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벽두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최근 공개된 노무현 대통령의 8월 ‘노사모’ 발언록은 이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외교통상부나 미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한미가 합의한 성명에 ‘동북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된 주체가 한국군인지 주한미군인지를 두고 혼선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을 해석해보자. 핵심은 중간에 있는 대명사 ‘it’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즉 앞에 나오는 명사 가운데 ‘the U.S.’냐, 뒤의 ‘the ROK’냐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이 해석문은 it이 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앞의 영어 문장은 2006년 1월19일 미국 워싱턴에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참석해 열린 제1차 한미전략대화 공동성명의 2항. 성명은 관례에 따라 영어로 문안이 조정됐기 때문에 양국이 공동으로 인정한 한국어본은 따로 없다는 게 외교부의 설명이다. 뒤의 해석문은 외교부가 성명 발표 이후 배포한 참고자료를 옮긴 것이다.
이 공동성명 문안은 이른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만 등 동북아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이 이에 개입하면 한국은 사실상 그 발진기지 노릇을 하게 되리라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노무현 정부 내내 청와대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심각한 논란을 벌였다. 반면 해외주둔 미군의 기동성을 강화해 필요한 경우 어디든 투입하려는 미국 처지에서 전략적 유연성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양국은 이를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긴 시간에 걸쳐 줄다리기를 했고, 결국 1월 전략대화에서 문제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이 발표된 직후 이는 사실상 한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한 것이라는 해석이 절대적이었다. 다만 ‘(주한미군은 갈 수 있다 해도) 한국이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읽는 게 옳다는 설명이었다. 반기문 당시 장관 역시 2006년 9월1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같은 맥락으로 발언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표명했고 또 한미 간 상호 합의가 확실히 이뤄졌다고 본다. 우리 정부는 국민이 원치 않는 분쟁지역에 한국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대원칙하에 전략적 유연성에 동의했다”는 내용이다. ‘it’이 가리키는 것이 한국군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다음 글을 보자. 구어체 연설이어서 문법이 맞지 않아도 그대로 옮긴다.
“이름은 ‘전략성 유연성’으로 할 수 있지만 우리 한국에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현재 없습니다.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는 허용하지 않는데 일부 언론이나 일부 사람들은 제가 전략적 유연성을 허용한 것으로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경우에도 주한미군은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명문으로 합의하고 도장 찍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이 있다고 본 것이죠. 저는 우리의 실질적 합의는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움직이지 못한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맞지 않습니까?”
이 연설은 2006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들과 가진 행사에서 비공개로 행한 발언을 옮긴 것이다. 일부 회원이 몰래 녹취한 것이 최근 언론에 공개되어 소동을 빚은 이 발언을 보면, 노 대통령은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그간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인식을 갖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국은 이를 인정한 바가 없으며, 실질적으로 한국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살펴볼 것은 2006년 11월16일 외교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송민순 당시 청와대안보실장과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 사이에 오간 문답이다.
최 : 전략적 유연성을 이행함에 있어서 주한미군이 우리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한국군이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습니까? 주체가 누구입니까?
송 : 주한미군이지요.
최 : 주한미군이에요?
송 : 예. 한국군이 지역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 왜 미국하고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것을, 그런 합의를 왜 거치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상황은 명확해진다. 1월 전략대화 공동성명에 등장하는 ‘it’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을 두고 외교부나 반 전 장관의 설명과 대통령의 인식이나 송민순 현 장관 설명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대명사의 해석을 두고 당시 외교부 수장과 청와대안보실장의 해석이 다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본질을 따져보지 못한
문제는 이 ‘it’이 한국군이냐 주한미군이냐가 사실상 이 공동성명의 핵심이라는 데 있다. 한국군이라면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주한미군이라면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it’의 해석에 따라 성명의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지는 것이다.
벌써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지지만, 성명이 나온 직후 그간 정부가 전략적 유연성 문제의 위험성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가 쏟아지면서 청와대와 외교부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2월초에는 외교부가 상부의 허가 없이 이를 허용하는 문서화 작업을 미국측과 추진했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는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의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사태가 크게 번졌다. 문서를 여당의원에게 제공한 혐의로 외교부에 파견 중이던 청와대 행정관은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청와대의 발 빠른 대응과 징계처리로 관심이 ‘문서유출’에 집중되는 동안, 정작 ‘전략적 유연성 문제’ 자체는 논의 주제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후에도 이 문제를 둘러싼 정부 내부의 혼선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 내에서는 저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워싱턴의 입장은 한결같다는 사실. 미 국방부와 국무부 관계자들은 그동안 이 공동성명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꾸준히 밝혀왔다. 2006년 5월초 워싱턴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미 외교안보부처의 고위관계자는 “it은 분명히 한국군”이라며 선을 그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미국 당국자들의 견해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
외교성명에 등장하는 대명사의 해석을 두고 한국 정부 내부의 해석이 엇갈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정부 관계자는 비공식 멘트임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들려주었다.
“it이 한국군이냐 미군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인정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대만과 중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가 전제돼 있는데 사실상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을뿐더러,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는 세계대전이다. 한국이 그에 연루될 것을 염려한다 해도 it이 한국이라면 연루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이고, 주한미군이라면 아예 그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한국과 주한미군을 분리해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주체를 모호하게 놔둠으로써, 미국은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받았다고 해석하고 한국은 유사시에 이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외교적 압박이 심각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 아닌가. 정부로서는 미국의 압박을 피하면서 최소한의 안전도 담보할 수 있는 ‘전략적 모호성’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전부일까. 당시 정부 내부에서 관련논의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설명은 사뭇 다르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공동성명이 나오고 논란이 번진 3월 노 대통령은 새로 임명된 송민순 안보실장에게 공동성명이 규정하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장비와 기지’를 포함한 것인지 묻는다. 송 실장이 이에 대해 그렇게 알고 있다고 답하자 대통령이 진노했다는 것. 그간 그렇게 보고받은 적이 없으므로 다시 한번 확인해보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노 대통령이 ‘장비와 기지’를 거론한 것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그간 제기된 우려의 핵심이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허용할 경우 주한미군이 한반도 내에 있는 장비와 기지를 사용해 동북아 분쟁에 참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가 사실상 발진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개념이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간 진행된 한미간의 관련논의 기록을 검토한 안보실 참모들은 미국측이 한 번도 유연성을 장비나 기지 문제와 연동해 설명한 적이 없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1월의 공동성명을 들어 주한미군이 현재의 장비나 기지를 다른 지역 분쟁 개입에 이용하려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 송민순 당시 안보실장은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사실상 전략적 유연성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인식을 재확인한 듯하다.
누구를 위한 ‘모호성’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인식의 적실성이다. 만에 하나 주한미군이 다른 지역의 분쟁에 개입할 때 한국 내 미군기지에서 보유하고 있는 장비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매우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실제로 3월 안보실 참모들의 보고와는 달리 미국측이 전략적 유연성을 장비나 기지의 사용과 연동해 설명했다는 사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복수의 워싱턴 당국자는 1월 공동성명에 대해 ‘당연히 장비 등도 포함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한 것인지에 대한 정부 내부의 인식차이가 어디서 온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워싱턴은 이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고 있는데 한국 혼자 모호하다고 판단하며 내부적으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다면, 과연 이를 근거로 분쟁개입의 우려를 막을 수 있는 것일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it’의 모호성은 미국을 향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국민을 향한 것일 수 있다는 의문도 가능해진다. 2005년 이미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언한 대통령, 그에 따라 전략적 유연성을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하는 국민에게 ‘우리는 (사실상) 인정한 적 없다’고 말하기 위한 모호성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다.
대만과 중국 사이에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it’의 주체가 모호한 것이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입장 차이를 배려한 전략적인 선택이라는 설명도 관점에 따라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양보해도 그 해석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성명을 발표한 외교장관, 당시 청와대안보실장의 인식이 다른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다. 국가안보의 핵심이슈를 두고 청와대와 실무부처 사이에 심각한 커뮤니케이션의 오류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국자들이 ‘다 지난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치는 논란을 다시 꺼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도 한국 정부는 계속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