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이제는 그야말로 ‘야구인생’을 살고 있다. 대학교수의 꿈을 접고 야구를 택한 것도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모교 법대학장님이 내게 “왜 대학 강의를 그만두면서까지 야구해설을 하려고 하냐”며 애를 태우시던 기억이 새롭다. 어린 시절엔 하얀 유니폼과 하얀 공이 그리는 포물선을 보면서 막연한 동경을 느꼈고, 선수가 되어서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정직함, 그리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펼쳐지는 정정당당한 승부에 매료됐다.
수십년을 야구와 함께했지만 아직도 중계방송을 할 때마다 ‘야구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수많은 중계방송 중 단 한 차례도 만족스러운 방송을 해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중계방송에 퍼펙트란 없다’는 이야기는 방송을 시작할 때부터 들었는데, 나 또한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아직 국내 프로야구에서 투수의 퍼펙트게임(점수, 안타, 출루를 한 명도 내주지 않은 경기) 기록이 없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야구 해설을 제대로 하려면 풍부한 배경지식, 선수에 대한 정확한 정보, 경험, 순발력, 적합한 표현, 캐스터와의 호흡 등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한다. 금방 벌어진 상황에 대해, 짧은 순간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한 개연성을 두고 설명하느냐가 야구 해설의 요체이다. 모든 상황에서 감독, 코치, 선수의 의도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부터 방송 해설을 하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야구를 시작한 이후 43년간을 헤아려보면서 내가 가장 기분이 좋았던 때는 2006년 3월이다. 드디어 한국야구가 미국, 일본 야구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는 방송 내용의 만족도와는 상관없이 가슴 뿌듯한 때로 기억된다.
세계 최강의 미국 대표팀을 꺾은 날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호텔 로비에서 자정이 넘어 만난 미국팀의 벅 마르티네스 감독은 “한국이 그렇게 야구를 잘하는 줄 몰랐다. 깜짝 놀랐다. 미국의 완패였다. 특히 한국 수비는 완벽했다”고 털어놨다.
그날 아침 경기 전 “미스터 허, 내일 아침에 커피나 함께하자”던 여유는 오간 데 없는 표정을 봤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본팀 오 사다하루 감독 역시 우리가 미국을 꺾은 다음날 아침 로비에서 “아시아를 대표해 꼭 우승하기 바란다”는 덕담을 남긴 채 쓸쓸히 샌디에이고로 먼저 출발했으니….
결국 이상한 대진 방식과 주최측의 횡포로 일본을 두 차례나 이기고도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지난 3월 캘리포니아의 밤은 다시 떠올려보아도 통쾌하기 그지없다.
물론 단기전 승부에서 미국, 일본을 이겼다고 해서 우리 야구가 그들보다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도 그들이 완패를 자인한 것은 세계 야구계에 우리 야구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