사학),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 박사(역사학)
    ●국무총리실 한민족연구발전 위원회 전문위원, 외교통상부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전담심사반 민간위원 역임
    ●現 경북대 사학과 교수 (한국현대사, 북한현대사 전공)
    ●저서 : ‘소련군정 시기 북한의 사회경제개혁’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공저) ‘북한현대사’(공저) ‘쉬띄꼬프 일기’(역서)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남북분단이 고착될 위기에 직면해 스티코프는 남북한총선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했지만, 소련대표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레베제프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남북한 총선 구상은 소련대표들의 반대로 소련 정부에 제안조차 되지 않았다. 소련 정부가 이 구상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소련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장해줄 북한의 ‘민주기지’를 미국과 남한의 우익에 개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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