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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보수 ‘유일 아이콘’ 김용갑 연구

계산된 과장, 면밀한 타이밍… 그의 주적(主敵)은 대중의 무관심?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수구보수 ‘유일 아이콘’ 김용갑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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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된 상징’이 아니다

그는 한나라당 구성원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반공, 보수, 우익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은 단기간에 급조된 것이 아니다. 그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시대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전두환 정부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튀었고, 순발력이 있었다. 특히 민정수석 시절엔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종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될 일인데도 그는 현장을 찾았다.

1986년 신민당에서 개헌 주장이 터져 나왔다. 이때도 그는 개헌 추진위 현판식 현장에 점퍼 차림으로 달려갔다. 1987년 6월10일 민주화 항쟁 때 그는 명동성당의 농성장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최루탄을 뒤집어쓰면서 수집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래서 끌어낸 것이 이른바 ‘직선제 수용’이다. 다음은 그가 1999년 쓴 자서전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의 한 대목이다.

“나는 그날 명동을 거쳐 종로의 시위 현장으로 나갔다. 그 이튿날 아침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농성장인 명동성당에 직접 들어가보기도 하였다. 중산층까지도 반정부 운동에 적극 가담할 기세였다.… 6월18일 9시20분, 나는 비로소 대통령에게 보고할 시간을 얻었다.…



나의 보고 요지는 직선제 수용만이 유일한 살길이요,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 앞이라 할지라도 물불 가리지 않고 소신껏 할 말을 다할 수 있었다. 내 보고는 40분가량 계속되었다. 그 보고를 다 듣고 나서 대통령이 말했다. ‘맞았어. 좋아! 즉각 노태우 대표에게 보고해. 특별히 내가 지시해서 보고한다고 설명해.’”

17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5·6공 용퇴론’이 제기됐다. 그러자 그는 “나는 5·6공 때의 내 역할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해 당 안팎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총무처 장관 시절, 그는 인기 있는 장관이었다. 공무원 처우 개선에 앞장섰고 출근부를 없앴고 원탁회의를 도입했다. 부하 직원들의 평가는 ‘유연하고 기발한 장관’이었다고 한다. ‘민속의 날’로 불리던 ‘설날’을 부활시킨 것도 그였다. ‘와이셔츠 차림 회의’ 도입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장관이었다.

다스베이더 가면을 쓴 제다

장관 김용갑을 유명하게 한 것은 이런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민정당은 1987년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1988년 13대 총선에서 패했다.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만들어졌다. 사회 전반에서 민주화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이 즈음을 “좌경세력이 급속도로 확산된 시기”로 규정했다.

그는 1988년 8월 기자회견을 자청, “현재 여소야대 구조로는 좌경화를 막기 불가능하고 우리나라가 월남식 공산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때문에 국회로 불려가 야당 의원들로부터 추궁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느냐”고 맞받는다. 그는 이후 ‘우익의 기수’ ‘대변자’를 자처했다. ‘뿔 달린 장관’ ‘소신장관’ ‘강성장관’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일까.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서 제다의 기사가 다스베이더의 가면을 쓰게 되듯, ‘6·29의 제안자’는 이때부터 ‘극우의 탈’을 쓰게 된 다. 1989년 3월 김용갑은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장관직을 내던진다. 파격적인 마무리였다. 그는 스스로 몸을 던짐으로써 우익은 물론 중도, 진보세력에게도 꽤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자서전에서 설명하는 당시 상황은 이렇다.

“나는 중간평가를 통해 사회 전반에 팽배한 좌경세력 척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하려는 정부와 공산주의를 꿈꾸는 불순세력들에 대해 국민의 판단을 물어야 하고, 그런 만큼 당연히 승리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정치권은 중간평가 문제를 어물어물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국무위원으로서 나는 참을 수 없었다. 3월14일 사표를 썼고, 점심을 먹으면서 박명제 비서관과 함께 사퇴 성명서 문안을 작성하는 한편, 차관과 기획실장에게 사퇴의 뜻을 밝히고 총리실로 갔다.”

그는 기자실로 내려와 “국가를 좌경화의 위험에서 구출하라”는 요지의 사퇴 성명서를 읽고서 잠적했다. 전무후무한 ‘돌출행동’이었다. 야당에선 ‘극우적 발상의 소유자’라는 비난논평이 쏟아졌다.

이날의 퇴장과 함께 그는 언론의 관심에서는 일단 비켜나게 됐다. 그는 ‘민주개혁 범국민 운동협의회’라는 보수 시민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1992년 총선 때 무소속으로 서울 서초구에서 출마했지만 민자당 김덕룡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김용갑 의원은 1996년 총선에선 고향 밀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96년 5월24일자 ‘동아일보’ 보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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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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