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허무와 절망 넘어선 ‘극기적 긍정’의 미학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7-01-08 1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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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미국 문단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을 투영했다는 ‘모비딕’.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이스마엘은 떠오르는 국제도시 뉴베드퍼드를 지나 고래잡이의 발상지 낸터키트로 들어간다. 벼랑 끝까지 몰린 삶에서 벗어나고자 마침내 고래잡이배에 몸을 실은 이스마엘. 삶과 죽음, 세속과 천상, 광기와 이성은 어느새 무한의 바닷속으로 소용돌이친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미국 포경업의 발상지 낸터키트 항 전경.

    작가의 삶으로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1819~91)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한 경우가 또 있을까. 오늘날 그는 너새니얼 호손, 마크 트웨인과 더불어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1891년 세상을 떠날 당시 신문의 부음 기사에 이름이 오기(誤記)되어 나올 정도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작가였다.

    멜빌은 처녀작, ‘타이피’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행운 속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후 10여 편의 소설을 써내는 동안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 급기야 소설을 출간해줄 출판사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전락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그의 나이 25세에서 35세에 이르는 불과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자신의 소설이 더 이상 독서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멜빌은 인생의 절정기인 30대 중반에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만다. 그 후 뉴욕의 세관에 취직해 20여 년을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그렇게 망각의 늪에 파묻혀 있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멜빌 문학은 극적으로 ‘재발견’된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을 우연히 접한 몇몇 문인의 상찬에 힘입어 그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그 관심은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조를 통해 전후의 환멸을 극복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감수성과 조응되면서 널리 확산됐다.

    1921년 레이먼드 위버가 쓴 그의 첫 전기, ‘허먼 멜빌: 뱃사람 그리고 신비주의자’가 출판될 무렵 영미 문학계에서 멜빌과 모비딕에 대한 관심은 이미 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조됐고, 그것은 이내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라는 문학사적 재평가로 이어졌다. 소설가로서 멜빌의 이런 극적인 부활은 그가 사망한 후 30년 만에, 그가 소설 쓰기를 그만둔 시점으로 본다면 실로 6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도 드라마틱했다. 멜빌은 뉴욕의 유서 깊은 명문가 후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때 이른 죽음으로 그는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한 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찍부터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아 전전했다. 당시로서는 힘들고 위험해 누구나 기피하는 선원 생활에 뛰어든 것도 이런 절박한 상황 탓이었다.



    ‘모비딕’의 첫 장에서 화자 이스마엘은 실의와 좌절에 지친 나머지 그의 영혼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동짓달’ 같은 상황에서 권총으로 자결하는 대신 마지막 대안으로 고랫배를 타기로 작정했다고 적고 있다. 멜빌 또한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1840년 1월 초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고랫배에 승선, 장장 3년 10개월이 걸릴 고래잡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절박한 대안으로 선택한 여정이었으나 그것은 멜빌에게는 삶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그 지평을 넓힌, 그리하여 소설가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는 고래잡이 편력을 통해 낯선 이방의 문화를 호흡하며 감수성을 한층 예리하게 닦고, 그 낯선 세계와의 대비를 통해 자신이 떠나온 사회를 보다 투철하게 이해하는 비평안(眼)을 키울 수 있었다. 고래잡이 선원으로서의 태평양 편력은 멜빌에겐, 그의 소설적 분신인 이스마엘의 표현 그대로, ‘예일대학이요 하버드대학’이었던 셈이다.

    ‘모비딕’은 멜빌의 이와 같은 고래잡이 체험을 집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용해해 삶에 대한 원숙한 비전으로 빚어내는 뛰어난 기량을 과시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작가를 오랜 망각에서 구해내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멜빌은 기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작을 쓰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서 모비딕을 썼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

    그의 자부심 그대로 ‘모비딕’은 이제 미국 소설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사유의 깊이와 광활한 상상력의 한 정점을 표상하는 대작으로서 세계문학의 판테온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영국의 소설가 서머싯 몸은 ‘모비딕’을 세계 10대 소설의 하나로 꼽은 바 있고, 최근에는 모리스 블랑쇼, 호르헤 보르헤스, 질 들뢰즈와 같은 사색가들 또한 ‘모비딕’을 길잡이로 하여 그들 자신의 독특한 사색의 지평을 열어 보였다.

    모비딕, 그 극적인 재발견

    멜빌과 ‘모비딕’의 자취를 찾는 여정은 나에겐 언제나 각별한 설렘을 동반했다. 한때 온 시간을 바쳐 씨름하던 학위 논문의 대상이었기에 내 젊은 날의 잔영이 늘 앞장을 서곤 했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서쪽 피츠필드의 생가에서도, 뉴욕 이스트 26번가 104번지, 멜빌이 숨을 거둔 옛 집터에서도, 브롱스의 우드론 묘지의 멜빌 무덤에서도, 그의 모습을 불러내고자 하면 거의 언제나 그의 소설과 힘겨운 대화를 나누던 시절의 내 영상이 겹쳐졌다.

    예컨대 이 글을 준비하기 위해 그가 ‘모비딕’을 쓰던 무렵의 행장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1850년 12월13일자, 뉴욕의 편집자 에버트 다익킹크(Evert Duyckinck)에게 보낸 그의 편지 속 다음의 구절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여기 시골에서 바다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마치 대서양 상의 배에서 현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듯이 밖을 내다봅니다. 이곳 내 방은 배의 선실 같습니다. 밤중에 잠이 깨기라도 하면 삐걱이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집에 돛을 너무 많이 달았다고 상상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지붕 위로 올라가 굴뚝에 색구를 쳐야겠다고 생각하지요.

    멜빌은 ‘모비딕’을 쓰면서 이렇게 고래잡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거기에 몰입해 살고 있었다. 그해 추수감사절에는 식구들을 모두 보스턴 처가로 보내고 피츠필드에 일부러 혼자 남아서 원고를 쓰기도 했다. 그는 머리에 솟구치는 생각과 이미지들이 언어로 형상화되기 전에 사라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나서 늘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다익킹크에게 이렇게 써보내기도 했다.

    “나에게 쉬운 문체로 글을 잘 쓰는 50여 명의 젊은이를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수의 작품을 계획하고 있지만 그것을 따로따로 생각해볼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가 없군요.”

    멜빌은 이렇게 2년여를 오로지 모비딕에 매달려 쓰고 또 썼다. 멜빌 덕분에 나 또한 이 순수한 열정의 시간들을 음미할 행운을 누렸기에 이런 구절들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이다.

    ‘모비딕’ 첫머리의 무대이자 19세기 세계 포경업의 중심지였던 뉴베드퍼드와 낸터키트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은 2006년 7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방학 중 한 달여 체류하던 케임브리지 생활을 마감하는 기념여행이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어문학과에서 공부하는 Y양, 어학연수를 온 P양이 길동무를 자청해 동행했다. 케임브리지의 렌터카 업소에서 빌린 차를 타고 우리는 보스턴을 경유해 곧장 남쪽으로 달렸다.

    순례자 청교도들이 세운 도시 플리머스를 지나 15분쯤 달리니 곧 뉴베드퍼드이다. 보스턴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이다. 전에도 이곳을 두서너 번 찾은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오후 늦은 시각이어서 유명한 ‘고래잡이 박물관(The Whaling Museum)’과 ‘모비딕’에 소개된 ‘뱃사람들의 교회(Seamen’s Bethel)’ 내부를 보지 못해서 늘 아쉬움이 남아 있던 차였다.

    이 두 건물과 바로 지척에 있는 항구 일대가 ‘국립 뉴베드퍼드 고래잡이 사적 공원(New Bedford Whaling 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토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우리는 교회와 박물관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서 포석이 깔려 한층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거리 이곳저곳을 걸었다. 나는 이내 초라한 봇짐을 겨드랑이에 끼고 거리 저편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듯한 이스마엘의 환영과 마주쳤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뉴베드퍼드에 있는 고래잡이 박물관.

    추방자, 방랑자, 아웃사이더

    이스마엘은 누구인가. 그는 24만 단어에 이르는 이 방대한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다. ‘모비딕’은 곧, 스물한 살 난 이 젊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모비딕’은 간단히 말해서 피쿼드라는 고랫배에 승선, 태평양으로 출어했다가 ‘모비딕’이라 불리는 거대한 흰고래에 받쳐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그것을 포획하고자 하는 광기 어린 집념에 사로잡힌 선장을 비롯해, 다른 모든 동료 선원들이 사망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스스로 이스마엘이라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한 젊은이의 체험담이다.

    달리 말해 이스마엘은 홀로 살아남아서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세상에 전하는 전형적인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이스마엘은 가령 그런 양식의 하나인 ‘천일야화’ 화자 셰헤라자데처럼 이야기의 뒷전에 물러나 있는 화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끊임없이 그것을 분석하고 논평하고 종합해 자신의 이야기로 변용한다.

    물론 소설의 전경을 차지하는 것은 카리스마적인 선장 아합과 흰고래 모비딕의 대결 드라마이다. 그래서 ‘모비딕’의 주인공으로 흔히 아합이나 흰고래 모비딕을 지목해왔다. 그러나 이질적 경험과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통어하는 의식으로서 이스마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평자도 적지 않다. 이들은 이런 점에서 소설의 진정한 중심은 아합이나 모비딕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한다.

    왜 이스마엘인가. 멜빌은 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화자에게 성경에서 따온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했을까.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서자이다. 본처 사라의 박해를 피해 그는 어머니 하갈과 함께 집을 떠나 각지를 방랑한다. 그는 추방자요 방랑자이며 아웃사이더이다.

    소설 속의 이스마엘 역시 계모 밑에서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난 인물이다. 그에겐 가정도 어머니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웃사이더로서 절망적인 소외감에서 선택한 여정이기에 이스마엘은 피쿼드호의 선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현실을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렵고 위험스러운 것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바라보게 된다.

    삶과 죽음, 세속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광기와 이성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자세, 이것이 험난한 고래잡이 여정에 나선 젊은 이스마엘의 삶에 대한 태도요 소설가 멜빌이 스스로 다짐한 마음가짐이었다.

    10시가 되자 ‘뱃사람들의 교회’와 박물관의 문이 열렸다. 우리는 먼저 교회를 둘러보기로 했다. 늙수그레한 관리인이 반갑게 맞아준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스마엘이 이튿날 아침, 거리를 구경하고 맨 먼저 찾은 곳도 바로 이곳이다. 멜빌은 인도양이나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고래잡이 선원들 중 마음이 울적한 사람은 대부분 일요일 이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 바닷길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고래잡이들의 교회(Whaleman’s Chapel)’라 한다.

    1층의 로비에는 교회의 연혁과 주요 활동상을 담은 화보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붙임성 좋은 관리인은 안내책자를 건네며 교회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교회가 처음 세워진 것은 1832년. 당시 고래잡이로 번창하던 뉴베드퍼드 항에 드나드는 5000여 선원을 교화하기 위해 뉴베드퍼드 항구협회가 주동이 되어 모금한 기금으로 세운 것이다.

    모비딕의 혼을 담은 교회

    멜빌 생전에 이미 ‘모비딕’으로 친숙해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40년 멜빌이 방문했던 교회는 지금의 모습은 아니었다. 1866년에 불이 나고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2층 본당의 설교단을 모비딕에 묘사된 대로 배의 앞머리 모양으로 개조한 것.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 것이다. 그밖에 지붕에 탑을 세워 교회다운 모습으로 밖을 치장하고 이층 본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안에 설치해 편리함도 도모했다.

    2층의 본당은 소박하고 아담했다. 선수 모양의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열된 네댓 줄의 좌석이 전부이다. 교회는 오늘날에도 예배를 보고 있으나, 매월 셋째 일요일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축일에만 한정되어 있고, 주말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모비딕’ 초판의 표지.

    왼편 끝줄의 좌석 가장자리 벽면에 ‘허먼 멜빌의 자리(Herman Melville’s pew)’라는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회는 그렇게 그가 이곳을 방문한 자취를 남겨 후인들의 호기심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벽면에 새겨진,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비명이다. 바다에 수장되어 사체를 찾을 길이 없는 선원들의 유족들은 지상의 무덤 대신 이곳 교회당의 벽면에 묘비명을 새겨 상실의 허망함을 달랬다. 이스마엘은 ‘교회’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7장에서 그들의 심사를 이렇게 대신 전한다.

    아아 망자를 푸른 땅에 모신 사람들이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꽃밭 속에 잠들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황량한 추억을 알 수 있겠는가. 한 줌의 유골도 거기에 없는, 저 검은 테 속의 대리석이 주는 가슴을 치는 공허감! 움직이지 않는 저 묘비명들이 상기시키는 절망감! 모든 신앙심을 무화시키는 저 글귀들 속에 스며 있는 공포 어린 허무감과 불신의 마음. 그것은 무덤도 없이 죽어간 이 귀속할 곳 없는 사람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모비딕’ 전체에서 이보다 절절한 문장을 나는 찾지 못한다. 갓 20대에 들어선 젊은이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절규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온몸으로 느껴본 자가 아니고서는 토로할 수 없는 외침이다. 삶의 한가운데로 짓쳐들어와 모든 것을 부질없는 환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싸늘한 부동의 침묵. 이것이 또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3일 동안 아합과 모비딕의 대결을 지켜보던 바다는 한순간에 고랫배 피쿼드 호도, 그것을 지휘한 선장도, 그의 불 같은 원한과 집념도, 모두 거대한 동심원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겨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다. 바다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한 무한경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그 위로 바닷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간다. 홀로 살아남은 이스마엘은 관을 부표 삼아 그 광막함 속을 이틀 동안 헤매다 극적으로 구조된다.

    죽음은 이렇게 모비딕의 시종(始終)을 감싼다. 그러나 소설을 떠받치는 힘은 그 허무와 절망을 넘어선 극기적 긍정,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초탈의 미학이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앞길에도 검은 명판의 주인공들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에 잠시 침울해지지만 이내 그것을 떨치고 평상심으로 돌아간다.

    이스마엘은 청춘의 나이이지만 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다. 그는 이미 엄혹한 삶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하고 그로부터 밀려난 국외자로서 새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을 닮은 화자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한 또 다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회당을 나와서 우리는 한 블록 아래의 항구로 걸음을 옮겼다. 수호신인 양 트라이턴 상이 항구의 초입을 지키고 있다. 부두는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오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뉴베드퍼드의 현재 인구는 약 10만. 오늘날에도 대서양 연안의 고기잡이, 특히 가리비 조개잡이의 중심지로서 많은 어선이 이곳을 모항(母港)으로 삼는다.

    뉴잉글랜드 부유층이 즐겨 찾는 여름 휴양지 마사스 빈야드(Martha’s Vineyard)와 엘리자베스 섬의 커티헝크(Cuttyhunk)로 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소설이 전하는 바, 19세기 중엽 세계 포경업의 중심지로서 뉴베드퍼드 항이 누렸던 활기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이야기’

    소설 속에서 이스마엘이 고랫배를 타기 위해 고향인 뉴욕 맨해튼을 떠나 뉴베드퍼드에 도착한 것은 12월의 어느 토요일 밤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자 하지 않는다. 고래잡이의 명예와 영광을 증언하는 소설의 화자답게 이스마엘은 미국 포경업의 발상지인 낸터키트에서 그의 이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힘들고 고달픈 고래잡이에 나서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대개의 경우 이 뉴베드퍼드에서 발을 멈추고 배를 골라잡아 출항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낸터키트에서 떠나는 배가 아니면 결코 타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섬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떠들썩하게 말해지는 것들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뉴베드퍼드가 서서히 포경업을 독점하여 낸터키트가 훨씬 뒤처지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죽은 고래를 처음으로 건져낸 낸터키트야말로 뉴베드퍼드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낸터키트에 있는 고래잡이 박물관.

    이스마엘은 이렇게 뉴베드퍼드를 경유하여 고래잡이의 발상지인 낸터키트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낸터키트행 연락선은 이미 출항한 뒤다. 다음 배는 월요일에나 떠난다. 이스마엘은 하는 수 없이 선창 근처의 여관을 찾아 유숙하기로 한다. 그러나 방이 없었다. 주인은 작살꾼과 더불어 한방을 쓸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낯모르는 작살꾼과 한 침대를 쓰기로 한다.

    침대를 나눠 쓸 동숙인은 놀랍게도 몸이 온통 문신투성이에다 흉악해 보이는 남태평양 코코보코 섬 출신의 사나이였다. 이라 불리는 이 작살꾼은 식인종으로 알려진 야만족 출신이지만, 그의 언행에는 문명의 위선과 속임수가 없이 정직 소박하면서 인간적인 위엄이 넘친다.

    이스마엘은 그와 더불어 있으면서 “이리 같은 세상과 싸우느라 상처난 가슴”이 푸근해지고 “몸이 녹아 흐르는” 느낌에 젖는다. 이스마엘은 곧 그를 “마음의 벗”으로 받아들이고, 둘은 의기투합해 함께 동승할 고랫배를 찾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미국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쌍이 탄생한다.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 두 사람이 맺는 돈독한 우정은 보통사람의 개인적 존엄성과 민주적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 이념에 비추어본다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 사회는 이 당연한 원리가 이념으로만 선양됐을 뿐 사회적 실천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따뜻한 우정은 인디언의 강제 이주와 학살 및 노예제로 얼룩진 당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우회적 비판인 것이다. 문학비평가 레슬리 피들러(Leslie A. Fiedler)는 ‘모비딕’을 미국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랑 이야기로 평한 바 있다.

    그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틀을 벗어나 정신의 갱생을 추구하는 모험 길에 나선 남성 주인공들이 낯선 황야에서 만난 인종적 타자와 맺는 독특한 동료애의 다른 이름이다. 이스마엘과 의 우정은 가령 페니모어 쿠퍼의 ‘가죽각반 이야기’의 주인공 내티 범포와 인디언 추장 칭카추국의 관계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의 핀과 흑인 짐의 동료애에서 변주되어 나타나는, 전범적인 것이다.

    뉴베드퍼드 부두에는 허름하긴 하지만 탐방객을 위한 방문자 센터(Waterfront Visitor Center)가 마련되어 있다. 방문자는 화보와 사진 혹은 컴퓨터 동영상으로 뉴베드퍼드의 옛 영화를 되돌아볼 수 있다. 뉴베드퍼드는 원래 플리머스 청교도들이 개척한 도시이다. 1650년 왐파노억 인디언으로부터 땅을 매입한 일단의 청교도들이 이곳 아퀴쉬네트 강 연안으로 이주하여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

    1750년대에 경뇌유(spermaceti)로 만든 양초가 그을음이 없고 냄새가 나지 않는 최상품이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미국은 수지맞는 원양 고래잡이에 적극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뉴베드퍼드는 이내 동부해안 포경선단의 기항지로 떠올랐다. 이미 1820년대에 이르러 낸터키트를 제친 뉴베드퍼드는 1840년대 철도 부설로 보스턴과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에 접근하기가 한층 용이해지면서 더욱 번성을 구가하게 된다.

    전성기에 전세계로 내보낸 700여 척의 미국 고랫배 중 80% 이상이 뉴베드퍼드 소속이었다. ‘모비딕’이 증언하는 대로 당시의 부두에는 고랫배가 즐비하게 정박해 있었고, 선창가에는 기름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출어에 나선 배를 위한 목수와 통장이들이 준비 작업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동부해안 제일의 ‘국제도시’

    당시 뉴베드퍼드의 모토는 ‘우리가 세상을 밝힌다(Lucem Diffundo)’였다. 선주들은 이런 자부심 속에서 포경업으로 이룬 부(富)로 도시를 꾸미고 대저택을 지었다. 멜빌은 “미국의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뉴베드퍼드처럼 호화로운 주택이 즐비하게 서 있고 훌륭한 공원과 정원이 갖추어진 곳은 없다”고 썼다. 이 남태평양에서 가져온 해골바가지를 팔 수 있을 정도로 교역과 상업이 활기를 띠던 뉴베드퍼드는 또한 동부해안 제일의 국제도시였다.

    거리에서 버몬트나 뉴햄프셔 주에서 온 시골뜨기는 물론 폴리네시아의 피지, 통가, 에로망가, 브리기어 출신의 이방인들을 쉽사리 볼 수 있었고, 이들이 몰고 온 서로 다른 습속과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이국풍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모비딕’에서 고래잡이 선원들이 다니는 교회로 묘사된 ‘뱃사람들의 교회’.

    국제도시로서 뉴베드퍼드의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는 이곳을 또한 남부에서 탈출한 도피 노예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다. 뉴베드퍼드는 남북전쟁 전, 탈주노예의 도피를 돕는 지하조직(Underground Railroad)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유명한 흑인 지도자인 프레드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역시 자유를 찾아 남부 볼티모어를 탈출한 후 이곳에 정착해 3년을 지내면서 노예제 폐지운동의 연사로 나섰다.

    항구를 둘러본 후 우리는 다시 선원들의 교회 맞은편에 있는 포경 박물관을 찾았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경 박물관이라는 평판에 걸맞게, 작살을 비롯한 각종 포경 장비, 포경선, 항해일지, 포경에 관한 역사적 자료, 거대한 고래뼈, 스크림쇼(scrimshaw), 포경을 소재로 한 그림 등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각종 섹스턴, 사분의, 망원경까지 수집해놓은 박물관의 수집 열정이 놀랍다. 그 가운데에서 원래 크기의 반으로 줄여 전시해놓은 포경선 ‘라고다(Lagoda) 호’는 특히 눈길을 끌었다. 갑판에 가마솥까지 갖춘 전형적인 미국의 고랫배여서 고래를 잡아 기름으로 정제하는 전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실 미국이 세계 포경업을 선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붙잡은 고래를 곧장 기름으로 정제하는 일관 공정을 배 안에 구축한 덕분이다. 이 공정의 핵심이 화덕 아래에 물탱크를 설치해서 열기가 갑판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고안한 가마솥이다. 보통 앞 돛대와 큰 돛대의 중간 부분의 제일 넓은 갑판에 설치된 가마솥은 평시에는 승강구와 같은 뚜껑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고래는 지육(blubber)이 온몸을 모포처럼 덮고 있다. 체온을 유지할 필요성에서이다. 그 두께는 고래의 종류에 따라 다르고 또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얇게는 2인치에서 두텁게는 2피트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 흰 섬유질의 지육을 가열하면 기름이 분리되어 나온다. 고래를 잡으면 우선 지육을 여러 가지 크기로 떠내고 그것을 다시 책장만큼 작은 크기로 균일하게 자른다.

    ‘성경의 책장’이라 하는 이 작은 지육 덩이가 준비되면 가마솥에 불을 지펴 정유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화덕에 장작으로 불을 지펴 가마솥을 달구는데, 일단 불이 붙으면 그 다음부터는 지육의 부스러기를 주연료로 쓴다. 정제 과정은 말하자면 고래 스스로가 연료를 공급하여 자신의 몸을 태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살꾼들은 펄펄 끓는 솥 안에 지육 덩이를 쉴 새 없이 집어넣는다. 지육이 얇으면 얇을수록 정제 작업이 쉽고 기름의 질도 좋아지기 때문에 얇은 지육이 선호된다. 이렇게 끓여진 기름은 구리로 된 냉각기에 부어두었다가 어느 정도 식으면 6배럴들이의 통에 채워져서 선창 밑에 보관된다.

    포경업은 19세기 미국의 성장 엔진

    지육을 정제해서 기름을 얻는 것이 보통이지만, 고래의 머리 부분에서 왁스와 같은 투명한 경뇌유를 직접 채취하기도 한다. 경뇌유로 만든 양초는 그을음과 냄새가 없어 값이 특히 비쌌다. 고래는 통상 40~60t의 무게가 나가는데, 고래 몸무게 1t 당 평균 1배럴(37.5갤런)의 기름을 채취할 수 있었으니 한 마리의 고래에서 40~60배럴의 기름이 나왔던 셈이다. 미국의 포경선은 대략 1600배럴의 기름을 채워야 만선으로 인정됐다고 하니 한 번 출어에 나서면 40~50마리의 고래를 잡아야 목표치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고래 기름은 석유가 발견되기 전에는 등불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원료였다. 고래 기름은 또한 비누와 화장품의 원료로, 또 각종 윤활유로 쓰였다. 고래뼈는 여성 치마의 버팀살대로 애용되기도 했다. 기실 ‘모비딕’을 읽는 데 망각해서 안 될 점의 하나는 포경업이 한때 미국의 중요한 산업이었다는 사실이다.

    멜빌이 고랫배를 타고 남태평양을 순회한 1840년대 후반부터 ‘모비딕’을 발표한 1851년까지 미국의 포경업은 황금기였다. 1830년대에 이미 포경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이 시기에 보유한 고랫배는 무려 700척에 달했다.

    ‘모비딕’ 24장에는 뉴베드퍼드 출신의 하원의원 그리넬(Joseph Grinnell)이 1844년 의회에 보고한 고래잡이 현황이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미국 포경업자의 수는 세계 다른 나라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아서, 700척 이상의 배에 1만8000명의 선원이 일하는 대선단을 전세계에 내보낸다. 고래잡이 연간 비용은 400만달러, 미국이 보유한 고랫배의 전체 값어치는 2000만달러에 달하는데 이들이 매년 700만달러에 달하는 기름과 지육을 생산한다.”

    고래잡이는 이처럼 19세기 중엽 미국사회에서 단순한 어업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미국이 신흥 산업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성장 동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비딕’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적 소설이기에 앞서 19세기 미국의 경제 현실을 증언하는 산업소설인 것이다.

    ‘모비딕’의 두터운 의미층은 장장 3년 10개월에 걸친 작가 자신의 남태평양 고래잡이 편력,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생에 대한 심오한 성찰,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물적 토대로서 고래잡이 현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빚어낸 결과이다.

    포경 박물관을 나오니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우리는 이스마엘의 행적을 좇아 낸터키트로 가기 위해 케이프 캇 해안가에 위치한 항구 햐니스로 차를 돌렸다. 이스마엘은 이곳 뉴베드퍼드에서 우편선을 타고 낸터키트로 건너갔으나, 오늘날에는 케이프 캇 해안과 낸터키트를 오가는 정기항로를 이용해 손쉽게 갈 수 있다.

    휴가철이고 게다가 주말이라서 케이프 캇으로 들어가는 6번 도로는 차량으로 붐볐다. 평소 같으면 3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2시간 가까이 걸려 햐니스에 도착, 가까스로 예약한 페리 보트에 승선할 수 있었다. 여름철에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다섯 차례 쾌속선이 햐니스와 낸터키트를 오간다. 햐니스에서 낸터키트까지는 약 30마일, 소요 시간은 쾌속선으로는 1시간, 차량까지 운반하는 큰 배의 경우는 2시간 15분이 걸린다.

    우리를 태운 배는 햐니스 항을 빠져나와 대서양의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내달린다. 아스라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니 배를 놓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비로소 가라앉는다. 널따란 선창 너머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하얀 요트들이 시원스레 눈에 들어왔다. 선실 내의 스낵바에서 산 샌드위치로 시장기를 때우고 나니 어느새 낸터키트다.

    낸터키트는 웜파노악 인디언 말로 ‘먼 땅(farway land)’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먼 땅이 오늘날에는 불과 한 시간 거리로 단축되었다. 낸터키트는 몸체를 뺀 물고기의 머리 형상이다. 양쪽으로 기다랗게 늘어진 지형이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어 자연스레 안쪽으로 항구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내항 입구에 긴 사주가 뻗쳐 있어 접항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고래잡이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빼앗겼다.

    오늘날 낸터키트에 상주하는 인구는 약 1만명이다. 그러나 여름이면 5만명 이상의 휴가객이 이곳을 찾는다. 고래잡이 시원지로서의 명성을 뒤로하고 이제 낸터키트는 뉴잉글랜드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1869년, 마지막 포경선이 떠나다

    ‘모비딕’에는 낸터키트에 얽힌 인디언 전설이 하나 소개되어 있다. 옛날에 독수리 한 마리가 뉴잉글랜드 해안가에 내려앉아 아기를 채어가지고 날아갔다. 인디언 부모는 아기를 찾기 위해 독수리가 날아간 방향으로 통나무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갔다. 이윽고 부모는 외딴 섬을 발견하고 해안가에 떠돌고 있는 상아 상자를 찾아냈으나, 아기는 이미 죽고 해골만 남아 있었다.

    인디언들이 드문드문 살고 있는 이곳에 백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700년 초이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뉴잉글랜드 청교도들로부터 핍박받던 퀘이커 교도였다. 이렇게 몰려든 퀘이커 교도들이 포구 근처에 정착해 살면서 이를 중심으로 자연스레 도시가 형성됐다. 퀘이커 교도들은 물과 모래뿐인 이 척박한 섬에서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원양어업에 나섰는데, 고래잡이도 그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다.

    낸터키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래잡이에 나선 것은 1710년경부터이다. 그 이전인 1672년에 낸터키트 주민들이 연안에 떠밀려온 고래를 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17세기 초까지는 연안 포경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영국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북극으로 진출해 대규모로 고래를 잡기 시작하면서 원양 포경업이 활기를 띠었고, 이어 1750년대에 경뇌유로 만든 양초가 품질이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고래잡이는 수지맞는 산업으로 더 한층 각광을 받게 되었다.

    미국 포경선이 붙잡은 고래를 항구로 끌고 오는 대신 선상에서 곧바로 정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낸터키트 소속의 포경선은 1715년에는 6척에 불과했으나, 1719년에는 그 수가 25척으로 늘고, 50년 뒤인 1766년에는 118척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 포경 산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렇게 포경선이 늘어나고 배가 대형화하면서 수로가 좁은 낸터키트 포구의 접안이 큰 문제로 대두되자, 인근의 뉴베드퍼드 항으로 발길을 돌리는 배가 늘어났고, 마침내 1820년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주도권을 뉴베드퍼드에 뺏기고 만다.

    전성 시절의 낸터키트는 뉴잉글랜드에서 보스턴과 세일럼 다음으로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나 고래잡이의 중심이 뉴베드퍼드로 옮겨가면서 낸터키트도 곧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6년 대화재가 발생해 포구 인근의 수많은 건물이 불타고 수백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면서 낸터키트는 급격히 쇠퇴한다.

    캘리포니아의 금광 발견 또한 쇠락을 부채질했다. 시류를 좇아 섬을 빠져나가 서부로 달려가는 젊은이가 많아지면서 인구도 줄어들었다. 한때 1만명을 상회하던 낸터키트의 인구는 1870년에 이르러 4000명으로 감소하고 만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포경업은 직격탄을 맞는다. 기록에 따르면 낸터키트에서 마지막 고랫배가 출항한 것은 1869년. 그 배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배에서 내려 포구를 뒤로하고 시내로 들어서니 휴양지 특유의 분위기가 거리를 채우고 있다. 스낵바, 아이스크림 집, 초콜릿 파는 가게, 자전거 대여점, 기념품 가게, 고가구점, 화랑 등이 연이어 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 대다수가 가벼운 반바지 차림이다. 포경업의 퇴조와 더불어 쇠락을 거듭하던 낸터키트가 여름 휴양지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880년경부터이다. 여름을 나기 위해 뉴잉글랜드는 물론 뉴욕에서도 사람들이 건너왔다. 20세기 초 뉴욕에서 활동하는 일단의 연극배우들이 섬의 동쪽 스콘셋(Siasconset) 해안에 여름 별장을 지으면서 특히 예술가들에게 인기 있는 휴가 장소가 됐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시내 초입에 있는 고래박물관에 들렀다. 낸터키트의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사진 자료들이 전시된 회랑을 지나 박물관의 내부로 들어서니 몸체의 길이가 47피트나 되는 향유고래의 뼈가 실내를 압도한다. 뉴베드퍼드의 고래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이곳에도 고래를 추적하는 보트, 작살을 비롯한 고래잡이 도구, 기름통, 스크림쇼 조각품, 이름을 날렸던 고랫배의 선장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포경업의 메카로서 낸터키트의 족적은 이제 이 박물관에서나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실내의 전시물들을 모두 구경하고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서니 낸터키트 항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육지가 하나 되는 향연

    박물관을 나와 시내 중심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심가에는 인도는 물론 차도에도 작은 포석이 깔려 있다. 길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화랑, 고가구점, 각종 기념품가게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소박한 교회들의 모습이다. 섬을 개척한 퀘이커 교도들이 남긴 신앙의 자취이리라.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소통, 곧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중시하던 이들에게 크고 화려한 건물은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흑인 저항운동의 아버지인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1841년 이곳 퀘이커 교도들의 집회에서 본격적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연사로서 나선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비인간적인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바로 퀘이커 교도들이었다. 1688년 펜실베이니아의 메노나이트파(派) 퀘이커 교도들은 노예무역과 노예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상치되는 것임을 지적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서방 세계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한 첫 공개적 선언이다.

    나는 프레드릭 더글러스가 노예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열변을 토했다는 낸터키트 애시니엄(Nantucket Athenaeum)을 찾았다.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흰색의 장중한 희랍식 건물이었다. 지금은 낸터키트 공공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도서관은 책을 빌리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이 피서지에서 독서로 망중한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영상 이미지가 압도하는 인터넷 시대에 아직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면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도서관이 독서실로 변한 지 오래인 우리의 사정과 대비가 되어 씁쓸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윈도쇼핑을 잠시 즐긴 후 우리는 동쪽 스콘셋 해안가로 나가보기로 했다. 시내에서 해안의 곳곳을 오가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편리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벗어나니 제법 널찍한 풀밭이 펼쳐져 있고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거센 바람 탓으로 나무들의 키는 대체로 낮다. 해안이 가까워지면서 헐벗은 모래벌판이 눈에 많이 띈다.

    원래 낸터키트 섬은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모래벌판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멜빌은 ‘모비딕’에서 풀이 한 포기만 있더라도 오아시스라고 말할 수 있고 하루 종일 걷는 동안 풀을 세 포기 발견하면 대초원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곳의 집들은 거의가 비슷한 모양이다. 경사면이 급한 지붕을 얹은 소박한 목조 건물이 주종을 이루는데, 대부분이 잿빛의 세다나무 껍질로 지붕과 외벽을 장식해 단색조의 인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일찍이 포르투갈 어부들이 개척했다는 스콘셋 해안가의 집들도 예외는 아니다. 집 앞을 상록의 관목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벽을 푸른 아이비가 두른 집들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하나, 대부분이 우중충한 잿빛의 외양이다.

    버스에서 내려 몇 채의 집을 지나니 바로 해안가이다. 해안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모래밭이다. 낸터키트는 모래밭과 물가만 있을 뿐이라고 적고 있는 소설 속의 표현이 실감난다. 55마일에 이르는 해안 전체가 이런 모래밭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 널따란 해안을 모래장난하는 아이 둘과 그 옆에서 책을 읽는 할아버지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신문수

    1952년 출생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 학회 부회장

    저서 :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관광객으로 흥청거리는 도심과 너무나 딴판으로 버려져 있는 듯한 해안가의 이 한가로움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모래밭의 한쪽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우리는 바다와 육지가 서로 만나 한몸을 이루는 향연의 한가운데에 초대되어 있는 하객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그 무한경 속에서 나는 거추장스러운 몸이 육탈되어 작은 모래알로 무화되는 환각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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