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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홍콩 트랩

  • 백이호 / 일러스트·이승애

홍콩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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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특보와 함께한 1980년대 해외토목부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가 해외토목부 책임자로 있을 때 나는 그의 부하였다. 내가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와 캐나다 밴쿠버 교량 건설 현장의 소장으로 활동할 때는 숱한 즐거움을 함께했다. 페낭대교는 1982년에 착공해 1985년에 완공됐는데, 교량 길이가 14km나 되어 동양 최장의 교량으로서 유명세를 탔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에서 많은 이익도 챙겨 당시 이 공사의 현장소장이던 나 자신이나 토목부 본부장이던 김 특보는 회사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정주영 회장의 기쁨

밴쿠버 교량공사는 1986년에 착공하여 1988년에 완공됐는데, 큰 이익은 챙기지 못했으나 현대건설이 최초로 북미에 진출한 특수교량 공사로서 유명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의 선진국 진출 가능성을 확인하고 매우 기뻐했다.

다음 날인 2월1일, 홍콩 CT-9(컨테이너터미널 9의 약자) 현장에 첫 출근을 했다. 김 특보를 보자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려왔다. 차가운 느낌이 들 만큼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은 여전했으나, 장기간 출장생활의 고달픔과 현장의 어려움으로 많이 시달린 듯 초췌하고 피곤한 표정이 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분은 매우 반가워했다. 그러나 구차한 설명이나 당부의 말씀을 하지는 않았다.

“소신껏 잘 해보시오.”



짧은 한마디에 수만 가지의 설명과 당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현장 임시창고에서 소장취임식이 시작된 것은 오전 9시였다. 토목본부장의 소개가 있자 모여서 웅성대던 직원들이 대열을 정리하고 연단에 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백이호입니다.”

나는 한마디 던진 후에 입을 다물고 앞줄에 선 부장급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맞추어갔다.

최 부장, 박 부장, 변 부장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는 얼굴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긴장이 고조되는 듯했다. 부풀 대로 부풀어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을 깨고 나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모든 어려움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는 법입니다. 나는 지난 1970∼80년대에 현대건설에 근무하는 동안 크게 세 번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파푸아뉴기니, 사우디, 페낭 프로젝트에서 공사를 포기해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맞았지만 결국 해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따라서 이번 홍콩 프로젝트의 사정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낼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딱 한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즉 담당직원들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문제해결에 골똘해야 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꿈속에서도 오로지 해결방안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집중하는 여러분이 방해를 받지 않도록 나는 소장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을 지원하고 보호할 것입니다.

신뢰회복 운동

또 하나, 이 현장의 급선무는 그동안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본사, 지사, 하도급업자, 엔지니어, 발주처, 홍콩 관공서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 급한 일입니다. 이러한 상호신뢰 없이는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현재는 불신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 나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절단하고, 믿음의 고리로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본사 사장님 이하 관련 임원들로부터 약속을 받아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현장에 대해 불필요한 간섭을 일절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은 내가 할 것이며 본사와의 의견조율도 내가 직접 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본사의 각 부서에서 중구난방으로 수많은 보고서를 요구하는 등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잡무를 시켰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의 시간낭비는 물론이려니와 일관성이 없는 혼란스러운 보고서가 전달되어 현장은 의심을 받고 신뢰가 실추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잡겠습니다.

하도급업자에게 약속한 대금 지급기일을 절대 지킬 것입니다. 잦은 약속 불이행이 결국 하도급업자들의 신뢰를 좀먹게 했고 그 영향으로 그들은 더 비싼 견적을 제시하고 업무수행에도 열성을 내지 않게 되어 그 손해가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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