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 우리말을 한문으로 적을 때의 부자연스러움[?]은 시간이 지나거나 공부를 더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시를 다 외운들 내 머릿속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어찌 다 적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배운 한문이 중국에서 그대로 통용되는 것도 아니다. 조선식 한문이 중국에서 쓰는 한어(漢語)와 다를뿐더러 그 발음도 중국말, 즉 화어(華語)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1439년(세종21) 겨울 북경에 갔을 때 나는 저들이 ‘공자(孔子)’라는 말도 못 알아듣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함께 간 통사(通事, 통역관)에 따르면 저들은 ‘쿵쯔’라 발음한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한어도감(漢語都監)’을 설치해 그 안에서 오로지 중국말[華語]만 사용하게 하고, 중국인[漢人]이 와서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우수한 통사가 많았다(세종실록 23년 8월11일: 이하 세종실록은 23/8/11로 날짜만 표기함. #는 윤달 표시). 그런데 아조(我朝, 조선)에 들어 명나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또 통역이 낮은 직급의 일로 간주되면서 중국말 잘하는 재상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중화를 사모하는 자’들의 공격
상(上)께서 명 조정의 반대에도 북경에 “생도(生徒)들을 보내 중국의 음훈(音訓)을 학습시키려” 한 것(21/12/4)이나, ‘강이관(講肄官)’과 ‘별재학관(別齋學官)’을 증설하고 생활비를 주면서 중국말 배우기를 권면하신 것은(23/8/11) 바로 이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께서는 중국의 명사(名士)가 요동(遼東)에 귀양 왔다는 말을 듣고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을 보내 한어를 배워오라고까지 하셨다(선조실록 6/1/11).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제아무리 중국말에 익숙하고 최고의 중국 학자들에게 배운다 해도 우리말을 한어로 적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야말로 “모두 각기 처지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28/9/28).
“글 배우는 사람은 문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옥사(獄事) 다스리는 자도 그 곡절(曲折)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28/9/28) 1443년(세종25) 겨울,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창제하신 것은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이었다. 상께서는 후자, 즉 억울한 옥사를 없애는 데 주목적을 두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약간 달랐다. 중국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그 많은 한자를 배우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까지 중국의 학문을 수입해야 하는지가 내겐 늘 의문이었다.
물론 예조판서라는 직책상 나는 한문의 통달은 물론이고 중원 학문의 흐름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교정치의 ‘지식인 지배체제’에서 학문의 후진은 곧 국력의 약세를 뜻했고, 외교관계에서 갖은 멸시를 당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었다. 하지만 글 배우는 사람이 자기 뜻을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창발적인 생각으로 이 나라를 문명의 국가로 올려놓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라 교육을 담당하는 예조의 더 큰 책무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생각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럴 경우 최만리 등 ‘중화를 사모하는 자’들이 곧장 나를 ‘문명에 흠절을 내려는 자’로 공격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집현전 안의 정음반대파는 나와 성삼문 등의 트집거리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저들의 공격이 무서워서 내 생각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문을 통하지 않고는 중원으로 모여드는 지식과 정보를 배울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며, 잘 안 맞는 도끼자루라 할지라도 새 도끼자루를 만들 때까지는 억지로 잡아맨 그 도끼자루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도끼구멍에 들어맞는 둥근 도끼자루 역시 지금의 헌 도끼자루를 이용해 만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네가 운서를 아느냐”
최만리의 말 중에서 우리글을 제작한 사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어떡하겠느냐는 말 역시 빈말이 아니었다. 이미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중국의 제후국임이 선포되었고, 또 태종임금 때부터 명나라의 신임을 얻기 위해 지성으로 사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터에, 독자적인 언어 제작은 자칫 중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고려 말의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사건’(1390)이나 주상 초년의 ‘적휴(適休)사건’(1419)에서 이미 겪은 것처럼, 중국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찰 개혁에 지장을 받는 것이 우리의 처지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