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군에 입대할 때도 신신당부한다.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지 말아라. 철책선에서 보초를 서면 하늘을 보고 그려봐라. 여건이 안 되면 마음으로라도 그려보라. 벗어놓은 군화라도 쉼 없이 관찰하며 그려보라. 끊임없이 손이 마려워야 한다”고.
며칠 전 내 전시장에 박훈규라는 애제자가 찾아왔다. SADI 1기생이라 열정적으로 대했던 기억이 새롭다. 첫 시간 과제물로 각자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취하는 동작을 연이어서 그려 오라고 했다. 그때 훈규는 만화 형식을 빌려 장면 장면을 웃음이 터져나오도록 재밌게 구성했다. 그는 만화공부를 하겠다고 고등학교 때 가출했다가는 포기하고, 평화시장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다가 디자인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러다 테크닉만 가지고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뒤늦게 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훈규는 군대라는 무대를 상상력의 자극제로 사용했다. 그는 보초를 서며 그린 구름, 군인들이 잠자고 쉬는 모습 등을 조그만 연습장에 촘촘히 그려와 나를 감동시켰다. 복학한 뒤 그는 학비를 벌겠다며 호주로 가겠다고 했고, 1년여가 지나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 실력도 늘고 학비도 넉넉히 벌어왔노라고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호주는 물론, 기회가 닿아 영국에 까지 건너갔던 그는 사람들을 그려주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비싼 경험을 얻었다고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끊임없는 관찰을 통한 예술적 모티브의 축적’이라고 할까. 그는 어느새 한 틀에 묶을 수 없는 자유로운 디자이너로 성장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는 현재 콘서트 무대에서 영상 소스를 믹스해 보여주는 ‘비주얼 자키(Visual Jockey)’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일본의 유명한 디자인 잡지에 ‘한국의 젊은이 중 3대 아티스트’로 선정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는 20여 년 전, 당시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2세에 그림공부를 더 하겠노라고 뒤늦게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그림으로 녹여내는, 이 단순한 예술행위 흐름 하나하나가 주는 쾌감을 잘 알았기에 공백에 따른 목마름이 더 컸다.
미국 유학 9년 반 동안엔 사진, 조각, 판화, 유화, 도자기까지 마음껏 찍고 만들고 그렸다. 방학 때는 멕시코, 캐나다 등지로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단기 선교사로 에콰도르, 콜롬비아의 오지에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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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예술인으로서 배격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내가 품고 담고 그릴 수 있는 화폭의 세상은 더욱 넓어져갔다. 스케치 여행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어서, 지금도 그림에 집중하던 때의 그곳 날씨와 나의 감성상태는 물론, 바람 속에 실려온 향기까지 고스란히 떠오른다.
2, 3년 전부터는 디자인스쿨에도 다른 전공을 하다가 온 학생들의 발걸음이 잦다. 그들은 스스로 나이도 많고 머리도 굳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나는 그들이 나약함과 자신없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되찾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찰하며 빠져들게 됐다. 이를 그림의 신비, 미술의 기적이라고 한다면 과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