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월7일 오후 김 전 의원의 서초구 자택을 찾았다. 그는 몰라보게 수척했고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2004년 3월 아내의 죽음, 그 한 달 후 17대 국회의원 선거(서울 종로) 낙선. 지난 몇 년간 그에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정작 세월을 훔쳐간 ‘도둑’은 1년6개월 넘게 공을 들인 발해 소설이다. 그는 2005년 여름부터 대학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해 인터뷰 당일 새벽 3시쯤 13권, 200자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의 소설에 마침표를 찍었다. 제목은 ‘김홍신의 대발해’. 소설은 고구려가 망한 668년부터 시작해 발해가 망한 926년에 끝을 맺는다. 그는 발해 소설을 쓰기 위해 국회의원 시절부터 8년 이상을 매달렸다고 한다.
소설을 쓰면서 두문불출,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운동도 하지 않고 새벽까지 글쓰기를 하는 통에 오른팔에 마비증세가 왔다. 늘 웃는 낯이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볕을 못 쬐서 생긴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피부약을 바르고 있었다. 머리숱도 부쩍 줄어 있었다.
▼ 팔에 마비가 와 스테로이드 주사까지 맞았다면서 왜 수기(手記)를 고집하십니까.
“인호(소설가 최인호) 형과 약속한 게 있어요. 죽을 때까지 손으로 쓰자고. 서로 누가 먼저 배신하는지 지켜보고 있거든요, 하하.”
대제국 발해
▼ 발해와 관련된 유적, 유물, 기록이 드물어 취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랬습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정혜공주 비문과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가 고작입니다. 우리와 관점은 좀 다르지만 북한에서 나온 연구서적도 도움이 됐습니다.”
▼ 취재답사를 많이 다녔습니까.
“발해는 고구려보다 두 배 이상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습니다. 총연장 4300km에 사방 5000리(1리는 5.6km)에 달하는 대제국이었으니까요. 2005년과 2006년 여름 두 번을 다녀왔는데, 법륜스님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부터 항일운동 유적지까지 다 훑었습니다. 발해의 첫 수도이자 시조산인 동모산은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데 재수 좋게 올라갔다 왔어요. 정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광활한 곳이었습니다.”
▼ 발해 소설은 언제부터 구상했습니까.
“1986년 처음 중국을 갔을 때 그곳 재야 사학자로부터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뒤집으려 한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게 점점 사실이 되어가더라고요. 1998년 국회의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미 그때는 ‘동북공정’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어요.”
발해 유적지에서 온갖 수소문을 해 기와 파편과 유물조각 등을 어렵사리 구해 들여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