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나라든 입에 재갈을 물리고 고문을 자행하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민주화가 이뤄진 뒤, 진실을 밝히고 아픈 역사를 단죄하는 행태는 다르다. 우리의 자화상은 어떨까. 고문과 사건조작으로 가정이 풍비박산한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가족들의 절절한 사연을 소개한다.
2006년 10월 한국인권재단(이사장·한상진)은 고문조작 사건을 중심으로 ‘국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 권리구제 워크숍’을 개최했다. 현직 법조인과 법학 교수, 고문조작사건 피해자, 과거사위원회와 민가협 관계자 등 50여 명이 주제발표와 토론을 벌였다. 이날 참석한 피해자 가족들은 가장이 어느 날 실종되고 간첩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간첩 자식’과 ‘간첩 아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과 싸늘한 시선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그들을 만나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세월의 이야기를 들었다.
간첩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은 신귀영(69)씨는 원양어선 기관사로 일하던 1980년 2월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68일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해 5월 구속된 신씨는 재판에서 “불법 구금된 기간에 고문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형을 선고받은 뒤 두 차례에 걸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고 1995년 7월 석방됐다. 이후 신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진정을 냈고 2006년 5월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바른말 안 하면 홀랑 벗겨버린다”
진실화해위가 ‘조사개시’ 결정을 내린 것은 공판과정에서 신청인들의 자백말고는 간첩활동을 입증할 보강증거가 제출되지 않았고 신씨의 간첩행위에 협조했다고 진술한 H, P씨가 법정 진술이 허위라고 밝혔기 때문. 수사기관에서 신씨로부터 포섭 및 밀항 제의를 받았다고 진술한 S씨도 “물고문과 구타를 하면서 간첩죄로 몰아넣겠다는 협박을 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털어놨다. 진실화해위는 “신씨 사건의 실체규명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밝혔다.
신씨의 부인 황욱희(60)씨의 뇌리엔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가 또렷이 박혀 있다. 오랜 수감생활로 몸이 망가진 남편과 함께 생계를 위해 부산 근교 시골에서 건강원을 꾸려갈 때였다. 어느 날 황씨의 가게 앞길에 세워진 고급 승용차와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을 고문한 수사관 부부와 자녀였다. 그들은 바로 옆집에 살면서 동네 유지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황씨는 26세 때 신씨를 만나 결혼했다. 배를 타는 남편과 아이 셋을 낳고 별 탈 없이 살았지만 남편은 선원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개월을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마침 가게가 딸린 빈 연립주택이 있어 장사할 계획으로 이사를 했다. 며칠 뒤 한 소년이 동사무소에서 심부름을 왔다며 “민방위 교육이 있으니까 동회로 나오라”고 했다. 집을 나선 남편은 그 후 연락이 없었다. 동사무소에 알아봤지만 민방위 교육은 없었다.
며칠째 행방을 알 수 없던 남편 대신 사복을 입은 형사 네 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뒤졌다. 영문을 물었지만 그들은 대꾸도 없이 일본에서 시숙이 보내준 선박 관련 책 등을 챙겼다. 황씨에겐 다음날 ‘대외문화사’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대외문화사는 부산시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공분실이었다. 그때까지 황씨는 남편의 행방과 실종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자신에게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황씨는 대공분실에서 보름 동안 매일 오전 10시부터 6~7시간씩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일본에 있는 시숙이 조총련계라는 걸 아냐고 물었습니다. 친정아버지가 6·25전쟁 때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됐는데 ‘아비가 빨갱이라 딸년도 빨갱이다. 바른대로 말 안 하면 홀랑 벗겨버린다’고 위협했지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구속됐고 사기사건으로 약점이 잡힌 시동생이 재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오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눈앞이 캄캄하고 홀로 낭떠러지에 선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야 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수사반장’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였는데, 그런 프로에 나오는 최불암, 이낙훈씨가 범인을 너무도 잘 잡아서 위대해 보였어요. 그래서 혹시 이 사람들이 영향력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남편 얘기를 편지로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대법원장이 대구지방법원을 방문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황씨는 손꼽아 기다린 끝에 법원으로 달려갔다. 기념식수를 하는 대법원장을 발견한 황씨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법원장님, 이것 좀 받아주세요!”라고 소리치며 편지를 내밀었다. 순간 누군가 편지를 가로챘고 파출소로 끌려간 황씨는 밤늦게야 훈방됐다.
“언니가 죽으면 얼마가 생기는데?”
“대통령 아들들이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가 편지를 전하려고 기를 썼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먹고살려니 낮에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편지는 주로 밤에 썼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얼마나 긴 편지를 써 보냈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보였어요. 세상을 너무 몰랐지요.”
답답한 마음에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인질을 잡고 빌딩에 올라가 남편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고 협박을 하다 죽으면 해결이 될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월부책장사, 보험외판원, 상조회 경리, 치킨집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이를 악물고 살았다.
월부책 장사를 할 때 관할 담당형사가 책을 사주겠다며 찾아오라고 했다. 경찰서에 앉아 기다리던 황씨 앞으로 두 사람이 다가오자 황씨는 새파랗게 질려 얼어붙었다. 담당형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도 남편을 고문했던 수사관이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그 수사관처럼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린다.
체면과 자존심을 내던지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지만 생활은 늘 적자였다. 어느 날 신장이 망가져 피오줌을 쏟은 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보험증서를 내밀었다.
“엄마가 죽으면 이 돈을 타서 살아라.”
여섯 살 막내딸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엄마, 그럼 언니가 죽으면 얼마가 생기는데?”
이 철없는 것들을 두고 어떻게 죽을까 기가 막혔다.
긴 형기를 마치고 남편 신씨가 가족 곁으로 돌아온 것은 황씨가 경리로 있던 상조회 회장의 회비횡령 사건이 마무리될 무렵이었다. 대책위원회를 이끌면서 소송을 주도하던 황씨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하필 사정이 나쁠 때 남편이 출소하자 황씨는 기쁨보다는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걱정이 앞섰다. 가장의 빈 자리가 채워지면서 온전한 가족이 됐지만 예전의 화목함을 되찾을 순 없었다.
감옥생활은 남편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당뇨병을 얻어 성치 않은 몸에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데가 없는 남편은 황씨를 상대로 화풀이를 했다. “좋은 놈 있으면 가라”고 소리칠 땐 정말 참기 힘들었다. 황씨는 정신적 상처가 있는 환자라는 생각으로 남편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제 장성한 자식들은 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결혼해 열심히 살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이 결혼할 때 혼수 하나 변변하게 못 해준 것이 두고두고 황씨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간첩으로 몰린 반공투사
“친정어머니는 사위 때문에 마음 졸이다 출소하는 것도 못 보고 돌아가셨죠. 세상이 원망스럽지만 우리 부부 소원은 살아 있는 동안 진실이 밝혀져 여생이나마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간첩방조, 편의제공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석달윤(75)씨는 서울시경 정보과에서 대공업무에 종사하다 1969년 고향 진도로 내려가 양식업을 시작했다.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사촌형이 빌미가 되어 1980년 8월 중앙정보부 직원에게 연행된 석씨는 47일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나중에 20년으로 감형됐다.
2006년 10월 한국인권재단이 고문조작사건을 중심으로 개최한 피해자 권리구제 워크숍.
석씨의 아들 권호(38)씨에게 1980년 8월21일은 자신의 생일보다 더 깊이 각인된,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낯선 사람들이 아버지를 끌고가던 그날, 권호씨는 아버지와 함께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동네 어귀 솔밭에 다다르자 권호씨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낯선 남자 서너 명이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다가올 엄청난 사건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두 살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셨고 저는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사진을 찍던 사람들이 조사할 게 있다며 아버지를 데려갔지요. 며칠 전부터 부모님은 친척 10여 명이 끌려가서 고문당한 걸 알고 걱정했다고 해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남자들이 집으로 다시 찾아왔고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천장을 두들기고 뜯어냈다. 이후 동네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그의 집에 발길을 끊었다.
“그때 마을에서 텔레비전 있는 집이 우리집을 비롯해 딱 두 곳이었죠. 그래서 저녁마다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으로 왔어요. ‘배달의 기수’나 ‘전우’ 같은 반공 드라마가 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러온 아이들을 앉혀놓고 반공교육을 하곤 했죠. 아이들은 자기들 부모가 우리집에 가지 말라고 했다며 수군대더군요.”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가 끌려간 날 어머니는 생선을 팔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저녁에 돌아와 아버지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후 외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큰형과 작은형, 누나 대신 권호씨 혼자서 어머니 곁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는 몇 달 동안 밤마다 서럽게 울었다.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다 지쳐 잠든 적도 많습니다. 매일 우시는 어머니를 지켜보는 게 너무 괴로웠죠.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의지할 데가 없어 무섭고 외로웠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는 성격이 괄괄했다. 졸지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된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무시와 업신여김을 견디지 못해 걸핏하면 싸움판을 벌였다.
“아무도 내게 자세한 설명을 안 해주니까 제풀에 주눅이 들어 어머니 편을 들 수도 없고, 손가락질하는 애들한테 뭐라 설명할 수도 없어 답답했지요.”
아버지 사건을 이해하게 된 건 중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뒤늦게 현실에 눈을 뜨자 피해의식이 가족을 지배한다는 걸 깨달았다. 권호씨는 공부를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농사나 짓자는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큰형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돼 사업가의 꿈을 접었다. 누나는 대학 졸업 후 방송국 공채시험에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결혼도 순탄치 않았다. 큰형은 집에 인사하러 온 예비 형수에게 “아버지한테 여자가 생겨 따로 살고 있다”고 둘러댔다. 고교 동창과 결혼한 권호씨는 아내가 집안 사정을 알고 있어 거짓말을 안 해도 됐다. 결혼을 앞두고 그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1인 시위를 했다. 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허사였다. 네 형제 모두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며 결혼식을 치러야 했다.
얼마 전 아버지의 탄원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고향에 내려갔다. 그러나 동네 사람 몇몇은 서명을 거부했다. 서명한 사람들도 ‘행여 우리도 무슨 일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두려운 과거’에 살고 있었다.
7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는 이근안씨.
아버지 대신 생선 행상으로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다. 지금 권호씨의 바람은 오직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뿐이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됐는지 내막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중정 수사 자료나 근거가 몽땅 공개된다면 조목조목 반박하든 수긍하든 할 텐데, 통 알 수가 없잖아요. 지금도 불안한 게, 사건이 이대로 묻힐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이 구속된 뒤 용서한다고 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고문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인만 하면 아이들에게 보내준다”
간첩방조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영(65)씨는 1965년 강화도에서 동네주민 여럿과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됐다 20여 일 만에 귀환했다. 돌아온 직후 강화경찰서에서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런데 18년이 지난 1983년 느닷없이 안기부에 연행되어 인천분실에서 40일간 불법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다. 그해 10월 구속된 그는 재판 도중 “고문에 의해 허위 진술했다. 사실이 아니다”고 소리치다 법정소란으로 끌려나갔다. 1998년 가석방된 정씨는 2006년 10월 진실화해위에 진정했다. 다음은 정씨의 딸 상숙(40)씨의 기억이다.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야근을 한다며 집을 나가신 뒤 돌아오지 않았어요. 며칠 뒤엔 어머니도 사라지셨죠. 부모가 사라진 9일 동안 어린 네 남매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가 털어놓은 얘기는 놀라웠어요. 아버지가 납북된 적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간첩사건으로 끌려가기 한 해 전에도 열흘 동안 행방불명이 된 적이 있었죠. 그때 아버지는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초주검이 돼서 돌아왔고, 수사관들이 ‘납북됐을 때 정진구(북한에 살고 있던 친척)를 만나지 않았냐’고 다그쳤답니다. 수사관들이 그때 아버지를 풀어주면서 ‘1년 뒤에 보자’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된 겁니다.”
정씨 가족이 강화도에 살던 시절, 수상한 배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마을에 비상이 걸려 남자들은 집에도 못 들어오고 보초를 섰다. 북한과 인접한 지역이라 군인도 많았고, 주민의 동태를 살피는 형사들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당시 상숙씨의 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을 이끄는 소대장이었고 어머니는 부녀회장이었다. 어머니는 사랑방에 형사들을 묵게 하고 밥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동네 분위기 때문에 아이들도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던 시절이었어요. 부모님은 마을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분들이었죠. 형사들을 재워주고 밥을 해준 게 아버지가 구속된 뒤엔 오히려 문제가 됐습니다. 간첩행위를 용이하게 하려고 형사들을 집으로 끌어들였다는 거예요.”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를 위해 인천으로 이사한 부모는 맞벌이를 하며 억척스레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끌려가고 형사들이 들이닥친 후 평화롭던 가정엔 불안과 초조감이 감돌았다. 몇 달 뒤 텔레비전에서 간첩단을 검거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굵직한 간첩단 사건 몇 건이 보도되고 이어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면서 화면에 사진이 떴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머니도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죠. 아버지가 간첩 정진구를 만나 공작금을 받고 집에 숨겨주지 않았느냐며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때리고 다리에 각목을 끼운 채 무릎을 꿇렸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이들을 생각하라, 사인만 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어머니는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억울하면 나중에 판사한테 가서 다 얘기하면 된다’는 수사관들의 말을 철썩같이 믿은 거죠. 마침내 아버지가 유죄 판결을 받자 어머니는 치를 떠셨습니다.”
“차라리 간첩질을 했더라면…”
아버지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어머니는 화병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목재소에 다니던 어머니가 목재소에서 쓰고 버리는 나무껍질을 모아두면 정씨 남매가 리어카에 싣고 왔다. 연탄 대신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한겨울 빙판길에서 나무껍질을 가득 실은 리어카는 종종 말썽을 부렸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리어카 손잡이가 위로 치켜지면 그걸 끌어내리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언 손으로 길 바닥에 쏟아진 나무껍질을 주워담는 일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을 힘들게 한 건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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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받을 때 아버지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등 반쯤 넋이 나가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죄가 없는 게 원망스럽다고 했죠. 차라리 간첩질이라도 했더라면 억울함에 정신이 나갈 지경은 안 됐을 거라면서….”
고3 때 담임은 상숙씨가 인근 학교 서무과에 취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면접을 보러가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조마조마했고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신상 관련 서류를 떼어 오라는 것이었다. 아까운 자리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쉽지 않았다. 직장동료가 호감을 가지고 접근해도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누가 집안사정을 이해해줄 수 있겠는가.
어렵사리 결혼을 약속한 남편과 처음 아버지를 면회하고 돌아오던 상숙씨는 버스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상숙씨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아버지 일로 두 남동생이 맘껏 꿈을 펼치지 못한 것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 바로 밑의 동생은 사춘기였고 막내는 한참 어렸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느라 막내는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바로 아래 동생은 오래 방황하다 제자리를 찾았지만 막내동생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가족에 대한 원망과 아버지 일로 울분이 쌓여 술만 마시면 사고를 쳤습니다. 술 때문에 몸이 망가졌고 성격도 거칠어졌죠. 직장은 오래전에 그만뒀고.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출소 후 취업을 했지만, 오랜 세월 세상과 격리된 탓에 집 안팎의 모든 일에 서툴러 한동안 힘겨워했다. 정영씨는 아직도 보안관찰을 받고 있다. 경찰서에선 아직도 이런저런 일로 불러댄다. 그 일로 행여 또 직장을 잃지는 않을까, 모처럼 되찾은 가장 자리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한다.
상숙씨는 가끔 강화도 고향이 그립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대문 앞에 아치를 만들어 장미덩굴을 올리고 꽃길을 가꾸던 예전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서 하루빨리 억울함이 풀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은 삶이나마 두 분이 떳떳하고 편안하게 사시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