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이념과잉의 시대, 중도개혁으로 ‘불임정치’ 벗어나자”

  • 안병영 연세대 교수·행정학

    입력2007-01-05 10: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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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두 차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연세대 안병영 교수가 2007년 2월 정년퇴임을 앞뒀다. 교육부 수장 시절 중도개혁론자를 자처하며 균형 잡힌 개혁을 추진했던 안 교수는 이념적으로 극과 극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하는 우리 사회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제시했다. ‘중도에 서면 해답이 보인다’는 그의 명제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으며, 안 교수의 제언이 중도통합적 리더십으로 체제개혁에 성공한 외국 사례와 자신의 교육부 장관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귀기울여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글은 안 교수가 2006년 11월 30일 연세대에서 한 고별강연 원고를 직접 손질해 ‘신동아’에 보내온 것이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한국사회의 오늘은 이념과잉, 이념갈등으로 충만하다.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언론계도, 그리고 지식인의 담론구조도 모두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점철된다. 주요한 정책 쟁점에 대해, 생각이 양극으로 쏠리고 양극으로 나뉜 세력들은 날을 세우고 치열하게 맞부딪친다. 사회의 이념갈등은 얼마간 세대 간의 갈등과 맞물리면서 더욱 심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합의가 어렵고, 다툼은 있되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하면 정치는 교조화·관념화하며 정치주역들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격돌만을 일삼게 되어 끝내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정책 생산에는 소홀해지고, 민생정치와 거리가 먼 불임(不姙)정치를 낳는다.

    그런 가운데 날이 갈수록 ‘중도’는 빈약해진다. ‘중도적 공론의 장’이 실종된 가운데 합의적 개혁정치도 표류한다. 이렇듯 교착정치가 장기화할 때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다. 더욱이 2007년 대선을 겨냥해서 정치권의 이념대결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정당 간의 이념적 색채가 선명했던 유럽에서, 최근 좌파와 우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양자가 중도에서 만나 협력정치를 추구하는 양상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른바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기존의 사민주의 전통에서 과감히 벗어나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사회정의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고, 독일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는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해 고(高)실업과 불황에 허덕이는 독일경제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 교조화, 그리고 여기서 배태되는 정치의 난맥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답으로 ‘중도개혁 정치’를 제의한다. 중도적 정치 리더십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체제개혁과 효율적 정책생산을 추구할 때, 한국 정치는 ‘교착’과 ‘불임정치’의 악순환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글에서 ‘중도에 서면 해답이 보인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그 논거를 밝히고자 한다.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 갈등은 최근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북핵 및 전시작통권 이양 등의 남북 문제뿐 아니라, 주요한 생활영역 곳곳에서 표출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비롯한 ‘세계화’ 논쟁, 양극화, 성장-복지 갈등, 노사 문제, 부동산정책, 과거사 논박에서 고교평준화에 이르기까지 그 그림자가 서리지 않은 영역이 없다. 또 한번 불이 붙으면 곧바로 양극화와 국론 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이념성은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많은 이의 뇌리 속에 교조와 환상, 거짓 신화와 허위의식, 그리고 정서의 과잉과 비(非)합리와 반(反)이성이 판을 치게 만든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도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내용에 대해 깊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본다면, 대체로 보수는 자유에, 그리고 진보는 평등에 좀더 기울어진 형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양자 중 그 어느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어느 한쪽의 절대가치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중도정치는 대체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지향한다.

    우리가 좌우 어느 한쪽으로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이나 독재를 원하지 않는 이상,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오른쪽, 즉 중도우파는 자유와 평등을 다 중시하되 자유에 더 역점을 두는 세력이며, 그 왼쪽, 즉 중도좌파는 양자를 다 중시하되 평등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 세력이다. 이 비교적 폭넓은 중간 영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바르게 만날 때, 적정한 정도의 이념적 정책 지향의 차이는 정치과정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계에선 이념과 정책의 대결과 갈등은 있으나 그 진폭이나 심도가 얼마간 절제된 가운데 전개된다. 따라서 서구의 선진 정치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정치적 상호작용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간의 연속성 안에서 이뤄지며, 이를 통해 안정적 민주주의와 중도주의적 정치개혁을 추구한다.

    ‘중도’라는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본질적 내용을 지닌 것도 아닐뿐더러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사용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엄혹한 권위주의시대에는 정치가 거의 필연적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치열한 대결구조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시대 정치마당에서 이른바 ‘중도통합론’은 으레 권위주의 지배세력이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였던 게 사실이다. 그 밖에도 전쟁이나 경제공황과 같은 ‘역사적 결단의 시간’에는 중도라는 정치공간이나 중도적 해결방식이 설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중도를 다시 본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따라 중도의 이념적 자리가 가변적인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지난 복지국가 시대에는 이른바 스웨덴으로 표상되던 ‘제3의 길’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에 대한 ‘제3의 대안’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나, 요즈음 블레어나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구(舊)사민주의를 초월하는 의미가 짙다.

    중도는 그것이 가지는 균형, 중용, 온건의 함축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좌나 우로 크게 치우친 정치세력이나 개인이 국민의 눈을 현혹하고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공공연하게 중도를 표방하지만 실제로 그 이념적 불모성 때문에 이렇다 할 정책대안이 없거나 그 내용이 빈약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되면, 중도가 수사(修辭)에 그치고 허구화할 가능성도 크다. 적지 않은 경우, 중도는 자칫 양 극단으로부터 양비론 내지 양시론, 혹은 기회주의로 비판받기 일쑤이며, 그에 따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중도가 외롭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민주화가 공고화·제도화할수록 좌와 우의 극단적 주의·주장은 급속히 퇴조하고 점차 정치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다. 또 극단적 이념세력이 중도를 위장할 때, 혹은 알맹이 없이 이름만 중도일 때, 비판적 공론화 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 마각이 드러나게 된다.

    중도는 대체로 극단적 보수와 극단적 진보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하학적 중간점이라기보다는, 양극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지향을 두루 포용하면서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제3의 길’이다. 따라서 중도는 좌와 우 양 방향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대안에 고르게 관심을 기울인다. ‘교조’에 집착하며 ‘진리독점’과 ‘완승’을 꾀하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비해 ‘대안모색’의 폭이 크고, ‘정책수단’이 다양하며, ‘대화’ ‘타협’과 ‘제휴’ ‘연립’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비록 점진적이나마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통합적 문제해결’을 추구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엄청난 강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개혁적 중도’는 시대의 징표를 앞서서 읽고,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개인과 집단 및 정치, 사회세력을 포함한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추구하되 그 실천적 정책 내용은 그 나라와 그 시대의 국가적,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적실성 있게 구성한다. 그들은 체제차원의 거시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고, 일정 정책영역에서 개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세 명의 중도개혁가

    20세기 역사 속에서 체제개혁 차원의 새로운 국가모형을 설계했던 세 사람의 중도개혁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국가 위기상황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으로 국가차원의 체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해 20세기 복지국가시대를 연 베버리지 경(William H. Beveridge·1879∼1963), 분단 전야의 오스트리아를 탈냉전적 통일국가로 이끈 레너(Karl Renner·1870∼1950), 그리고 금세기의 대표적 강소국(强小國)인 네덜란드의 ‘기적’을 설계한 콕(Wim Kok·1938∼)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도통합의 이념적 입지에 서서 시대의 징표를 바르게 읽고 장기적으로 조망하면서 국가재편을 결행하는 데 앞장선 체제 설계자들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제도나 관행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동안 많이 진척됐다고는 하나 정치개혁이 아직도 중요한 현안이며, 정부형태 및 선거제도 등 기본적 정치제도에 대해서도 아직 저마다 이견이 분분하다. 무엇보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관행

    서구의 몇몇 작은 나라, 예를 들어 스위스나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종교적, 계급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회임에도 비례대표제, 연립정부, 상호비토권 및 하위체제의 자율성 같은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른바 ‘협의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를 발전시켰다.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기보다 소수자가 참여해 권력을 공유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양식을 제도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지역별, 계층별 혹은 세대별 갈등이 있다고는 하나 이들 나라에 비해 훨씬 동질적인 정치문화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보다 적실성 있는 정치제도의 탐색과 관행의 정착이 이뤄지면 우리 사회에서도 합의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주요 생활영역 내에서 이익갈등을 해결하고, 사회적 합의 도출을 촉진할 수 있는 제도 및 중재 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주지하듯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노사간, 호은 노사정 간의 사회협약을 통해 임금조정, 사회복지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사회경제적 난제를 해결하려고 ‘코포라티즘(corporatism)’을 발전시켰다. 일종의 계급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코포라티즘은 지난 세기 서구 산업사회의 위기관리와 복지국가 발전에 있어 불가결의 요소로 간주된다. 우리의 경우도 김대중 정부가 창설한 ‘노사정위원회’가 바로 그 예인데, 노사정 모두 공공성 추구 노력의 부족으로 ‘부동성’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어 안타깝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더라도 사회적 합의형성의 제도와 관행을 계속 만들고, 이를 정성스레 가꾸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노사가, 혹은 보수와 진보가 만나 큰 합의를 일궈낸다. 1938년 스웨덴의 ‘살트쉐바덴’ 협약이나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이 그런 예이다. 이들 여러 나라는 위기에 처하면 이른바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대통령의 균심(均心)과 공심(公心)

    중도개혁은 타협과 문제해결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모델로서 ‘유연보장(flexicurity)’과 ‘사회투자국가(the social investment state)’가 있다. 이미 언급한 유연보장의 개념은 파트타임 등 불완전 고용을 허용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한편, 이들에게 실업수당 등 사회급여를 보장하는 형식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투자국가는 신자유주의와 구(舊)사민주의와 구별되는 이른바 ‘제3의 길’로 교육, 직업훈련 등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회정책의 생산적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정책 간의 선순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국가모형 개념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건강한 중도의 목소리를 키우며 사회적 합의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제도나 관행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주요 정치행위자들의 결의와 노력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사회 내 다수의 시민은 가치지향으로 볼 때 좌우로 펼쳐지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중간지대에 밀집해 있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들은 양극화의 기세에 눌려, 또 그들을 정치수면 위로 끌어올릴 조직화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주요 정치행위자들이 중간지대로 다가와, 이들 중간집단, 침묵하는 건강한 다수를 정치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의 정치과정에서 대통령의 위치는 실로 막강하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통령은 더 이상 여당의 총재도 아니며, 국회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여 의회를 지배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통령은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고, 행정부 수반으로서 국가정책의 의제 형성을 주도하며, 국가원수로서 국방과 외교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중한 자리이다. 민주화 이후 타협의 문화가 부재한 상황에서, 여소야대 국면시 대통령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정치지도자도 바로 다름 아닌 대통령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한 정파의 수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사회적 합의 형성에 매진해야 하며, 가능한 한 중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대통령은 중심을 바르게 잡고, 좌우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는 균형된 마음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균심(均心)’과 ‘공심(公心)’이다.

    보수, 진보 모두 중도적 공론의 장으로 다가와야 한다. 중도적 공론의 장으로 다가오라는 것이 자신의 신념과 이념적 지향을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며 때에 따라서는 양보를 통해 정치권의 공멸이 아닌 공생을 지향하라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바르게 학습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중도적 公論의 장

    정치권은 먼저 자신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 필요하다. 진보진영은 대한민국의 체제가치에 대한 신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아직도 그 안에 잔존하고 있는 몰(沒)체제적 통일관이나, 지나친 대북 편향성 을 떨쳐버려야 한다. 보수진영은 기득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한신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후 정치권은 대한민국의 체제가치를 보다 폭넓게 인정하고 서로 앞장서 대화와 타협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한 사회의 공론형성에 있어 언론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언론매체가 지닌 지나친 이념적 편향성은 합의문화 형성과 중도적 공론 형성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방송과 신문의 대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편향적 언론은 담론구조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이미 정해진 자신만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언론에 사회적 공론의 형성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길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대신할 그 어떤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다. 언론은 사실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정론(正論)을 펼쳐야 한다. 미디어의 정론 회복 없이 중도개혁정치의 내일은 어둡기 그지없다. 언론이 언론의 사명을 다하기를 기대해본다.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강화된다. 바람직한 시민단체의 대(對) 정부관계는 사안에 따라 공공성의 차원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창조적 긴장관계’이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정치권력에 동원되거나, 그와 야합할 때, 혹은 시민사회 내부에 첨예한 이념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공론 형성의 기반은 오히려 약화된다. 무엇보다 시민운동의 ‘포퓰리즘’과 접목하는 것은 자칫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로 전락할 위험을 가중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는 어떤 계층이나 집단 혹은 정파와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생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비판적 지성’의 존재는 중도통합적 개혁정치의 요람이다. 그런데 지성계(知性界)도 양극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념갈등 속에 장기적 역사조망과 공공선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지성계가 사라지고 있다. 최근 지성계가 좌우로 극명하게 나뉘어 실명을 거론하며 상호 비판하는 현상마저 목도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적 지식인들이 함께 사상적·학문적 대화를 나누는 변변한 지성지 하나 없는 우리 지성계의 현실을 보고 있자면, 암울했던 1950~60년대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상계’가 그리울 뿐이다.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 한국 민주주의 정치 발전의 금자탑인 4·19혁명이나 1987년 6월 항쟁의 성공도 국민의 힘이 뒷받침됐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주기적으로 이념적 지향을 좌측으로 되돌리곤 했다. 1920년과 1928년 총선에서 일부 산업의 국유화를, 1946년과 1948년 총선에서는 계획경제를, 그리고 1976년 총선에서는 임노동자 기금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을 가져왔고, 1976년에는 아예 권좌에서 밀려났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장기간 중도통합적 개혁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민의 정치적 예지와 균형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미국도 최근의 상·하원 선거에서 많은 국민이 공화당 지지를 철회해 부시 행정부의 지나친 보수 편향에 제동을 걸고, 미국을 다시 중도의 길로 되돌리게 했다.

    이처럼 국민은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정치변화의 마지막 조정역을 맡고 있다. 따라서 위대한 우리 국민은 정치가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좌절감을 되씹기보다는 스스로의 주체적 정치역량의 제고를 통해 한국정치의 거시적 트렌드를 주재해야 할 것이다.

    이념정치를 민생정치로

    이제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마음의 창을 열고, ‘완승’을 기대하기보다 ‘윈윈 게임’을 겨냥하며 상생(相生)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은 스스로 관념의 웅덩이에서 벗어나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며, 중간지대로 다가서야 한다. 이들이 움직이면 침묵하던 다수도 스스로 부상(浮上)한다. 그러기 위해서 과도한 거품을 거두고, 민생의 바다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필자는 세계 현대사 연구에서, 그리고 필자 자신의 정책운영과정에서 ‘중도에 서면 해답이 보인다’는 명제를 터득했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 상식적 명제는 이념정치를 민생정치로 옮겨놓는 묘약이다. 정치가 이념싸움을 거두고 교착정치에서 벗어나면, 체제개혁도 정책개혁도 가능해진다. 정치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있는 한, 체제개혁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정책논의조차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안병영

    1941년 서울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행정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 박사(정치학)

    교육부 장관(1995.12~1997.8, 2003.12~2005.1)

    現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저서 : ‘현대 공산주의 연구’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변론’ ‘한국정치론’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 등


    가장 바람직하기는 정치세력이 스스로 중간지역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그것을 부추기며 동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대선이 가까울수록 이념논쟁은 더욱 격화될 공산이 크고 불임정치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침묵했던 중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 또한 대선에서 마지막 조정역을 맡을 수 있을지언정, 정치와 정책과정을 현장에서 주재하기는 어렵다.

    결국 정치인들이 이제 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식인과 언론이 더 이상 이념적 갈등을 악화시켜서는 안 되며, 중도적 가치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치인들을 중도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 우리 국민 스스로도 보다 주체적으로 공공의 발전을 위한 정치참여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치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민심의 바다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네덜란드 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협력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체제개혁에 성공한 빔 콕 전 총리.

    베버리지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개혁가, 고위관료, 경제학자, 총장, 그리고 정치인이었다. 이미 청년기인 1900년대 초에 ‘더 모닝 포스트(the Morning Post)’의 대표적 사회문제 논평가로, 그리고 실업·고용 및 사회보험의 최고 권위자로 부상하여, 로이드 조지 자유당 내각(1906∼14)을 도와 특히 노령연금과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의 입법화에 크게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기사작위를 받았다. 식품성 차관 등 공직을 거쳐 1919년부터 1937년까지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 사회과학대학으로 만들었다. 이후 옥스퍼드대 유니버시티 칼리지 학장, 왕립 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전후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출간한 것이다. 1941년 6월, 독일이 쏘아올린 포탄들이 쉬지 않고 웨스터민스터홀 근처에 떨어졌고, 전황이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이때, 영국은 전후 영국이 건설할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준비한다.

    그것은 국가 존망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역사적 작업이었다. 거국내각의 노동당 출신 재건상(Minister of Reconstruction) 그린우드(A. Greenwood)는 하원의 만장일치 결의를 거쳐 베버리지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구성하고, 기존 영국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전반적으로 점검해 개선책을 제안할 것을 청했다. 이 위원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조, 상공인, 소비자 조합, 시민단체로부터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에 이르는 다양한 부류의 조직대표 및 인사들과 수백회에 걸친 토론과 공청회를 거쳐 1942년 이른바 베버리지 보고서(원명은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출간한다.

    이 책은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불빛을 갈구하던 영국 국민으로부터 놀라운 호응을 얻어 곧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때 그의 조교로 일을 도왔고 훗날 영국의 총리로 노동당 내각을 이끈 윌슨(Harold Wilson)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혁명적 문건’이라고 집약, 표현했다.

    ‘소극적 집합주의자’

    베버리지는 이 보고서에서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의 개념을 표방했는데, 이는 적어도 영국시민이면 언제나 일정수준의 기본적 삶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시민을 ‘5대 악(惡)’, 즉 궁핍, 질병, 무지, 불결 및 나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공공부조 및 고전적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넘어 완전고용, 전국민적 무료 보건 및 재활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가족수당 같은 포괄적 생활보장 장치를 마련했다. 그 때문에 베버리지의 사회보장체제는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평을 받았다.

    베버리지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단순히 노동계급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포괄적 사회보장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존중하는 개인적 자유, 창조적 기업활동, 그리고 가족을 위한 개인의 책임을 보장하는 데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전후 복지국가 시대를 여는 신호탄 구실을 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의 애틀리(Clement Attlee) 내각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종합적 사회보장체계의 개혁에 나선다. 이후 베버리지 보고서는 가족수당법(1945), 국민보험법(1946), 재해보험법(1946), 국민부조법(1947), 아동법(1948) 등 1945∼48년에 이르는 총체적 사회개혁의 준거 틀이 됐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근간으로 한 영국형 복지국가의 탄생 배경을 보면, 역사상 미증유의 세계대전을 함께 치른 동포들 간에 형성된 ‘한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바로 읽은 베버리지의 경륜과 통찰력, 시대적 요구를 정책화하는 전문가적 지식과 분석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중도통합적 개혁의지와 정치적 설득력이 크게 기여했다. 그는 복지국가 팽창을 우려하는 보수진영을 향해, 자신이 제시한 복지제도가 보건의료비, 연금 등의 노동비용을 공공회계로 넘기고, 보다 건강하고 부유하며 동기부여되고 생산적인 노동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영국산업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는데, 그것이 주효했다. 이렇게 우파의 저항을 무마하고 그들을 원군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1944년 자유당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자유당 원내 지도자로 정치활동을 했다. 이후 남작 작위로 상원의원이 됐다. 사회정책학자인 조지와 윌딩(Vic George · Paul Wilding)은 그를 가리켜 ‘소극적 집합주의자’라고 했다. 이들은 베버리지가 자본주의의 원활한 기능과 시장체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국가의 필요성은 인정하나, 국가의 책임은 국민 최저수준의 보장에 머물러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베버리지는 비교적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각계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청년기에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인 웨브(Webb) 부부를 사사했고, 페이비언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런던경제대학의 총장으로 다년간 재직했다. 따라서 페이비언 협회는 아직도 그를 자신들의 동지로 생각한다. 더욱이 그의 보고서가 전후 노동당에 의해 제도화의 길을 밟았다는 점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 자유민주당 내에는 아직도 원내 서클로 ‘The Beveridge Group’이 존재하며, 그들은 끝까지 자유주의 전통을 바르게 지킨 베버리지를 자유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결국 그는 좌우 양측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인물인 것이다.

    동서 냉전의 핵,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은 냉전시대에 기록된 정치협상의 산물 중 가장 반(反)냉전적이다. 이 과정에서 분할 점령된 ‘동서 냉전의 핵지대’ 오스트리아를 통일된 정치 공동체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레너이다.

    레너는 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구 제정 오스트리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열여덟째 자식으로 태어나, 빈 대학 재학 중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법사회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오스트로-마르크시즘’의 대표적 우파 논객으로 활약했다. 1907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1919∼20년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1918∼34) 초대 총리가 되고, 1931∼33년 의회의장을 역임했으나 1934년 나치 침공 이후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 탄생한 중유럽의 소국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출범 후 줄곧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정치적 내쟁(內爭)에 휘말린다. 특히 이념 갈등이 심화되어 천주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검은 진영’과 오스트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붉은 진영’은 전 국민을 둘로 가르고 극한적인 투쟁을 벌이다 끝내 시민전쟁까지 일으키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1938년 이 나라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됐고, 얼마 안 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전세가 연합국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1943년 11월1일, 미·소·영 세 나라 외무장관들이 회동해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에서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야욕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임을 명백히 했으나, 아울러 전쟁 참가의 책임을 얼마간 패전국과 함께 나눠 져야 한다는 유보적 문구가 첨가됐다. 이로써 모스크바 선언은 전후 오스트리아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은 위의 모스크바 선언을 재확인하고, 이를 부연하여 ‘국민 중 모든 민주적 요소가 광범하게 대표되는 임시 정부의 수립’과 ‘자유선거의 조속한 실시’를 명문화했다.

    마침내 2차대전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1945년 4월 중순, 소련군이 연합군 중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에 진입, 수도 빈에 이르렀다. 그러자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전전(戰前) 제1공화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이던 천주교 보수계와 사회주의계가 기존 조직의 재정비에 나섰고, 군소정치세력이던 공산당도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치상황에 맞춰 독자적 세력 구축에 나섰다. 이후 4월27일 레너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위의 정치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됐다.

    위의 3당(국민당/OeVP, 사회당/SPOe 및 공산당/KPOe) 간의 연립정부는 처음에는 소련에 의해서만 승인됐고, 그 정치적 영향력도 소련군 진주 지역에 한정됐다. 서방 연합군이 진입한 서부 및 남부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레너 정부에 대해 얼마간 회의적이었다. 같은 해 7월 연합국 4개국은 모스크바 선언에 준거해 이른바 제1차 통제협약을 체결하고, 이에 의해 4개국 분할지역을 확정했다. 아울러 분할 통제의 정상기관으로 연합국 평의회가 구성됐다.

    좌우합작의 대연정

    연합국의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레너의 임시정부는 단일 행정권 아래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계속했다. 소련측의 본래 속셈은 사회주의자인 그를 내세워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이른바 ‘인민전선’으로 전환해 오스트리아 공산화의 전위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1공화국 초기 총리직을 역임한 경륜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신뢰를 받던 레너는 소련의 속셈을 간파하고 오스트리아를 공산화의 마수로부터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에게 있어 이미 전체주의로 전락한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적(敵)일 뿐이었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연세대 퇴임 고별강연

    안병영 교수는 교육부총리로 재임 중이던 2004년, ‘EBS 수능 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로 e-러닝 대중화를 촉발했다.

    그는 한때 적대세력이던 천주교 보수계의 국민당과 더불어 공산당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임시정부 관할권 밖 제주(諸州)의 정치지도자들과 유대를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드디어 레너 정부의 관할권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같은 해 10월 연합국 평의회는 이를 각서의 형식을 빌려 최종 승인했다. 레너의 주도로 연합국의 분할점령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전역을 관할하는 단일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후 이 나라가 진정한 독립과 통일로 향하는 주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945년 11월25일 전후(戰後) 최초의 자유 총선이 실시됐다. 여기서 보수계의 국민당은 85석을 차지했고, 사회당은 76석을 차지한 반면, 공산당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위의 3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의 총리에는 국민당의 휘글(L. Figl)이, 부총리에는 사회당의 쉐르프(A. Schaerf)가 선출됐다.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쇠퇴 일로를 걸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7년 공산당은 내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공산당의 탈퇴를 계기로, 국민·사회 양대 당을 축으로 하는 좌우합작의 대연정 시대가 바야흐로 막을 열었다. 레너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0년 서거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전후 국민당과 사회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종래의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중도를 향하여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제1공화국 시대의 치욕적인 시민전쟁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히틀러의 폭정 아래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수용소에서 함께 고난을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공감대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이제 극단적인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오스트리아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너는 살아 있는 전범(典範)이었다.

    교조적 이데올로기를 벗다

    당시 양당 지도자들은 종전 후 동구를 석권하면서 동진(東進)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의 위험한 그림자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일종의 상위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켜야 하겠다는 다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사회당은 종래의 오스트로-마르크시즘에서 크게 후퇴하여 온건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고, 국민당 역시 종교와 밀착된 교조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사회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정당으로 환골탈태했다.

    1946년 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을 위한 조약체결을 둘러싸고 연합국 간의 접촉이 시작됐으나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바로 이 즈음 노(老)정객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 중립화안(案)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피력했다. 같은 해 10월,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새로운 정강을 발표하면서 중립화 방식을 지지했다. 국민당도 조심스럽게 중립화안을 선호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1948년 2월 이후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크게 술렁인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였고, 베를린 봉쇄 역시 연합국 협상 테이블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스탈린과 티토의 관계에도 금이 갔다.

    이러한 주변 상황에 오스트리아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숱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결국 ‘마셜플랜’에 참여하고, 서유럽의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구주 경제협력회의(OEEC)에 가입했다. 국토의 일부가 소련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단이었다. 바야흐로 냉전질서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이 나라가 이념적으로나 경제정책적 차원으로 볼 때 서방문화권에 속해 있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했다. 오스트리아가 추구하는 이념적 체제가치를 천명함으로써 소련의 지나친 욕심을 사전에 견제하고, 공산화 포기로 유도하고자 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화라는 우회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1955년 5월15일, 이 나라 국민의 숙원인 완전 독립을 성취했다. 1955년 6월7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영세중립을 선포한다. 급기야 소련은 오스트리아의 ‘서구화’를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중립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레너는 1950년 1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모든 협약의 어머니’

    콕은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1973∼86), 하원의원 및 노동당대표(1986∼89), 부총리 겸 재무장관(1989∼94), 총리(1994∼2002)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을 창출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왔으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 국제적인 경기침체, 사회보장비 급증으로 인한 낮은 성장률, 재정적자의 누적, 실업률의 급증 등으로 이른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을 앓아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982년 11월24일, 각각 노동조합총연맹과 경영자단체연합을 대표하는 콕과 반 베인(Chris Van Vaen)이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Wassenar Agree-ment)’을 체결했다. 노사는 임금안정과 노동시간 단축의 교환을 통해 경제회생과 고용창출에 합의했다. ‘모든 협약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 바세나르 협약의 성공은 노사갈등으로 인한 그간의 지리한 정책 교착상태를 일시에 깨는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노조 지도자들이 고용창출을 위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데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이 협약과정을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주인공이 바로 빔 콕 위원장이다.

    바세나르 협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1985년까지 임금의 물가연동제가 거의 폐기됐고, 실질임금도 1982∼85년에 9% 하락하면서 수출가격 경쟁력이 회복됐다. 1983∼84년 대부분의 업종별 교섭에서 주당 근로시간을 38시간으로 단축했고, 일자리 나누기가 수용됐다.

    제3기 루버스(Ruud Lubbers) 내각(1989∼94)은 기독교민주당과 노동당의 연립내각으로, 빔 콕이 부총리 겸 재무부장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91년 여름 루버스 내각은 장애보험과 질병휴직에 따른 수당의 지급수준을 축소하고 수혜기준을 강화하는 일련의 복지개혁 정책을 발표했다.

    복지국가 감축을 겨냥한 이 개혁의 필요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었으나, 개혁정책의 실행에는 엄청난 정치적 위험이 예견됐다. 그해 9월17일 헤이그에서 발생한 총파업에는 100만명에 달하는 근로자가 가두시위에 참여,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사태를 기록했다. 특히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던 노동조합총연맹(FNV)과의 견해차이로 심각한 분열을 야기했고, 노총의 노동당 지지도는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당원의 3분의 1이 당을 떠났다. 빔 콕 당수도 거의 사퇴할 위기에 처했다.

    1994년 5월 총선에서 103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던 기민당과 노동당 연립은 32개의 의석을 상실해 총 150석 중 71석을 내줬다. 노동당은 12개, 기민당은 20개의 의석을 잃었다. 기민당이 의석을 더 많이 잃었기 때문에 노동당이 원내 제 1당이 되고, 이렇게 해서 빔 콕의 제1기 내각이 출범한다.

    체제개혁을 위한 모험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볼 때 루버스-콕 연립정부는 복지 축소라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권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영국의 정치학자 피어슨(P. Pierson)의 말을 빌리면, 복지 축소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불확실한 이득을 얻기 위해 특정 유권자 계층에게 유형의 손실을 부여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정책’이다. 정치적 계산을 앞세우면 누구도 감행할 수 없는 정치적 모험이다. 그런데 루버스-콕스 연립정부는 체제개혁을 위해 이 모험에 앞장선 것이다.

    1994년 총선 결과에 따라 네덜란드 정치역사상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콕 총리가 이끄는 새 내각은 노동당(적색)과 자유당(청색), 그리고 중도파인 민주당이 참여하는 이른바 ‘자주색’ 연립(‘Purple’ coalition)으로 구성됐다. 네덜란드 정치사상 언제나 적대관계에 있던 노동당과 자유당이 민주당과 한배를 타고,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기민당이 배제된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새로 출범한 콕 총리의 ‘자주색’ 연립은 정치적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개혁작업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계속 매진했다. 첫째는 효율성을 강화하고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적 유인제도와 제한적인 경쟁체제를 복지부문에 도입한 것이다. 둘째는 복지체제의 집행과 관리에 참여하는 다양한 집단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 정부가 과감한 재조정 작업을 추진했다.

    콕 내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서 경제를 활성화해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는 데 주력했다. 고용증가의 핵심은 파트타임 노동과 파견근로제로서, 네덜란드는 총고용 대비 파트타임 노동의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그는 아울러 정부의 주 역할은 파트타임 노동자의 불이익을 제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렇게 해서 1995년의 유연안정성 협약 및 1999년 유연안정성(flexicurity) 관련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기간제 고용 규제가 완화되고, 비정규노동에 대한 최저선 임금보장, 파견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강화됐다. 빔 콕은 1998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역시 자유당, 민주당과 더불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2002년까지 제2기 콕 내각을 이끈다.

    1990년대 루버스 내각과 콕 내각에 의해 단행된 대규모 사회복지 체제의 대개혁은 더 이상 수혜자의 수나 수혜기준 및 자격요건에만 국한된 미시적이거나 중범위 차원의 개혁이 아니었다. 이 개혁은 시장의 공급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도입하고, 강제 사회보험 영역에도 경쟁을 도입한 것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사회보장 역사상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온 유관단체에 의한 자율적 집행 및 관리 원칙에도 재조정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사회적 파트너들과 협의

    빔 콕은 이 개혁의 전 과정을 같이했다. 복지 확대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노동당으로서 복지 축소의 체제개혁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모험이었으나, 콕은 정파의 이익을 뛰어넘어 공공성의 차원에서 체제개혁의 기수가 됐다. 또 이 과정에서 중도통합의 철학 아래 노사정(勞使政)의 사회협약을 주도하고, 기민당·자유당·민주당 등 다양한 이념적 색채의 정치세력과 연립하여 협력정치의 모범을 보였다.

    빔 콕이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네덜란드 경제는 상승가도를 달렸고, 그는 이른바 ‘폴더 모형(Polder Model)’의 대명사가 됐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에서 찾는다. 그는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 없이도, 의회에서 다수표만 확보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충분히 단행할 수 있다’는 식의 정부 태도가 일을 그르친다고 힘주어 말한다.

    빔 콕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함께 떠오르는 루버스(Luud Lubbers)는 바세나르 협약 당시 기민당 내각의 총리였다. 그런가 하면 1982년부터 1994년까지 3기에 걸쳐 장장 12년간 총리직을 맡았다. 네덜란드 역사상 최장기간이다. 그는 바세나르 협약 이후 공무원 임금과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등 긴축정책을 펼쳐 재임 중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10.1%에서 3.8%로 끌어내렸다. 무엇보다 그는 제3기 내각(1989∼94) 당시 부총리인 콕과 더불어 복지축소의 대개혁을 수행했다.

    루버스는 정치적 수사(修辭)보다는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협상의 대가’라는 점에서 콕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콕과 루버스의 인생행로는 대조적이다. 중도우익인 루버스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으로 34세에 경제장관을 지낸 데 반해, 중도좌익인 콕은 노동운동에 정열적으로 투신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35세에 네덜란드 최대 노동단체인 ‘네덜란드 노동조합총연맹(FNV)’의 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과정에서 네덜란드 모형을 설계하는 데 힘을 합했다.

    베버리지, 레너, 그리고 콕, 이들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가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그들은 중도통합적 관점에서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전략을 가졌고, 그것을 다른 정파나 국민이 신뢰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들은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또한 관념적이기보다 문제해결적이었고, 실사구시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에 놀라운 결단과 용기를 선 보였고, 공공선을 위해 사리(私利)와 당략(黨略)을 초월했다.

    이들이 설계한 거시적 체제모형이나 전략, 접근방식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옮겨올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이 그 시대와 상황적 맥락이 빚어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성공적 체제개혁이 한결같이 ‘중도정치’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경쟁과 협력의 균형잡기

    필자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8월까지, 그리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두 번에 걸쳐 약 2년8개월 동안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그렇다면 중도개혁론자를 자처해온 필자가 추구한 정책지향은 무엇이었는가. 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추구됐는가.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필자의 기본적인 견해는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친 신자유주의 편향이나, 과도한 평등주의적 접근도 경계한다. 양자의 균형과 조합을 꾀해야 한다. 아울러 장기적 조망에서 교육발전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며, 교육문제 해결은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국회 교육위원회에는 약 반수의 ‘386 전사(戰士)’들과 또 다른 반수의 ‘신자유주의 기수(旗手)’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중도주의자인 필자가 그 가운데서 중도개혁을 지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절대고독을 반추할 때가 많았다.

    ‘문민정부’가 1995년에 발표한 ‘5·31 교육개혁방안’은 대체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개혁 패러다임이 내세운 자율화, 수요자 중심, 다양화, 특성화, 경쟁, 선택 등의 개념이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상징어들이다. 문민정부가 추진했던 교육개혁 패러다임 형성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흐름은 민주화였다. 자유와 자율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 사조는 참여와 자치를 강조하는 민주화의 흐름에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세계화와 민주화 지향의 프로그램 중에서 세 가지를 중시했다. 그것은 교육정보화와 초등학교 영어 도입,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 제도다.

    문민정부의 대통령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교육개혁 과제들은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경쟁력 강화에 치중한 느낌이었다. 협력과 공존능력 내지는 인간화를 제고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전체 균형을 위해 필자는 재임시 이른바 ‘교육복지 종합대책’을 개발했다. 중도탈락자대책, 특수교육, 유아교육, 학습부진아, 귀국자녀 대책 등이 그것인데,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자, 그리고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이후 대안학교운동으로 발전, 10년이 지난 오늘 비교적 큰 결실을 보고 있다.

    중도적 관점은 21세기를 ‘경쟁과 협력’의 세기로 보고, 지나치게 경쟁에 치우친 교육개혁방안을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보정하고 균형을 잡아보려 노력했던 것이다.

    고교평준화 논란 해법

    교육개혁을 위한 접근은 대체로 세 가지가 두드러진다. 본질주의적 접근, 경제주의적 접근, 그리고 평등주의적 접근이 그것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은 교육의 본령(本領), 즉 그 본연의 목적을 강조한다. 지적 능력이나 학력의 신장보다 오히려 인성의 함양, 인격적 성숙을 더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경제주의적 접근은 시장주의의 관점에서 경쟁력 강화와 엘리트 교육에 역점을 둔다. 한편 평등주의적 접근은 좀더 대중적 관점에서 교육기회의 평등과 뒤처진 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한다.

    많은 이가 심정적으로 본질주의적 접근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에 동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사(修辭)적 차원에 그치고, 정작 논란이 빚어지면 이념적으로 치우쳐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로 갈리는 경우가 많다. 언뜻 보기에 교육은 가치중립적인 영역처럼 보이나 이 영역만큼 첨예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부문도 없다. 따라서 고교평준화, 이른바 3불(不)정책(기여입학제·고교등급제·본고사 금지), 교육개방, 사립학교법 등 대부분의 교육쟁점을 둘러싸고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는 정면으로 격돌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교육개혁이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면, 해답은 이 세 가지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간의 적절한 조화와 조합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육단계마다 이 세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배열해, 전체적으로 최상의 교육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슬기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아 및 초등학교의 경우 본질주의적 접근을 우선해야 하며,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접근이 가능할까. 고교평준화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념 지향성이 강한 평등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순수 형태로) 고수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이념편향적 경제주의자들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교조적 망집(妄執)이지,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정책적 접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평준화는 보완,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준화의 틀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의 다수가 아직도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틀을 일거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더욱이 경제주의자들이 언필칭 주장하듯이, 평준화 이후 우리 중등교육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실증적 논거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평준화 해제’라는 혁명적인 꿈은 일단 접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평준화의 틀과 그 내용을 그대로 갖고 갈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평준화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수준별 이동수업,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교육프로그램의 다양화, 특목고 등의 운영개선, 실업계 특성화,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이 주요 보완책이다. 말하자면,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 위에 수월성 구조를 효과적으로 접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2004년 4월 출범한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도 경쟁력과 평등성을 함께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나라가 앞장서 수준별로 최고급의 ‘수능과외’를 실시함으로써 고교생들의 전반적 학력신장과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하려는 목적과 함께, 교육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서울 강남에 못지않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려는 교육격차 해소의 뜻이 함께 담겨 있다.

    핀란드에서 배우자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등교육과정에서 경제주의나 평등주의 어느 한 가지 접근법을 택하는 건 무리가 있다. 따라서 양자의 장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또 이렇게 접근할 경우, 대부분의 교육쟁점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재론해보자. 경제주의자는 엘리트 중심 교육을 주창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뒤진 계급의 교육기회 제고에 온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주장엔 반대한다. 여기에 대답은 한 가지다. 어렵지만 두 가지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재를 세계적인 재목으로 키우고, 능력이 조금 뒤지는 학생도 그 수준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성껏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도 키우고 사회통합도 달성한다. 멀리, 크게 보면 사회통합은 국가 경쟁력의 가장 큰 원천이다.

    세계에서 이것을 제일 잘하는 나라가 핀란드다. 이 나라는 영재교육도 열심히 하고, 학습부진아 대책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다. 추호의 인력 유실도 허용하지 않는다. 500만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교육관은, 나라 안의 모든 인력이 사회에서 제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교육성과는 실로 괄목할 만하다. OECD의 학업성취도 국제교육 비교연구(PISA) 결과에 따르면, 고교 1년생의 학업성취 수준이 세계 1위다. 이 나라의 대표적 글로벌 기업인 ‘노키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디지털 휴대전화 제조회사로 성장한 이유도 이 나라 교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교육과 관련한 이념적 갈등을 불식하자.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향해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을 함께 궁리하자. 그 길만이 살길이고, 또 성숙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필자는 2003년 말, 교육부총리로 취임하자마자 서둘러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마련했는데, 그 핵심 사업은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였다. 필자는 2004년 초 “올해는 e-러닝의 해”라고 선포했다. 2004년 4월1일.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e-러닝 준비도를 갖춘 우리나라는 10만명 이상이 동영상에 동시 접속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대규모 교육정보화 사업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했다. 이로써 e-러닝 대중화가 촉발됐다.

    2004년 초에는 그간 금기시되어왔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 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면 그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와 교원연수체제를 함께 개혁할 채비를 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며 따라서 가능한 한 함께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계획으로는 2005년 1월 어느 때쯤, 그 해를 ‘교원개혁의 해’라고 선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앞서 부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입시개혁과 사회협약

    e-러닝 발전과 교원평가는 우리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이념적 편향성이 없는 이 두 사업은 한국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2008학년도 이후 입시개혁은 공교육강화를 위해 내신 성적을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수능의 비중을 낮추었다. 그러다보니 몇몇 이른바 일류 대학이 변별력을 이유로 방향타를 논술 강화 쪽으로 돌리고 있어 많은 사람이 사교육의 폭발적 증가를 우려한다.

    이 점은 이미 2004년 말, 2008학년도 이후 입시개혁안을 발표할 당시 예견됐다. 그래서 입시안 발표시 이 문제의 적절한 조율을 위해 고등학교와 대학교 간의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고교와 대학 이외에 학부모, 시민사회단체, 교육부가 함께 참여하는 ‘교육발전협의회’를 창설했다. 고교와 대학 간에 대화의 통로가 없으면, 우수학생의 선발에 관심이 큰 대학과 그보다는 고교교육의 정상화에 집착하는 고교들 간에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협의체를 구성해 당사자들의 깊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일종의 ‘사회협약’식 문제해결이 이뤄지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난 2년간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협의체를 가동하지 않았다.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의 논술 파동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최근 대교협 등이 나서서 고교와 대학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공동의 문제해결을 추진하고 있는 점이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형성과 사회협약의 체결은 실제로 중도개혁자들이 선호하는 중도통합 전략이다.

    그렇다면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 양극화 현상이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는 해방전후사를 비롯해 분단 이후 오늘까지의 한국 정치사에 점철된 온갖 갈등과 다툼, 좌절과 아픔이 깊숙이 배어 있으리라 본다. 지면상 그 역사를 되돌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우선 ▲우리 사회 내에 기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사회적 합의 형성을 위한 제도나 관행이 정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적 행위자들 간에 합의 형성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을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역사를 되돌아보자. 1989년 소련 및 동유럽에서 현실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하던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이와 재야 세력이 급진적 좌파 변혁사상과 주체사상에 열광했고, 이들 중 다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극복을 겨냥했다. 역사의 폭발적 시점에서 ‘세계의 시계’와 ‘한국의 시계’가 극명하게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으면, 정치적 다툼은 ‘체제-반체제’의 험악한 투쟁으로, 총체적 전면전으로 변하고, 생산적 정책논쟁은 실종된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서나 그 사회의 ‘체제가치’에 대한 내면화가 요구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체제가치는 ‘다원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이념논쟁을 촉발하는 몇 가지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사회가치, 예컨대 통일이나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체제의 근간을 흔들지 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질서다. 따라서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우리 사회의 기본적 체제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 선거경쟁, 대의제도, 복수정당체제 등을 근간으로 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제도를 뜻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 틀 안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사민주의 정부가 출현할 것인가는 정치과정에서 국민이 선택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시장경제의 개념은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미식 자본주의만이 자유시장경제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주주뿐만 아니라 투자자로서 은행, 협력업체, 근로자의 이해관계자가 기업지배구조의 일익을 담당하고, 노사정의 사회적 합의가 경제·노동·사회정책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럽의 많은 나라도 자유시장경제의 일원이다.

    이렇듯 체제 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폭넓게 이해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틀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현실사회주의나 북한 주체사상에 대한 망집을 가진 정치세력이 있다면 마땅히 반체제세력으로 배격돼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어떤 통일인가’를 묻지 않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체로 통일, 민족, 자주 등의 상징을 앞세우며 통일이 모든 가치에 초월하는 선차적 가치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자주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으로 편을 가르고, 친북과 반미를 진보성의 징표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통일과 민족화해, 협력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우리의 체제가치가 보장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통일이나 통일방안에는 합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한국의 최소한의 안보기반을 무장해제하려는 시도나, 민족의 이름으로 북한체제를 과도하게 미화·정당화하고 미국을 외세로 무조건 배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체제가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전폭적 지지나 무조건적 반대는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세계화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아준거적으로 세계화에 슬기롭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화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회로 활용하되, 세계표준(global standards)과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조화시키고, 세계화의 과실이 많은 사람에게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한국이 세계화의 흐름에 더욱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에 하나가, 준비가 덜된 채 금융을 개방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현안이 되고 있는 한미 FTA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도 문제지만, FTA만 이뤄지면 외적 충격으로 인해 당장 경쟁력이 제고될 것이라고 보는 지나친 낙관론도 금물이다. 결국 FTA의 성과는 국내 제도개혁을 통해 우리 사회가 경쟁력을 확보할 때 극대화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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