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복창의 흥망성쇠를‘김복천’이라는 가명으로 기술한 ‘삼천리’1929년 7월호의 ‘백만장자가 몰락한 신화’와 인천의 미두취인소(작은 사진).
인천에서 출발한 임시급행열차가 경성역에 도착하자, 이번엔 대기하고 있던 수십대의 자동차가 하객을 맞았다. 당시 서울 시내에 운행 중이던 자동차는 다 합쳐도 200여 대에 지나지 않았다. 인천에서 출발한 하객들은 신발에 흙 한 번 안 묻히고 결혼식이 열리는 장곡천정(長谷川町·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조선호텔 앞 태평통(태평로)의 풍경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화려한 결혼, 초라한 최후
‘미두왕’ 반복창과 ‘원동(원서동) 큰 재킷’ 김후동의 결혼식은 오전 11시30분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요시마쓰 인천부윤이 몸소 축사까지 낭독한 반복창의 결혼식은 유럽의 왕실 결혼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결혼식 당일 비용만 3만원(현재가치 30억원)에 달했다. 이날 반복창의 결혼식은 20여 년 후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호화 결혼식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김팔연 : “서울서 결혼식을 호화롭게 한 이가 누구일까?” 복혜숙 : “반복창일걸. 본명보다 반지로(潘次郞)라는 일본 이름이 더 유명하지요. 미두를 해서 30만원인가 하는 거금을 벌었는데 부자가 되고나서 처음 한 일이 큰집 짓고 좋은 색시 얻어서 장가든 것이었어요. 인천 해안에다가 아방궁 같은 큰집을 짓고 신부를 골랐는데 인천이 좁다고 서울에 올라와서 여학교를 죄다 뒤졌거든. 그중에서 경성여자고보에 다니는 김후동이란 처녀를 골랐다는구만. 김후동이가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원동 재킷’의 언니였지요. 나도 보았는데 얼굴이 그냥 꽃이에요. 참말 미인이거든.” 이서구 : “그렇지. 나도 보았는데 선녀 같았어요. 그 여자가 조선서 처음으로 치마 끄트머리에 수를 놓아 입었지. 그 여자가 시작이었어. 김후동은 바이올린도 잘했지. 반복창의 결혼식은 인천서 신사 다수를 초청해 조선호텔에서 거행했는데 인천부윤이 축사도 하고 떠들썩했었지.” (‘장안 재자가인, 영화와 흥망기’, ‘삼천리’ 1939년 1월호) |
1921년 5월, 조선 초유의 호화 결혼식을 올린 반복창은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10월 인천 송림리(송림동) 나무집 곁방에서 불혹의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반복창이 죽은 날은 마침 인천 미두시장이 문을 닫기 직전이어서 또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미두로 흥망성세를 다 맛본 풍운아 반복창이가 미두시장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사십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전 인천 경제력의 30%나 차지하던 조선취인소 인천미두부는 청산시장(淸算市場)으로서 앞으로 십여 일만 지나면 조종(弔鐘)을 울리게 된다. 인천에 미두시장이 생긴 이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미두왕으로 한때 그 이름을 떨친 반지로도 사십 평생을 미두시장과 떨어지지 못하더니 미두시장의 조종과 함께 지난 18일 오전 8시 세상을 떠났다. 반지로는 오십만원이란 거대한 돈을 미두시장의 방망이 소리 한 번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또 한 번의 방망이 소리에 오십만원은 간 곳이 없어지자 정신병에 걸려 이십년 동안이나 신음을 하면서도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고 며칠 전까지도 미두시장을 기웃거렸다. 반지로가 미두시장과 같이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와 미두시장과의 인연은 죽음까지도 함께하게 된 셈이다. (‘취인소와 함께 사라진 인천의 반지로’, ‘조선일보’ 1939년 10월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