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제진카 수용소의 철조망.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006년 초겨울, 10년 만에 찾은 크라쿠프 역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역 주변을 새로 정비한 까닭에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주시키던 당시의 음산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역사(驛舍)에서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지하통로에 늘어선 헌책방이 옛날 분위기를 조금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역을 제외한 다른 거리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도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중앙시장 광장, 바벨 성, 유대인이 거주하던 카지미에슈 지역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1038년 이후 바르샤바로 천도할 때까지 558년 동안 폴란드 수도로 발전을 거듭했던 크라쿠프의 구 도심은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방문한 청소년들이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에 있는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외부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에 있는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내부
영화 속에서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유대인을 집결시킨 장소는 중앙시장 광장과 유대인이 많이 거주했던 즈고디 광장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다양한 몸짓과 음악을 선보이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보일 뿐이다.
중앙시장 광장 주변에 있는 성모마리아 성당도 영화에 등장한다. 1288년 완성된 이 성당은 크라쿠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건축물이다. 천재 조각가 비트스트보슈가 조각한 승천제단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성당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크라쿠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가 폴란드 최고의 대학인 야기엘론스키대와 바벨 성이다. 1364년 카지미에즈 비엘르키 왕이 설립한 이 대학에서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필두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쉼보로스카, 2004년 타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많은 명사가 수학했다. 카지미에슈 지역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는 바벨 성은 50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지어진 까닭에 다양한 건축양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죽음의 문’ 위에서 내려다본 수용소 전경.
아우슈비츠 지역에 처음 건설된 제1수용소의 정문. 유대인 수용자들을 태운 기차가 도착하던 브제진카 수용소 ‘죽음의 문’. 크라쿠프의 명물인 관광마차 마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크라쿠프 거리의 예술가가 공연을 펼치고 있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 후반부의 주요 무대인 아우슈비츠는 크라쿠프 서남쪽으로 75㎞ 지점에 있다. 아우슈비츠는 독일어 지명이고,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제1수용소와 그곳에서 3㎞가량 떨어져 있는 제2수용소가 영화에 등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대인 수용시설을 활용해 만든 박물관은 영화 속 모습과 거의 다르지 않다. 박물관 정문을 통과해 200m를 이동하면 수용소 입구가 나온다. 당시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곳에는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ARBEIT MACHT FREI)’는 독일어 문구도 그대로 붙어 있다. 문 안 이중 고압전류 철조망과 어두운 건물이 자아내는 정경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남쪽 끝에 있는 지하 가스실.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유대인 수용자들의 복장. 영화에서도 고증을 거쳐 그대로 재현했다.
제2수용소인 브제진카 수용소에는 영화에서 쉰들러 공장에서 일할 여자들을 태운 기차가 들어왔던 ‘죽음의 문’과 유대인을 수용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엄청나게 넓은 수용소에는 당시 300동의 막사가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굴뚝과 막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벽돌이 뒹구는 황량한 풍경이다.
혹자는 묻는다, 참혹한 기억은 빨리 잊는 것이 낫지 않으냐고. 그러나 이 음산한 풍경은 방문자에게 치열한 각성과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회피하지 않고 역사를 직시하는 시선만이 인류 안에 잠재하는 악마성을 경계할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는 구호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의 진리다. 끊임없이 깨어 있고자 하는 노력만이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교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