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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 허구연 / 일러스트·박진영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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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984년 봄, 나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마련된 LA 다저스의 스프링 캠프 ‘베로비치 다저타운’에 피터 오말리 구단주의 초청을 받아 한국 야구인으론 처음으로 한 달가량 머물렀다. 그때 오말리 구단주는 “한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냐?” “아니, 한국에서도 프로야구를 한다고?” 하며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국내에서는 이미 프로야구 붐이 대단할 때였는데….

그로부터 22년 후 우리 드림팀이 미국 드림팀을 보기 좋게, 그것도 미국땅에서 보란 듯이 깼으니 “미국 야구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커다란 자긍심을 심어준 쾌거다. 우리가 한 장소에 이렇게 많이 모여 자발적으로 한마음이 되어 열광한 적은 일찍이 없다”던 재미교포들의 감격도 이해할 만하다.

물론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동렬의 호투,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의 극적인 3점 홈런 등을 엮어 숙적 일본을 꺾었을 때의 짜릿함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일본 선발은 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아니어서 양국간 ‘정면 승부’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한일 양국의 프로 선수들이 주축이 돼 올스타전 형식으로 붙었던 1991년의 제1회 한일 슈퍼게임의 추억도 스쳐 지나간다.

한국 프로야구가 10년차를 맞던 당시만 해도 우리는 명실상부 전 구단의 최고 선수들로 팀을 짰던 반면, 일본은 우리를 얕보듯 게임이 거듭될수록 1진급의 수를 줄이고 2진급을 주축으로 선발팀을 짜 거만을 떨었다. 그러니 그야말로 최고의 드림팀끼리 맞붙은 WBC대회에서 거머쥔 승리는 감동 그 자체였다.



WBC 7개월 후인 10월의 한국시리즈에선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가 명승부전을 벌여 팬들을 열광시켰고 또 한 번 야구의 매력을 발산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고,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야구가 지닌 가장 큰 매력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세 차례의 연장전 승부 끝에 삼성이 4승1무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수치상으로는 일방적인 우세 같지만, 실제는 게임마다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최종전인 6차전,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한화가 만든 9회말 1사 만루의 상황에서 보듯, 야구란 한순간에 역전, 반전이 가능한 스포츠다. 20여 년 전인 1984년, 당시 롯데의 유두열이 역전 3점 홈런으로 거함 삼성을 침몰시키던 장면을 기억하는 팬도 많을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에는 선동렬 감독이 있다. 감독 데뷔 후 2년 연속 우승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한 선 감독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이 실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선 감독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여느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희생이 있다. 감독들이 받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는 일반인이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야구계엔 프로야구 감독과 코치 자녀들 중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한 경우가 극히 적다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가 있다. 가족들이 받는 고충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프로야구 초기의 일화 한 토막. 입시생 아들이 방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간식을 주려고 방에 들어간 감독 부인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아버지 팀의 야구중계 방송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적이 부진하면 아버지가 내일 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공부가 제대로 되겠냐”는 게 당시 고3 아들의 항변이었다고 한다.

선동렬 감독은 추석 연휴기간 대구 숙소 주변 식당들이 문을 닫아 하루 세 끼 내내 라면을 직접 끓여 먹었다고 한다. “아니 부인은 뭐했나?”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고교 1년생인 장남이 골프선수 생활을 하고 있어 뒷바라지하느라 한시도 서울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다.

WBC 4강 사령탑으로 ‘국민감독’이란 호칭을 얻은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 감독은 뇌경색으로 한때 위험한 시기를 보냈다. 한국시리즈 이후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1년에 딱 보름 쉬었다. 그나마 3일 연속 붙여 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한 것을 보면 감독직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자리인지 짐작케 한다.

34세 때 지금은 없어진 청보 핀토스 구단의 감독을 맡았다가 능력 부족으로 1년 만에 쫓겨난(?) 필자는 그 후 몇 차례 감독직 제의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감독직에 더는 미련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는 해설가로서 야구계에 이바지하는 길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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