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문화의 변용과 가공의 현장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 민병훈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중앙아시아사 bhmin@museum.go.kr

    입력2007-01-15 18: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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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변용과 가공의 현장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중앙아시아학회 엮음/ 사계절/283쪽/ 1만5000원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광활한 아시아에 병존하는 다양한 문화권, 즉 많은 이가 아시아의 탁월한 대표주자로 인식하는 동아시아 문화권 이외에 독립된 역사세계로서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해온 북아시아의 유목세계나 서아시아 문화권, 그리고 남아시아 문화권이, 각각의 역사와 문화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변 문화권과의 유기적인 문화교류 현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학술적 아칭(雅稱)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실크로드라는 학술용어는 그 자체가 문화교류의 여러 루트나 교역의 부산물로서의 모호한 문화교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명멸한 여러 문화권 사이의 복잡다양한 문화교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변용(變容) 현상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이번에 간행된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는 아시아 지역사 연구 모임인 중앙아시아학회가 2005년 가을에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의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1993년에 발족한 중앙아시아학회는 그동안 역사학을 비롯해 고고미술사학, 언어학, 복식학, 음악학, 음식학 등 다방면의 학자가 참여해 공통 관심사에 대한 학제적(學際的) 연구를 수행해왔다.

    실크로드의 역사적 현장성 확인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실크로드 각지에서 전개된 주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를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적 현장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수많은 논저를 통해 ‘실크로드 학자’로 익히 알려진 정수일은 ‘실크로드의 개념과 그 확대’에서, 실크로드를 유라시아 대륙에 한정된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신대륙’까지 포함하는 환지구로(環地球路)로서 그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예일대 교수 밸러리 핸슨(Valerie Hansen)은 ‘실크로드 무역이 한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에서, 소위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隊商)무역이 지역사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실크로드의 요충이자 중국문화와 중앙아시아 문화가 만나는 지점인 투르판 오아시스의 아스타나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문서를 분석해 실크로드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당대(唐代)에조차 투르판 지역 주민 대부분은 실크로드 무역에 종사하기보다 토지 경작에 생계의 근거를 뒀으며, 실크로드 무역은 투르판 지역 경제에 별 중요한 구실을 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원주대 교수 김용문은 ‘신 출토자료에 나타난 소그드 복식’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벽화, 소그드인의 고도(古都)로 알려진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 벽화에 나타난 인물의 복식을 비롯해, 근년의 괄목할 만한 발굴 성과의 하나로 여겨지는 중국 내 소그드인 묘지의 부조(浮彫)에 나타난 인물 군상의 복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중국 신장(新疆) 문물고고연구소의 위즈융(于志勇) 부소장은 고대 서역의 대표적인 오아시스이자 실크로드의 교통요지 누란과 영반에서 출토된 상장의례(喪葬儀禮)를 위한 작은 옷 ‘명의’의 형태와 기능 그리고 성격에 대하여 논했다.

    일본 오사카대 교수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는 ‘당대(唐代) 불교적 세계지리와 호(胡)의 실태’에서, 일본에 전래되어 현존하는 범한사전(梵漢辭典)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번한대조동양지도(蕃漢對照東洋地圖)’에 나타난 지명 등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초당(初唐)부터 중당(中唐) 말엽에 이르기까지 한어(漢語) ‘호국(胡國)’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한 서아시아 세계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호(胡)’라고 함은 소그드인이나 소그드어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사 관련 논문인 서울대 이주형 교수의 ‘간다라 미술과 경전상의 자료’는 간다라 고행상(苦行像)을 중심으로 불교경전과 불교회화와의 상관관계를 주도면밀하게 풀어냈다. 일본 도쿄 농업대 교수 야마베 노부요시(山部能宜)의 ‘중앙아시아 불교의 관상(觀想) 수행’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등 여러 경전의 내용과 투르판 오아시스에 조영된 토육 석굴사원의 벽화를 비교분석해 한역 선경(禪經)과 회화가 지역 수행자들의 구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신대 이평래 교수는 ‘16세기 말 이후 몽골 불교의 확산과 전개’에서, 몽골의 불교사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을 시도하고, 몽골에서 샤머니즘을 비롯한 전통신앙과 관습이 불교체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몽골의 새로운 민족종교로 대두했음을 밝혔다.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에 게재된 여덟 편의 논문은 모두 최신의 발굴성과와 이를 토대로 한 치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한 수작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근년에 학계와 일반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실크로드의 국제상인 소그드인과 그 문화에 대한 연구결과, 그리고 밸러리 핸슨 교수가 지적한 실크로드의 무역 기능이 실크로드 지역주민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라고 하겠다.

    소그드 문화의 실체

    근년에 중국의 간쑤성, 닝샤회족자치구, 산시(陝西)성, 산시(山西)성 등 각지에서 잇달아 출토되고 있는 소그드 관련 발굴성과는 구 소련시대에 행해진 파미르 이서의 중앙아시아 지방의 발굴성과와 더불어 소그드 문화의 실체를 밝히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소그드인은 실크로드의 움직임이 절정에 달한 중국 당대를 중심으로 실크로드의 요충에 집단 거주지를 이뤄 국제무역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무역 이익을 독점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한국문화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관련 논문이 향후 이 분야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와 소개의 기폭제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

    밸러리 핸슨 교수의 주장은 이미 과거에도 일본 교토대 마노 에이지(間野英二)에 의해 제창되어 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신(新) 실크로드론(論)’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의 특정 지역사회나 경제의 성격에 대하여 잔존하는 문서를 통해 이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지만, 과연 이러한 문서가 어떻게 남게 됐는지 그리고 어떤 성격을 띠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잔존 문서는 당시 사회의 일정한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일상적인 무역형태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것이 보통이다. 밸러리 교수도 지적하듯, 투르판 출토문서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의 소그드인들이 국제무역에서 크게 활약했다고 추정하지만, 현존하는 다량의 소그드어 문서 대부분은 종교문서를 중심으로 한 단편에 지나지 않아 소그드어 문서를 통한 그들의 국제무역 활약상을 재구성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당시의 실크로드 무역 기능이 미미했다거나 실크로드 무역이 오아시스의 성쇠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주장은 너무나 성급한 것이다.

    베제클릭을 비롯한 투르판의 석굴사원 조성과 운영은 벽화에 공양자의 모습 등으로 남아 있는 소그드 상인들이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를 종교시설에 환원했기에 가능했으며, 부유한 무역인인 소그드인의 모습을 다양한 형태의 인형으로 만들어 묘실에 납입함으로써 죽은 자가 저승에서도 항상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학제적 연구의 성과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고찰함에 있어 한문사료를 비롯한 여러 토착사료가 그 큰 줄기를 이루는 뼈대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발굴되는 고고미술자료는 그 사회와 문화를 재구성할 수 있는 근육과 살이다.

    한국의 중앙아시아학 자체는 구미(歐美)나 이웃 일본에 비해 1세기가량 늦게 시작됐지만, 한 주제를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조명하는 소위 학제적 연구의 성과로 인해 국제 학술계에서도 뚜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중앙아시아학회만이 가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모든 분야에 대해 관심 있는 애호가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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