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상 장관을 대신하고 대통령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 지난 4년간 미군기지 재배치, 전략적 유연성, 전시작전통제권 등 주요 군사현안 협상의 미국측 책임자였던 그가 이제 동아시아전략 전체를 수립하는 위치에 올라선다. 1970년대부터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일하며 한국의 각계 인사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미국인이 됐다는 그의 ‘실력’. 과연 미국은 한국을 어떤 방식으로 파악하고, 상대하고, 관리하는가.
2006년 11월말, 국책 안보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미 국방부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담하는 국(局)을 신설하고 리처드 롤리스 현 아태(亞太)담당 부차관을 차관보급 책임자로 승진시키기로 내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질이 결정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이별 선물’이라는 것. 이 같은 내용은 12월초 ‘중앙일보’ 등을 통해 기사화됐다.
현재 한국 등 아태지역을 담당하는 펜타곤 내 부서는 전세계 모든 지역을 통괄하는 국제안보국(ISA·International Security Affairs) 산하다. 그러나 차관보를 수장으로 하는 ISA의 업무가 이라크전 등으로 크게 증가하자 아태지역 업무만을 담당하는 ‘아태안보국(Asian · Pacific Security Affairs)’으로 독립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펜타곤이 아태지역의 비중을 높게 보고 있음을 시사하는 조치지만, 더불어 롤리스 부차관의 승진이 갖는 함의도 만만치 않다. 럼스펠드 장관의 핵심측근으로 분류돼 동반퇴진 관측까지 불러일으켰던 그가, 로버트 게이츠 신임 장관 체제에서 오히려 더 막강한 위상을 갖게 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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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군사회의의 뒤풀이자리. 군복과 양복을 갖춰 입은 양국 국방부 관료들이 한 한국식 주점에 모였다. 주종(酒種)은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 자신만만했던 한국측 인사들은 롤리스 부차관의 계속되는 ‘원샷’ 제의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가 노래방 기계에서 고른 노래는 ‘눈물 젖은 두만강’. 이후에도 그는 1970~80년대 유행했던 한국 가요들을 그리 어색하지 않은 발음으로 연거푸 불러제쳤다. 밤늦도록 이어진 그의 ‘여흥문화’는 협상자리에서 보여준 차가운 태도와는 사뭇 달라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평범한 한국 관료가 영어를 하는 수준’으로 한국말을 이해한다는 롤리스 부차관은 업무차 한국에 오면 반드시 용산에 있는 한 고깃집에서 삼겹살과 소주를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술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은 정서를 과시하곤 한다는 것. 이렇게 보면 워싱턴의 유력 정보지 ‘넬슨리포트’가 2005년 6월 작성한 ‘주미한국대사관을 위한 특별보고서’에서 그를 ‘한국어에 능통한 대표적인 한국통’ 정도로 묘사한 것은 피상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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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31일 ‘미국 스파이 논란’이라는 묘한 제목을 단 기사들이 줄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 이날 오후 경인TV의 신현덕 공동대표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경인TV 최대주주인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미국에 한국관련 정보를 제공했다”며 여기에는 그릇된 정보를 미국에 제공해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낮추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주장한 것.
이후 신 대표는 백 회장이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문건을 신 대표에게 만들게 했으며, 자신은 그러한 문서를 서울 소공동에 있는 ‘유에스아시아그룹’ 한국사무실을 통해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사무실의 등기상 대표가 롤리스 부차관이라는 사실. 1987년 롤리스 부차관이 민간인이던 시절 설립한 유에스아시아는 대만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컨설팅 업무를 수행했고, 2002년 롤리스 부차관이 국방부 부차관에 임명된 후에도 한국사무소의 등기상 대표를 바꾸지 않고 유지해왔다.
2006년 11월9일 백악관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왼쪽) 퇴임과 로버트 게이츠 전 CIA 국장(오른쪽)의 후임지명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연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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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 한국의 외교안보 소식통들은 미국측 지인들로부터 야릇한 소문을 들었다. 이종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미국의 한미정상회담 제의를 수개월간 묵살했으며, 이 때문에 롤리스 부차관이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에게 “이종석을 교체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이야기였다. 5월18일 ‘내일신문’, 6월 발행된 ‘월간조선’ 등을 통해 기사화된 이 소식은 NSC측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월간조선’은 중재에 따라 반론·정정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후 확인된 청와대와 관련부처 관계자들의 증언에는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이종석 차장이 정상회담 제의를 뭉갰다’는 내용은 사실 여부를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2005년 2월말 롤리스 부차관이 용산기지 이전협상, 주한미군 감축 등의 사안을 두고 대립각을 세워온 이종석 차장의 경질을 정 장관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 “이 차장과 NSC가 한미간 합의한 내용에 대해 자꾸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며 정 장관에게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롤리스 부차관이 이 차장의 낙마를 유도하기 위해 ‘정상회담 제의 묵살설’을 유포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대두됐다(‘신동아’ 2005년 8월호 ‘미국, 이종석 낙마 유도 의혹’ 기사 참조).
가장 잘 알려진, 가장 덜 알려진
리처드 P 롤리스. 그의 이름을 한국언론재단의 기사검색 시스템 ‘KINDS’에서 찾아보면 1155건의 기사가 나온다. 이는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1141건)을 능가하는 숫자. 직급이나 업무범위로는 한국의 국장급 혹은 부국장급에 불과하지만,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장관급인 백악관 보좌관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업무를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에서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진 미국 관료 가운데 하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는 가장 덜 알려진 셈이다. 동아태 담당 차관보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지금 궁금증이 더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롤리스 부차관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이 정도 직급의 관료에게 관심을 기울일 리 만무한 미국 언론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특히 개인이력은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 국방부 홈페이지는 고위직 인사 80여 명의 이력을 공개하고 있지만 그의 경력기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기서도 빠져 있다. 국내외 언론을 통틀어 공개된 그의 개인정보는 1946년생으로 아내가 한국계라는 정도가 전부다.
그와 장시간 교분을 나눈 이들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하거나, 부인과 함께 식사자리에 나오거나, 사석에서 지갑에 넣어 갖고 다니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미국인 특유의 행동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모에서도 알 수 있듯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점, 간혹 휴가도 이탈리아로 가곤 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에 약간의 ‘귀속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라고 말했다.
사석에서의 대화에 따르면,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970년대 초반에 ‘평화봉사단(Peace Corp)’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2년가량 일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에서 근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평화봉사단 경력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평화봉사단이 대학재학 이상의 학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대학을 다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아는 이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국방부 차관보 인사발령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1972년에 미 중앙정보국(CIA)에 ‘입사’했다는 점이다. 그가 평화봉사단 활동을 마치고 CIA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평화봉사단원으로 가장한 CIA 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그는 1987년까지 CIA 요원으로 본부를 비롯해 일본과 한국, 유럽에서 근무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의 회고 등을 종합하면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화이트’ 요원으로 일했다. 한국지부장 같은 간부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수백차례 서울을 드나들며 활동한 명실상부한 한국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2006년 7월13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
그는 이 시절부터 많은 한국측 인사를 만나 의견을 청취해왔다. 들을 만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직접 접촉해 자리를 만드는 스타일이라는 것.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와 만난 한국 인사들은 그가 접촉한 다른 한국 인사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 정부에서 안보분야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의 이름도 흘러나오지만, 누구를 만나든 한 사람씩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는 개인신상에 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것과 함께 CIA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인 듯하다.
“사적으로 수집한 정보”
15년간 기업인으로 지낸 그는 2002년 10월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에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친동생인 제브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와의 오랜 친분이 작용했다는 게 워싱턴 내부의 정설. 유에스아시아 홈페이지의 주요고객 명단에는 한국·일본·대만의 기업들과 함께 플로리다 주정부가 올라와 있다. 1976년부터 2년간 CIA국장을 지낸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는 후문이지만 확인되진 않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개인적인 인연만으로 그의 펜타곤 입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한 전직 미 안보부처 관계자의 말이다.
“워싱턴의 직업관료들은 CIA 등 정보분야 출신이 자기 부서로 넘어오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웬만큼 탁월한 경력이나 실력이 입증되지 않으면 반발을 사기 십상이다. 즉 롤리스의 발탁은 단순히 백악관과의 인연뿐 아니라, 동북아에 대한 그의 전문성이 펜타곤 관료들도 인정할 만한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CIA에서 보여준 능력이 워낙 특출했다는 것이다.”
국방부에 들어간 초기만 해도 그의 입지는 그리 탄탄하지 못했다. 부차관보는 같이 일할 사람을 데리고 들어갈 만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평생을 국방부에서 보낸 직업관료들과 함께 일해야 했다는 것. 지금은 그와 ‘최고의 팀’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받는 마이클 피네건 국방부 한국과장 역시 그가 펜타곤에 입성하기 전부터 중령 계급으로 한국과에서 일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 그는 럼스펠드 장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부심하는 태도가 역력했다고 한다.
공직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많은 한국인사 혹은 미국 내 한국 전문가와 사석에서 만나 이야기를 듣는 그의 스타일은 여전했다. 꼭 한 사람과만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간혹 서울에서 만날 때면 유에스아시아 관계자가 동석하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롤리스 부차관이 최근까지 이 사무실이나 그 관계자들을 폭넓게 활용해왔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미 행정부 관계자들 역시 그가 CIA나 국방정보국(DIA) 등이 보고한 공식정보 외에도, 이렇듯 다양한 인물과 직접 접촉해 각종 정보나 의견을 사적으로 수집하고 활용해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와 몇 차례 만났다는 서울의 한 인사는 “대단히 샤프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두 번 설명할 필요가 없이 한마디만 하면 알아듣는다. 들을 만한 내용이 있으면 바로 기록하고 동석한 부하직원들에게 조사해보라고 지시할 정도다. 상대방의 의견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좋은 기억으로 남게 만드는 것 같았다”고 평했다.
롤리스 부차관이 국방부에 들어간 2002년 10월이라는 시점은 매우 민감한 시기였다. 한국에서는 여중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고로 인해 미국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고, 대선이 이어졌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주한미군 관련 논의가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라크 파병, 용산 등 주요 미군기지의 재배치, 주한미군의 감축, 전략적 유연성 문제, 전시작통권 이양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롤리스 부차관은 2003년 4월 첫 회의가 열린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 이를 이어받아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의 미국측 수석대표로서 이들 ‘초대형’ 이슈의 협상을 총괄 지휘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6자회담에도 국방부 대표자격으로 꾸준히 참석했다.
‘탁월한 능력’과 ‘성격상의 문제’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던 4년.’ 한미 군사문제를 다뤄온 미 행정부의 한 관리가 2003~06년을 평가하며 남긴 말이다. 피터 브룩스 현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등 전임자들은 전혀 다루지 않았던 미묘한 정치적 이슈들이 하나하나 일단락되는 동안, 롤리스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한다. 앞서의 전직 미 안보부처 관계자의 말이다.
“미 국방장관의 업무범위는 엄청나다. 특히 군 개혁과 이라크전에 몰두한 럼스펠드 장관에게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한국과 일본을 잘 아는 롤리스 부차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특히 롤리스 부차관은 럼스펠드 장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GPR(해외주둔군 재배치검토)이 동북아에서 성공적인 선례를 선보이는 큰 공을 세웠다. 그가 럼스펠드 장관이나 울포위츠 당시 부장관의 집무실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5년 무렵부터 미 국방부를 방문한 한국측 인사들은 럼스펠드 장관에게서 “한국 문제에 있어서는 롤리스가 사실상 책임자다. 이 사람하고 얘기하는 게 나하고 얘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협상장에서 거의 전적인 재량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한 한국측 참석자는 “상부의 허락 없이는 도저히 수용이 불가능할 것 같은 타결안을 즉석에서 ‘OK’해 놀랐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공식직함인 ‘부차관(Deputy Under Secretary)’은 미 행정부 내에서 잘 쓰이지 않는 직함이다. 임명 당시 ‘부차관보(Deputy Assistant Secretary)’였던 그는 2005년 5월 장관의 지시에 따라 이 직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직속상관이던 국제안보국 차관보(Assistant Secretary)의 지휘를 받지 않고 정책담당 차관(Under Secretary)에게 보고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한 가지 뒷이야기가 깔려 있다. 크리스토퍼 힐 당시 주한미대사가 차관보 발령을 받아 공석이 된 대사자리를 두고 롤리스 당시 부차관보가 의욕을 내비쳤다는 것. 국방부 내부와 백악관에 이러한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휘하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럼스펠드 장관이 이를 만류했고, 평소 그가 너무 앞서간다고 생각하던 백악관 NSC의 일부 인사들도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에 따라 끝내 좌절됐다. 럼스펠드 장관이 이를 위안하는 차원에서 업무범위나 부하직원에는 변화 없이 그를 ‘0.5단계’ 승진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워싱턴 인사들 사이에서는 그의 이러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성격상의 문제(character problem)’를 거론하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 ‘실세 장관의 신임을 믿고 너무 설쳤다’는 식이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된 전시작통권 이양 문제를 두고 국무부나 백악관 NSC와 적잖은 마찰을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비교적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들 부처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주무부처 책임자’의 권한으로 밀어붙였다는 것. 자기관리에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 미국 관료사회의 특성상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뒷말은 사뭇 심각한 것이라는 평가다.
‘성격의 문제’는 그와 협상을 진행해온 한국 정부 일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스타일이 너무 강압적이라는 평가다. FOTA 협상과정에 관여했던 한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이전에 만난 다른 미국 관료들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수위가 높은 발언이 잦아서 때로는 우리측을 ‘협박’한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한 정부 실무부처 관계자 역시 “웃으면서 협상을 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고 전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그의 협상 스타일에 대해 들을 수 있는 또 한 가지 평가는 ‘플레이’에 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언론에 정보를 흘리거나 생각을 전달함으로써 야당 등 보수여론을 자극하고, 이를 통해 한국측을 압박하는 방식의 전술을 구사하곤 한다는 것.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사건이 그가 2004년 6월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다.
이 무렵은 용산기지 이전과 관련해 얼마만큼의 기지를 남겨둘지를 두고 한국측과 심한 이견을 빚고 있던 때였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50년 동맹의 한미관계에서 30만평의 차이가 쟁점화돼 좌절을 느낀다”며 “우리는 최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 추가 배치 등 여러 좋은 구상과 계획을 갖고 있으나, 바람직한 재편이 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위협성 발언’이었다.
그의 이러한 ‘한국언론 접촉’에 대해 워싱턴 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계 특유의 다혈질 기질이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국측과의 협상이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자 ‘분을 삭이지 못하고’ 표출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던 인사들은 “개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실무적으로는 매우 냉철한(cool) 사람”이라며 이를 반박한다. 언론과의 접촉 역시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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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롤리스 부차관의 협상태도에 관해 같은 한국 정부 안에서도 청와대와 국방부 관계자들의 평가가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롤리스 부차관이 노무현 정부 이후 불거졌던 한국 정부 내의 이견과 마찰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왔음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한국측 사정을 면밀히 파악함으로써 이를 협상력으로 만드는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 한 전직 국방부 관료의 말을 들어보자.
“롤리스는 다른 미국인 관료들과 달리 협상팀이 처한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제는 비밀도 아니지만, 노무현 정부 초기 국방부와 청와대 사이에는 상당한 생각의 차이가 있었다. 그는 협상과정에서 협상팀이 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 협상팀이 청와대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음을 훤히 꿰고 있었다. 때로는 협상팀을 ‘보호’하려 한다는 느낌도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의 협상은, 이런 사정에 관심이 없는 다른 미국인과 마주할 때보다 훨씬 ‘솔직한 협상’이었다.”
롤리스 부차관은 협상팀 등 실무부처 관계자들과는 술자리 등을 통해 면밀한 스킨십을 쌓았지만, 청와대 인사들과는 이런 자리를 거의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지인들에게 이종석 당시 NSC 사무차장을 포함한 청와대 관계자들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털어놓곤 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지나치게 과격하다’거나 ‘너무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는 식이다.
그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이종석을 교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특히 협상과정이나 면담을 통해 들은 한국 정부의 입장과 추후 노 대통령의 공식발언 등에서 나타난 뜻이 다르다면서 ‘오히려 한국이 언론플레이를 한다’며 크게 화를 내곤 했다는 전언이다.
일련의 사정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한국을 좋아하는 미국 관료’와 ‘이름처럼 강압적이고 난폭한 무법자(lawless)’로 첨예하게 갈린다. 워싱턴 인사들을 포함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한국의 발전을 원하는 사람”이라거나 “장기적으로는 그의 존재가 동맹의 유지나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정치적 변화와 미국의 군사적 변화라는 양대 축 사이에서 쉽지 않은 조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뒤집어 얘기하면 이는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서 한미동맹이 위기에 처했다는 시각의 연장선에 서 있다.
반면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한 외교분야 전문가의 말이다.
“가장 탁월한 외교관은 협상 상대국에도 이익을 주기 위해 애쓰거나 최소한 그런 이미지를 남긴다. 물론 자국의 이익도 못 챙기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자국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느라 협상을 험하게 몰아가는 외교관은 그 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롤리스는 최고의 외교관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CIA 요원이었고 현재는 국방부 관료이지 외교관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이를 능란하게 활용하는 그의 존재는, 미국에는 행운이겠지만 한국에는 불행일 수 있다. 그런 이미지를 남겼다는 것이 그의 한계다.”
몇 차례 그의 자문에 응한 한 인사는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내가 한국언론에 기고한 글들을 번역해 꼼꼼히 읽고 나왔더라”고 전했다. 반면 그와 협상을 진행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그의 개인정보나 협상방식 등에 관해 사전에 정보기관으로부터 자료를 받아보거나 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정보기관에서 그런 내용을 묻거나 자료로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 가장 민감한 시기에 가장 효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가장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는 미국의 ‘위력’과,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한국의 수준을 곱씹게 하는 대목이다.
그의 시선은 대선을 향한다
향후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전망이 엇갈리지만, 1990년대 초반에 미국이 만든 ‘동아시아전략구상(EASI)’ 같은 문서를 만들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 핵 문제, 이에 얽힌 일본과 한국의 ‘관리’ 등 동아시아 판도변화에 대응하는 미국의 안보전략 수립에 나서리라는 것이다.
몇 차례 그의 자문에 응한 한 인사는 그를 두고 “자신의 직급 이상을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촌평했다. 공식적인 업무범위는 실무자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늘 한국의 정치나 북한의 미래 같은 큰 그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의견을 청취하며 ‘전략가’에 가까운 고민을 하더라는 말이다. 그가 만나는 대상에는 외교안보 전문가나 관계자뿐 아니라 한국의 여야 정치인까지 포함된다.
2006년 9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에서 그는 “2002년 한국 대선 당시 한미동맹에 큰 상처가 났고, 나 역시 개인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일국의 ‘실무자’가 공식석상에서 상대국의 대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2002년 여중생 사망사고 당시 미군 병사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선고공판이 대선 직전인 11월에 열린 것과 관련해, 워싱턴의 한국 담당자들이 이를 ‘조율의 실패’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국을 파악하고, 상대하며, 관리하는 미국의 손. 그의 눈은 지금 2007년 한국의 대선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