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 전, GM에 지분 팔아 미국 끌어들이려 했다”
- “새로운 경제질서 만들려고 하니 강대국이 태클”
- “김 회장에게 배우라”…DJ 호통에 돌아선 관료들
- “관료들을 너무 몰랐어…그렇게 뒤통수 칠 줄이야”
- “나가라니까 나갔지…들어오겠다 해도 오지 말라는 거야”
- “세계 각국 엘리트 네트워크, 내가 물려줘야 하는데…”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를 독대하고 있는 김우중 당시 대우 회장.
“다들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궁금하지?”
“자동차 사업은 키워야겠는데 노조가 자꾸 말썽을 부리니까 노무관리 차원에서 저희 같은 운동권 출신을 뽑아 활용하려는 것 아닙니까?”
“운동권 출신을 현장에 배치해 파업 때마다 써 먹는다? 솔직히 전면 부정할 생각은 없네. 그러나 그건 지나치게 좁은 시각이야. 자네들이 민주화운동 할 때 나는 밥 먹는 시간 아끼고 잠자는 시간 줄이며 수출보국 일념으로 청춘을 바친 사람이네. 자네들만 애국자가 아니야. 아무튼 나는 누가 뭐래도 자네들을 높이 평가하네. 젊은 사람이 정의감과 열정이 없다면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어.”
투사에서 프런티어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자네들도 잘 알다시피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어. 소련이 해체되자 동유럽 지역이 요동을 치고 있네. 다녀보니 온 세상에 일거리야. 자네들이 비판하듯 우리나라 재벌구조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 하지만 문제가 있으면 같이 해결해 나가면 될 것 아닌가.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다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시간이 없네. 이제는 나랑 손을 맞잡자고….”
당시 김우중 회장은 모든 기업의 채용 기피 대상 1호이던 운동권 출신을 100여 명이나 채용했다. 압축 경제성장을 일궈낸 주역의 비전과 목표에 민주화운동 세대가 공감하고 의기투합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재벌과의 전면전도 불사하던 투사에서 세계경영의 프런티어로 변신했다. 1995년 11월 대우자동차에 입사하자마자 생산현장에 배치돼 1년6개월 동안 일하다가 1997년 6월부터 세계경영기획팀장으로 경영혁신운동과 글로벌 전략을 수립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간단하게 평가할 수 없다. 370개의 현지법인과 140개의 현지지사가 동원돼 자동차, 전자, 중공업, 무역, 금융 등 여러 분야에서 진행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그 전모를 살펴본다는 것은 나의 경험과 능력을 벗어난 일일 수밖에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 현지 합작법인 주재원으로 일한 1997년 12월부터 2000년 2월까지의 체험과 그 후 베트남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김우중 회장을 여러 차례 만나 나눈 얘기를 바탕으로 세계경영의 의미와 좌절의 원인을 살펴보려고 한다.
동유럽과 GM의 동상이몽
대우는 199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뒤 체제전환기에 있던 폴란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의 국영 자동차공장을 인수했다. 세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모두 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있었다. 경제활동의 무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준비 없이 자본주의 질서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미래를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세 나라의 국영 자동차공장도 조속히 자본을 유치해 생산설비를 현대화하고 신제품을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그러나 세계의 자동차회사들과 경쟁할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금력이 전무했다. 서방의 자금을 유치하는 방법밖에는 살길이 없었다.
폴란드 정부는 자동차공장을 매물로 내놓았고 미국 자동차회사 GM이 관심을 보였다. 폴란드 정부는 1991년부터 5년 동안 GM과 협상했지만 결렬됐다. GM이 폴란드 공장 종업원의 대규모 해고를 인수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당시 EU(유럽연합)는 EU 회원국이 아닌 옛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구사했다. 그 중 하나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생산한 제품을 EU로 수출할 경우 그 제품에 대한 수입관세를 면제해주는 것이었다. 이런 혜택을 부여하면서 EU는 해당 사회주의 국가가 부품의 60%를 자체 생산한 것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폴란드 정부는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 부품 국산화 비율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려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도 사정은 같았다. 폴란드나 루마니아는 EU 회원국이 된 후의 상황도 고려했다. 자국의 자동차공장이 EU 가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유럽의 자동차업체와 경쟁해야 했다. 제품 디자인 능력과 생산 기술의 확보는 사활이 걸린 과제였다.
그러나 GM은 폴란드 정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부품 국산화를 신속하게 달성하려면 대대적인 투자와 파격적인 기술 이전이 필요한데 이는 GM의 의도와 배치됐다. GM이 원한 것은 폴란드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해 값싸게 자동차를 생산, 폴란드 내수시장을 독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메이저 업체가 자동차산업 후발국에서 흔히 구사하는 전형적인 ‘각개격파’ 전략이다. 먼저 신규시장에 들어가 현지 자동차공장을 인수한 뒤 자체 제품 개발능력을 거세한다. 이어 투자를 동결해 공장 운영비용을 대폭 줄인 후, 자사가 설계한 모델을 저렴한 비용으로 단순 조립하도록 전환한다. 자체 내수시장을 장악해 당분간 그런 방식으로 운영하다가 공장이 경쟁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손을 털고 나온다.
GM은 시간이 갈수록 폴란드 공장의 가치는 더 떨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1991년에 시작된 GM과의 협상은 대우가 인수 의사를 표명한 1995년까지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1997년 우크라이나 정부와 현지 공장 인수 협상을 벌일 때도 GM은 종업원 대량 감축을 요구했다. 또 전체 공장 설비를 인수하지 않고 일부 GM 모델을 단순 조립할 수 있는 공장만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대우를 위한 특별법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내수시장 보호와 러시아시장 공략에 관심이 많았다. 무엇보다 국내 자동차산업이 몰락해 관련 부품업체가 대거 도산할 것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정부처럼 공장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파격적으로 기술을 이전해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그러나 GM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체제전환국들은 노회한 세계 메이저 업체와 협상하면서 골탕만 먹었다. 이 때문에 투자 위험을 서로 나누어 부담하고 수익도 나누며 국가경제를 함께 성장시켜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국가 재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 진지하고 전략적인 동료가 절실했다. 그 답이 바로 한국의 대우였다. 대우는 1994년 루마니아 공장, 1995년 폴란드 공장, 1997년 우크라이나 공장을 잇달아 인수했다.
대우차는 1972년부터 1992년까지 GM과 합작관계였다. 그 20년 동안 대우차는 자동차를 해외에 내다팔지 못했다. GM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제품 개발도 GM의 반대로 원활하지 못했다. GM은 대우차를 한국시장에 묶어두고 이미 개발한 GM의 모델을 들여와 값싸게 조립해서 팔고자 했다. 대우차가 적자를 기록하든 말든 무관심했다. 이미 대우차에 부품과 설비를 팔아 이익을 챙긴 상태였고, 대우차의 적자는 GM의 전체 손익에 영향을 줄 만한 규모도 아니었다.
대우차는 1992년 GM과 합작관계를 청산한 뒤에야 독자적인 자동차회사의 면모를 갖췄다. 후발주자의 약점을 보완하고, 독자적인 자동차회사로 거듭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대우는 신제품 개발, 해외 수출시장 개척 및 해외 생산거점 확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해외로 나갔다.
대우의 과제는 동유럽 국가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대우는 후발주자의 목줄을 쥐고 흔들며 이해관계를 따져 언제라도 손떼고 떠날 수 있는 메이저 업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동유럽 국가와 비슷한 처지의 업체라는 점이 매력이었다. 대우와 합작하면 상대적으로 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줄겠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중급기술은 배울 수 있었다.
김우중 회장이 폴란드 대우자동차 공장 신차 생산라인 준공식에 참석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경유착의 세계화?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대우의 동유럽 진출을 두고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하지 않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우에 속은 것이다” “리베이트 주고 뇌물 줘서 이뤄진 것이다” “정경유착의 세계화다”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들 국가의 협소한 내수시장이었다. 1990년대 중반,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 자동차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대규모 설비투자를 감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생산시설과 부품공급 능력을 갖추더라도 공장가동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원가부담으로 이어져 공장 운영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한다. 따라서 당시 대우차 동유럽 사업의 핵심은 시장이 성숙할 때까지, 그러니까 이들이 EU의 대규모 단일시장에 편입되기 전까지 어떻게 리스크 관리를 하며 버틸 것인가로 요약됐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김우중은 이 지역을 하나로 묶는 단일시장을 구상했다. 무역장벽을 없애고 자동차와 관련 부품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자는 생각이었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만 묶더라도 인구 1억1000만의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된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과정에서도 드러나듯 자유무역지대 창설은 다양한 이해 관계자를 조정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다. 처한 상황이 확연히 다른 폴란드와 루마니아, 그리고 상이한 국가 전략을 추구하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상반된 이해를 조정하기란 쉽지 않다.
설사 자유무역지대 창설에 동의하더라도 과제는 남는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모두 국영 자동차공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단일화된 시장을 석권하기 위해 각기 자국의 자동차 공장에 투자한다면 비슷한 차종, 유사한 부품 생산에 중복 투자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각 나라의 자동차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소지가 많았다.
결국 정부가 주도하는 자유무역지대 창설과 같은 지역경제협력 모델로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민간기업이 단일화된 자동차 시장을 창출할 수는 없을까. 대우가 그 답이었다.
대우는 1996년 배기량 1500cc급 주력 모델이던 ‘씨에로’ 설비를 한국에서 루마니아로 이전했다. 한국에서는 인기 없는 낡은 차종이지만 루마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서는 달랐다. 문제는 루마니아 시장만으로 채산성을 맞출 수 없다는 점이었다. 루마니아 공장에서 생산된 씨에로를 루마니아 밖으로 수출할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EU가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부여한 면세 혜택을 받고 유럽에 수출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겠지만 부품 국산화 비율 60%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어 불가능했다. 따라서 수출 물량을 확보하려면 주변 동유럽시장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 자유무역지대
대우가 이 문제를 풀어냈다. 폴란드 정부로부터 SKD 형태로 자동차를 면세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받아낸 것이다. SKD란 ‘Semi Knock-Down’의 약자인데 완성차에서 시트, 핸들, 도어 등 일부 부품만 떼어낸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씨에로를 구입하려는 폴란드 고객이 있다면 루마니아에서 부품을 공급하면 된다.
과정은 이랬다. 루마니아에서 대우차 씨에로를 분해해서 생산하고, 대우그룹의 무역 부문이 중간 수출상 자격으로 이를 구매한다. 대우가 이를 폴란드로 수출해 관세 면제 혜택을 받는다. 그 다음엔 폴란드 현지에서 부품을 조립해 폴란드 고객에게 완성차를 판매한다. 루마니아에서 생산된 차량이 폴란드에 무관세로 들어가는 셈이다. 결국 두 나라의 자동차 관세 장벽이 해소되고 단일한 시장 창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대우는 부품 현지화 비율을 조속히 끌어올릴 목적으로 루마니아 공장에 엔진 생산시설을 갖추기 위한 투자를 감행했다. 루마니아에서 생산한 엔진이 대우를 거쳐 폴란드로 넘어갔으니 루마니아 공장은 수출 물량을 확보해 대규모 투자에 따른 원가 부담을 극소화하는 효과를 봤다. 폴란드 공장은 자동차 부품을 루마니아에서 면세로 조달해 운송비, 관세 등의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따라서 폴란드 공장에서 생산되는 차가 가격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우의 세계경영을 통해 이들 나라에 대한 중복투자를 최대한 피하며 각 나라에 특화된 생산 거점을 확보해 나갔다. 대우가 각 나라로부터 받은 관세 감면 혜택을 융합하고 조정해 이 지역을 자동차와 관련 부품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자동차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낸 사례는 많다. 이 시스템은 민간기업이 주도한 체제전환국 간 경제 블록화의 초기 형태로 봐야 할 것이다.
대우는 이 시스템을 체코,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중국에도 적용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대우가 해체되기 직전 이 시스템의 운영을 위한 기초 작업들, 즉 현지 자동차공장 인수 및 설립, 현지 정부와 협의 작업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나는 지금도 이 구상이 실현됐다면, 동유럽에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동북아에 이르는 체제전환국의 광대한 경제 블록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러시아나 중국이 그 역할을 하고자 했다면 과거 소비에트 연방 소속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반발했을 것이다. 이미 주류 국제경제 질서 속으로 신속하게 편입하기로 결정한 폴란드가 그 역할을 맡고자 했다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 경제적 대국도 아니고, 여전히 성장 중이며 과거 경제 개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민간기업이라면, 더구나 그 기업이 자사의 성장을 그 나라의 국가 경제의 성장과 기꺼이 연계해 성장하고자 하는 기업이라면 그들은 반감 없이 그 민간기업의 리더십을 인정했을 것이다. 실제 그랬다.
음모설, 위기설…
이처럼 대우가 주도하는 체제전환국의 광대한 경제 블록을 가정할 경우 가장 큰 문제점은 WTO(세계무역기구)로 대별되는 주류 국제경제 질서와의 마찰이다. 주류 질서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체제전환국들이 신속히 WTO에 가입해 주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 대신 자기들끼리 경제협력구조를 만들고 시장을 전폭적으로 개방하지 않는다면 달갑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의 처지에서 대우의 세계경영은 체제전환국에 진출해 현지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부여받으며 새로운 경제 질서를 창출해 시장을 통합하고 이를 독식하려는 시장교란 행위로 비쳤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김 회장 자신이 이러한 우려를 심각하게 제기했고, 해결책을 찾았다. 대우는 경영권을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지분을 GM에 매각함으로써 미국을 이 경제 블록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1990년대 중반 대우는 동구권 등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 집중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한층 드높이고 있었다. 당시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자동차 공장 인수전에서 대우에 패해 진출에 제동이 걸린 GM은 대우의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때문에 항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GM과 대우차의 지분매각 협상은 외환위기를 겪기 이전에 시작됐다. 대우는 이 프로젝트에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치적 리스크를 제거하여 프로젝트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주류 국제경제 질서와의 마찰을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GM이 동의하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원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금융부문의 취약성 및 도덕적 해이가 그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 아시아 지역에 대한 자본자유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 강대국의 음모설, 유동성 위기설 등 각자 나름대로 일리 있는 주장이 난무할 따름이다. 분명한 점은 대한민국이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쪽보다 일본, 홍콩으로부터 대규모 차입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실패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미국의 압력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미국은 일본 등 역내 국가로부터 긴급 자금을 차입하려는 한국의 계획을 차단하고, 한국의 외환위기는 태국, 인도네시아의 경우와 동일하게 IMF의 일사불란한 체제 아래 타개해야 한다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뒤통수 칠 줄은 몰랐어”
왜 미국은 한국에 IMF 구제금융 신청을 강요했을까. 조심스럽지만 당시 미국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활용해 ‘대우가 야기한 시장질서 교란’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나는 음모론을 신뢰하지 않지만, 대우그룹의 동유럽 세계경영 기획과 한국의 외환위기는 상관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생각만은 지울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해 김 회장과 나눈 대화가 있다.
▼ 외환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말 그대로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순전히 외환위기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도 살다가 때로는 돈을 빌릴 수 있잖아요. 나라도 돈을 빌릴 수 있고, 또 빌린 돈은 갚으면 되는 것이고.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원인에 대해서는 글쎄…, 대우가 너무 빠른 속도로 동유럽에 진출했기 때문일가.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려고 하니 강대국이 태클을 건 것은 아닐까….”
▼ 위기를 타개하는 과정은 어땠습니까.
“본말을 전도한 것이 문제였어요. 외환위기는 시장감독을 잘못한 관료들의 책임이지. 관료들이 그걸 재벌체제의 문제로 치환했어. 여기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잘못도 있다고 봐요. 대통령이 빠른 시간에 성과를 내려고 무리를 했어. 내가 400억달러를 수출해 빌린 돈을 갚겠다고 하자 내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DJ가 관료들에게 ‘김 회장에게 배우라’고 호통을 쳤다고. 그 부분이 관료들을 화나게 한 것 같아요. 관료들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결국 대통령이 관료 편을 든 것이지.”
▼ 관료들에게 당했다는 얘긴가요.
“한국의 경제관료들을 너무 몰랐고, 그들을 쉽게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어요. 관료 대부분이 후배라서 그랬나봐. 그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어요. 사실 그건 자신들의 책임 회피지. 외환위기가 어떻게 재벌 탓인가. 어떻게든 당시 상황을 돌파해보려는 나의 의지와 계획은 그들의 강고한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어요.
나는 그래도 그들이 최소한 대우의 해외 프로젝트에 대해서만은 일정 정도 평가해주고 어떻게든 살아갈 길을 열어주리라 믿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짜서 나를 압박했어. 결국 두 손을 들게 만든 거요. 모든 관료가 ‘대우 죽이기’에 달라붙었어. 그땐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아.”
▼ 1999년에 해외로 나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가라고 하니까 나갔지. 억울한 것은 도망자 신세가 됐다는 거요. 그들은 나를 완전히 죽일 놈으로 만들어놨지. 관료들은 마지막까지 내게 자동차산업에 대해서는 개런티를 했어요. 그래서 다 포기하더라도 자동차만큼은 다시 하겠다고 생각했어. 그걸 보장해준다고 해서 잠시 나간 거지.”
▼ 귀국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을 텐데요.
“몇 번이나 들어오려고 했어요. 김태구 대우차 회장이나 강병호 대우 사장이 구속될 때, 내가 책임지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못 들어오게 했지. DJ 정부에 ‘들어오고 싶다’고 타진하면 들어오지 말라고 해. 네거티브한 반응이었어.”
결정적 방아쇠
나는 이 대목에서 김 회장의 오랜 관행을 엿볼 수 있었다. 정부와 긴밀하게 상의해서 문제를 풀던 관행. 그래서 귀국하려고 할 때마다 정부에 의사를 타진했고, 그쪽 신호가 부정적이면 기다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정부 관계자의 사인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것은 김 회장으로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 회장이 철저히 자기 처지에서 한 말이겠지만, 당시 정부의 외환위기 대응은 지금 생각해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때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해도 IMF와 체결한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이 적절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정부는 1997년 12월3일 IMF에 주요 ‘경제개혁’의 내용을 담은 의향서를 제출했다. 정부는 재벌의 중복투자, 수출 경쟁력 약화, 정부의 재벌 지원정책이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졌고 이러한 부실이 외환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가장 쟁점이 된 것은 부채비율 200% 문제였다. 국내 대기업들로 하여금 주거래 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해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라고 요구한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될 점은 정부 의향서 어디에도 부채비율 축소 목표를 200%로 단정한 조항이 없다는 사실이다. 당시 국내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선진국 기업들보다는 높았지만 이는 우리 기업 환경의 특수성에서 비롯됐다. 선진국처럼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여건에서는 대부분의 자금을 외부차입을 통해 조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IMF 의향서에서 약속하지도 않은 부채비율 200% 달성을 위해 무리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은 현금 보유량이 풍부하거나, 외국 증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거나, 운 좋게 외자 유치에 성공한 소수의 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이 보유 자산을 싼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질적 재벌 해체로 가는 결정적 방아쇠 노릇을 했다.
재벌 체제가 부작용을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재벌 체제가 극빈국(極貧國)이던 한국의 경제를 성장시킨 주역 중 하나라는 사실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대한민국 재벌 체제의 선단식 경영은 우리 기업들이 전문화만 추구했다면 이룩할 수 없었을 반도체, 철강, 자동차산업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대우의 세계경영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것도 대우의 독특한 선단경영 덕분이었다.
IMF 의향서를 보면 당시 IMF는 재벌 체제 해체를 명시적으로 요구하거나 재벌 해체에 직결되는 정책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기업 부채비율을 낮추고, 기업 재무제표 작성을 세계 표준에 맞추며, 연결재무제표 작성 등을 통해 기업 투명성을 높이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당시 정부는 왜 그렇게 무리한 정책을 강행했을까.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 해도 재벌 체제의 변화는 사회적 공감대 아래 신중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뤄져야 했다. 무리한 재벌 해체 정책과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 활력 저하의 연관 관계가 무엇인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관성적으로 대응한 게 잘못”
세계화를 앞장서 주장했던 대우는 왜 망했는가. 김우중은 왜 실패했는가. 김 회장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까. 김 회장이 존경하고 자주 조언을 청하던 윤석철 서울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대우가 패망한 것은 김 회장의 오만 때문이야. 과거의 성공신화가 발목을 잡은 거지. 패러다임이 변화했는데 관성적으로 대응한 것이 문제였어. 사회는 재벌구조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는데,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
김우중 회장이 귀국한 뒤 나는 그를 찾아가 윤 교수의 ‘오만론’을 꺼냈다.
“외람되지만 주위에선 김 회장께서 오만했다고 합니다.”
그는 웃으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이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마치 그가 1995년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맑은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실패한 경영자다. 내가 그의 실패를 예견했다면 그건 난센스이겠지만, 김 회장이 무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동유럽을 다니면서 그는 칙사 대접을 받았다. 전용기를 타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에 내렸다. 한국 대통령이나 관료들의 말쯤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관료들을 너무 몰랐다”는 그의 말이 그 증거다.
나는 대우의 실패는 시스템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로마인 이야기’에 나오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중에 김 회장은 한니발에 가깝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연전연패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와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한니발은 너무 탁월해서 아무도 그를 절대 못 이긴다. 그러나 마지막엔 로마가 승리할 것이다. 저쪽은 한니발만 죽으면 끝이지만, 로마는 내가 죽어도 또 다른 장군이 있다.” 결국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자마에서 한니발 군대를 격파했다.
대우에서 김 회장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해외 현지에서 밤을 새우면서 회의를 할 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김 회장이 ‘복합 컴퓨터’ 같은 경영자라는 점이다. 누구의 질문에도 그 자리에서 답을 냈다. 단숨에 핵심에 접근하는 그의 시각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없는 대우는 한니발 없는 카르타고였다. 상황이 위급하게 돌아가자 김 회장은 자기 컨트롤에 실패했다. 그것은 곧 대우의 실패였다. 2인자, 3인자를 만들어놓지 못했다는 비판에 대해 김 회장은 이렇게 우회적으로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
“우리 세대는 자네들 세대에 비하면 행복한 편이야. 우리는 기업에서든 정부에서든 젊은 시절부터 주역으로 뛸 수 있었어요. 자네들도 의욕과 정열이야 우리와 다를 바 없지. 그러나 싱싱한 청춘의 에너지를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몽땅 소모했어. 실력을 기를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중년이 되어버렸네. 우리의 책임이 커요. 나는 일하는 데만 온통 정신을 쏟았지, 다음 세대의 주역을 키우지 못했어.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도 여기서 싹튼 게 아니겠는가.”
김 회장이 한국에 들어온 뒤, 나는 한국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법적 판단을 기다리고 있던 때문인지 그는 상당히 차분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하네. 그래야 도달할 목표를 올바로 설정할 수 있고 그 목표를 이룰 현실적 방안도 마련할 수 있어요. 한국은 아직 마음먹은 대로 자기 운명을 결정할 만큼 힘센 나라가 아니네. 우리를 둘러싼 주변 나라들은 모두 강대국이야. 한국의 운명은 이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결정됐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어. 우리가 세계 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이 조만간 실현가능한 목표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혜롭게 주변 강국의 힘을 역이용해야 한다고 보네. 그들이 회피하고 미워하는 나라가 아니라 언제든지 반기는 친구의 나라가 되어야 하네.
조건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중국과 일본 같은 강자끼리는 서로 경계하고 견제하게 마련이야. 우리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피해도 주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계속 심어줘야 하네. 우리는 이웃나라 누구에게도 적대감을 드러내서는 안돼요.
그렇다고 남의 비위만 맞춰서도 안 되고. 그러자면 우리가 동북아공동체를 경제 중심으로 슬기롭게 묶어 나갈 수 있어야 해요.”
강대국과 맞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화합하면서 실속을 챙기자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미래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미 다 지난 얘기가 됐지만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 무엇보다 해외시장을 개척하면서 만났던 우수한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행정대학원의 조지프 나이 교수가 떠오르는군. 이들은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리더라면 반드시 교류해야 할 사람들이야.
이들을 통해 이후 세대들과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 텐데…. 세상일이란 결국 사람이 하는 거니까, 전세계를 무대로 우리가 날개를 펼치려면 각국의 실력 있는 최정상 엘리트들과 교류해야 해. 내가 자네 세대들에게 꼭 물려줘야 하는데….”
대우 문제에는 우리 사회가 현대사의 고비마다 직면해온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라는 주제들이 응축되어 있다. 대우 문제를 평가한다는 것은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의 지난 현대사를 되돌아본다는 의미가 있다. 대우 문제를 계기로 우리 현대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GM을 꺾은 동력
한국은 제국주의를 통해 남의 나라를 침탈한 적이 없고, 오히려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여러 나라와 연대할 수 있다. 이들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이 아직 성장하고 있는 젊은 나라라는 점은 대우가 동유럽에서 GM을 꺾은 주요한 동력이었다.
나는 대우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약점조차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인은 바깥으로 대거 진출해야 한다. 고급두뇌를 가진 한국의 청년들은 해외기술 인력으로, 경험 있는 장년층은 지도인력으로, 노년층은 고문으로 나가야 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수십만의 젊은 인력을 산업인력화해서 세계로 내보내야 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세계 곳곳으로 나가 큰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또한 800만명의 재외동포, 재외국민을 우리의 미래를 여는 핵심자산으로 여기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의 미래를 떠받칠 인프라로서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를 장기 전략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해외 정보역량, 외교역량, 재외교포와 재외국민에 대한 서비스 역량이 대폭 강화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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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주도하되 기업과 국제전문가, 글로벌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세계경영청’을 설립해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의 허브 기능을 맡기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를 통해 정보 및 외교통상 역량의 시너지 효과를 증폭하고, 전세계 주요 거점에 코리아센터를 설치해서 코리안 네트워크의 구심이 되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김우중은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그가 씨를 뿌린 세계경영의 자산은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