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이 보수 이미지를 갖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두 사람은 김용갑(金容甲·71) 의원과 정형근(鄭亨根·62) 의원이다. 그런데 정 의원은 최근 대북 유화 발언으로 ‘전향’을 시도 중이다. 이제 ‘김용갑’이라는 이름 석자는, 수구보수의 ‘유일 아이콘’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언뜻 한나라당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김용갑 의원을 극구 감싸는 한나라당 내부 분위기다. 강재섭 대표는 김 의원 대신 벌을 받겠다고 나설 정도다. 김용갑에게 ‘구시대적 미련’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신비한 매력’이 있어서일까.
2004년 2월27일 저녁. 국회 기자실로 한나라당 김문수 공천심사위원장이 들어섰다. 17대 공천정국에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던 그의 얼굴 위로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번쩍였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남 밀양·창녕 단수 후보로 김용갑 후보가 최종 확정됐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개혁공천을 한다더니 어떻게 된 거냐’는 비아냥 섞인 분위기가 확실히 감지됐다. 당시 출입기자들에게 한나라당의 김용갑 공천 여부는 개혁공천 여부를 가늠할 시금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를 자를 수만 있다면 한나라당의 개혁성을 인정해주마. 그런데 다른 인사 수십 명을 자르고도 그를 자르지 못한다면 인정 못한다.’ 적지 않은 한나라당 당직자도 이런 잣대를 갖고 있었다. 늘 자신감 있던 김문수 위원장이었지만 이날은 그렇지 못했다. 말꼬리가 늘어졌다.
“김용갑 의원의 극단적 이미지 때문에 당에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결국 공천심사위원들의 투표 끝에 공천을 주기로 결정했다. 소장파들의 낙천 요구에 공천심사위원들이 역으로 흔들린 것 같기도 하다.”
‘제거대상 1호’의 놀라운 생명력
▼ # 장면 2
2006년 11월27일 오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어서 기자들이 수군대며 국회 2층 당 대표실로 모여들었다. 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김용갑 의원 등 징계회부 의원들에 대한 일벌백계 대신 제가 당 대표로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윤리위에 간곡히 요청한다.”
김용갑 의원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통일부 국정감사장에서 “광주 해방구”라는 발언을 했다. 전후문맥과는 상관없이 ‘광주’라는 민감한 지역이 ‘해방구’라는 색깔론적 어휘와 함께 김 의원의 입을 통해 거론되면서 문제가 됐다.
김 의원은 2006년 10월25일 치러진 창녕군수 선거에선 당이 공천한 후보 대신 무소속 후보를 지원했다. 당 공천심사위가 김 의원이 민 후보를 탈락시키자 그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김 의원은 그를 지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보가 결국 승리했다.
이 두 ‘죄목’으로 김 의원은 윤리위에 회부됐다. 김 의원은 한나라당의 첫 외부영입 윤리위원장인 인명진 목사와 맞닥뜨렸다. 인 위원장은 김 의원에 대한 징계를 다짐했다. 두 사람 간에 날카로운 설전이 벌어졌다. 양측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를 즈음 강 대표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2년9개월 사이에 벌어진 두 장면은 김용갑 의원이 한나라당 안에서 차지하는 묘한 위상을 웅변한다. 그는 공천 때마다 소장파 등 당내 개혁 블록으로부터 ‘잘려야 할 0순위’로 꼽혔다. “때만 되면 색깔 발언으로 한나라당에 수구 꼴통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문제인물”이라는 비판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결국 그를 내치지 못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는 철저히 ‘보호’ 받았다. 왜 한나라당은 김용갑을 못 버릴까.
‘급조된 상징’이 아니다
그는 한나라당 구성원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반공, 보수, 우익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은 단기간에 급조된 것이 아니다. 그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시대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전두환 정부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튀었고, 순발력이 있었다. 특히 민정수석 시절엔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종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될 일인데도 그는 현장을 찾았다.
1986년 신민당에서 개헌 주장이 터져 나왔다. 이때도 그는 개헌 추진위 현판식 현장에 점퍼 차림으로 달려갔다. 1987년 6월10일 민주화 항쟁 때 그는 명동성당의 농성장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최루탄을 뒤집어쓰면서 수집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래서 끌어낸 것이 이른바 ‘직선제 수용’이다. 다음은 그가 1999년 쓴 자서전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의 한 대목이다.
“나는 그날 명동을 거쳐 종로의 시위 현장으로 나갔다. 그 이튿날 아침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농성장인 명동성당에 직접 들어가보기도 하였다. 중산층까지도 반정부 운동에 적극 가담할 기세였다.… 6월18일 9시20분, 나는 비로소 대통령에게 보고할 시간을 얻었다.…
나의 보고 요지는 직선제 수용만이 유일한 살길이요,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 앞이라 할지라도 물불 가리지 않고 소신껏 할 말을 다할 수 있었다. 내 보고는 40분가량 계속되었다. 그 보고를 다 듣고 나서 대통령이 말했다. ‘맞았어. 좋아! 즉각 노태우 대표에게 보고해. 특별히 내가 지시해서 보고한다고 설명해.’”
17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5·6공 용퇴론’이 제기됐다. 그러자 그는 “나는 5·6공 때의 내 역할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해 당 안팎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총무처 장관 시절, 그는 인기 있는 장관이었다. 공무원 처우 개선에 앞장섰고 출근부를 없앴고 원탁회의를 도입했다. 부하 직원들의 평가는 ‘유연하고 기발한 장관’이었다고 한다. ‘민속의 날’로 불리던 ‘설날’을 부활시킨 것도 그였다. ‘와이셔츠 차림 회의’ 도입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장관이었다.
다스베이더 가면을 쓴 제다
장관 김용갑을 유명하게 한 것은 이런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민정당은 1987년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패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만들어졌다. 사회 전반에서 민주화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이 즈음을 “좌경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된 시기”로 규정했다.
그는 1988년 8월 기자회견을 자청, “현재 여소야대 구조로는 좌경화를 막기 불가능하고 우리나라가 월남식 공산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때문에 국회로 불려가 야당 의원들로부터 추궁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느냐”고 맞받는다. 그는 이후 ‘우익의 기수’ ‘대변자’를 자처했다. ‘뿔 달린 장관’ ‘소신장관’ ‘강성장관’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일까.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의 기사가 다스베이더의 가면을 쓰게 되듯, ‘6·29의 제안자’는 이때부터 ‘극우의 탈’을 쓰게 된 다. 1989년 3월 김용갑은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장관직을 내던진다. 파격적인 마무리였다. 그는 스스로 몸을 던짐으로써 우익은 물론 중도, 진보세력에게도 꽤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자서전에서 설명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나는 중간평가를 통해 사회 전반에 팽배한 좌경세력 척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하려는 정부와 공산주의를 꿈꾸는 불순세력들에 대해 국민의 판단을 물어야 하고, 그런 만큼 당연히 승리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정치권은 중간평가 문제를 어물어물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국무위원으로서 나는 참을 수 없었다. 3월14일 사표를 썼고, 점심을 먹으면서 박명제 비서관과 함께 사퇴 성명서 문안을 작성하는 한편, 차관과 기획실장에게 사퇴의 뜻을 밝히고 총리실로 갔다.”
그는 기자실로 내려와 “국가를 좌경화의 위험에서 구출하라”는 요지의 사퇴 성명서를 읽고서 잠적했다. 전무후무한 ‘돌출행동’이었다. 야당에선 ‘극우적 발상의 소유자’라는 비난논평이 쏟아졌다.
이날의 퇴장과 함께 그는 언론의 관심에서는 일단 비켜나게 됐다. 그는 ‘민주개혁 범국민 운동협의회’라는 보수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1992년 총선 때 무소속으로 서울 서초구에서 출마했지만 민자당 김덕룡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김용갑 의원은 1996년 총선에선 고향 밀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96년 5월24일자 ‘동아일보’ 보도를 보자.
2004년 9월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용갑 의원이 기자들에게 국가보안법 반대 플래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노동당 2중대’의 카타르시스
그는 국회에 입성하면서 “안보 하나만큼은 확실히 챙기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 내에서 그는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대표가 됐다.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가 대표를 맡는 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주춧돌은 바로 ‘김용갑은 할 말은 한다’라는 소신 이미지였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눈치보고 두려워서 못하지만 나는 한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2000년 11월 재선(再選)의 김 의원은 국회 본회의 통일 외교 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H의원이 김 의원의 의원회관 방을 찾았다.
“형님, 형님이 한마디 해주소. 이거 그냥 보고 있어야 합니까?”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뒤 남북은 급속히 유화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6·15공동선언이 채택됐다. 보수진영의 위기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K의원과 또 다른 K의원도 김 의원을 찾아왔다.
“한마디 안 하고 뭐하십니까.”
“당신들은 왜 안 해?”
“우리는 해봐야 먹혀들지를 않아요.”
“그럼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어?”
“…”
김 의원은 그때 택시 기사들이 하는 얘기가 떠올랐다고 했다. 대정부 질문 당일 오전 김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가필한 원고를 H의원에게 보여주면서 물었다.
“이 정도면 되겠나?”
“맞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표현을 어떻게 생각해냈습니까.”
H의원은 연신 박수를 쳐댔다.
발언대에 선 김 의원은 천천히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민주당은 정강정책까지 바꿔가면서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보안법 개정이 가져올 상황에 대한 염려나 고민은 전혀 없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에 급급하다. 이런 식의 개정 추진은 결국 김정일이 자신의 통일전선 전략을 남한 내에서 구현하는 데 집권당이 앞장서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당초 원고에 없던 가필 부분에 ‘힘’을 주어 읽어내려갔다.
“이러니 사회 일각에서 ‘민주당이 조선노동당 2중대’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것이다.”
본회의장이 시끄러워졌다. “뭐야” “미친 사람 아냐” “사과해”….
김 의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여당은 대북정책에서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만 정신을 차리라”라는 말까지 끝내고서야 연단을 내려왔다.
한국사회의 이념전(戰) 역사에 길이 남을 발언인 ‘조선노동당 2중대’ 발언이 터져 나온 과정이다. 이 발언은 격렬한 색깔론 공방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로 침울해 있던 보수진영에는 엄청난 ‘카타르시스’였다. DJ의 집권과 남북 유화국면을 지켜보던 보수의 울분을 확 터뜨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발언은 부작용도 낳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김용갑’에게 중독되어 갔다. 이들은 더한 자극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김 의원의 발언 수위는 이후 더욱 높아졌다. 그에게는 ‘한국의 매카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17대 공천 작업 때 김 의원은 ‘5·6공 용퇴론’ ‘60대 용퇴론’ 등 각종 용퇴론에 모두 이름을 올린 상징적 타깃이었다. 한 소장파 의원은 “김용갑 의원이 공천을 받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당당했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공천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이렇게 들이댔다.
“김용갑 죽으면 다음은 내 차례”
“남한의 보수세력을 죽이려는 북한이 1번 타깃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분 나쁘다’고 불출마를 선언하면 김정일을 돕는 것이다. 출마를 강행하는 것은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 즈음 당 중진 의원 10여 명이 여의도 한 식당에 모였다. 소장파들의 용퇴 요구에 대한 조직적 대응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어린놈들이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성토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때 방송 카메라가 들이닥쳤다. 화들짝 놀란 중진 의원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중진 의원들은 ‘찍혀봐야 좋을 것 없다’며 마이크를 갖다 대는 기자에게 손사래부터 쳤다. 그때 김용갑 의원이 “내가 인터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젊은 의원들이 예의가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60대 용퇴론’과 ‘5·6공 용퇴론’을 주장하는 소장파들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거침없었다. 당시 ‘개혁’ 쪽으로 ‘추’가 확 기운 분위기여서 움츠러들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김 의원은 그날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려고 도망쳤던 의원들은 모두 공천에서 탈락했어. 당당하게 맞부딪쳐야 해.”
다음은 당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A씨의 얘기다.
“김용갑 의원의 공천은 사실 당 지도부가 전력을 다해 관철시켰다고 봐야 한다. 최병렬 당시 대표가 공천심사위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공천을 부탁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용갑 의원이었다. 정형근보다 김용갑을 더 적극적으로 챙겼다. 김 의원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었다. 김 의원이 날아가면 최병렬 대표 본인도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공천심사위원으로 있던 안강민, 이문열씨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김용갑 의원이 극우의 최전선이기 때문에 김 의원의 죽음은 곧 보수진영 전선이 중도 쪽으로 크게 밀린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한나라당의 보수파 의원들에게는 퇴출공포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뉴라이트도 ‘김용갑’이라는 개혁대상이 있어야 자신의 참신한 보수 이미지가 더욱 돋보이기 때문에 ‘김용갑’과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된다. 바로 이것이 한나라당과 보수가 김용갑 의원을 버리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인 셈이다.
또 다른 공천심사위원 B씨의 전언.
“김 의원을 무소속으로 대입해서 여론조사를 해보면 김 의원은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현역 의원을 무소속으로 대입하면 웬만한 곳에서는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김 의원의 지역구 장악력은 대단했다. 어쩔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종합하자면 김 의원이 가지는 한나라당 내 상징성, 그리고 지역구 장악력이 김 의원을 다시금 공천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다.
비우발적, 정기적 이슈화
“그는 대북편집증 환자일 뿐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김 의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근거는 이렇다.
“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격렬한 반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4년 2월 김 의원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비준 동의안을 결사반대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지역구가 농촌이다보니 농민 처지를 대변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 그런데 실제로 FTA를 해보니 영향이 미미하더라. 그때는 하면 농촌이 망할 줄 알았다. 그건 (내 잘못을) 인정한다. 내가 농촌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의원이란 게 두 가지다. 지역도 대변해야 한다.”
김 의원의 세 아들 병역 문제도 논란거리다. 장남은 간염으로, 셋째아들은 기흉(氣胸)으로 군대에 가지 않았다. 둘째는 시력 때문에 방위로 군 복무를 마쳤다. 그는 “참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고 했다.
“(중학교 3학년인) 손자에게 ‘반드시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공부를 썩 잘하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김 의원과 상임위를 같이 해온 열린우리당 Q 의원의 평가는 이렇다.
“그의 문제 발언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나온다. 참여정부가 친북 세력이란 발언도 절대 우발적이지 않다. 정기적, 지속적으로 안보 문제를 이슈화해서 본인의 존재를 알려 나간다. 연례행사처럼 한다.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될수록 지역에서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것을 잘 안다.”
어쨌든 정치공학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한국 나이 71세. 한나라당에서 이상득 의원 다음으로 나이가 많지만 그는 찬반의 논란 한가운데에 자신을 자리매김할 줄 안다.
“계산만 하고 말 못하는 보수를 위해”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겠지만 나를 추종하는 쪽은 나에 대해 열렬하다. 조선일보 인터넷,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라.”
그는 또한 타이밍을 잘 맞춘다. “순발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조홍규 전 의원)이란 평가가 틀린 말이 아니다. 드라마 ‘주몽’이 뜨자 ‘세작’ 발언을 하는 식이다. 17대 공천에서 유흥수가 용퇴하고, 하순봉, 김기배가 나가떨어졌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최근 당 윤리위에 회부되자 그는 “좌파의 칼이 보수의 목을 겨냥하고 있다”며 인명진 위원장을 물고 늘어졌다. 그는 또 성공했다.
“계산된 과장과 대북편집증, 김용갑의 최대 적은 김정일이 아닌 무관심.” 한나라당 한 의원의 말은 그를 꿰뚫는 분석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강성 발언을 하면 정치생명이 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계산만 하고 할 말은 못한다. 보수란 게 남이 해주길 바라고 자기는 안 한다. 나는 18대에는 출마하지 않는다. 어차피 1년만 남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김용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