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입력2007-06-04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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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암의 전진은 광적(狂的)이었다. 1780년 7월9일 요양을 떠나 심양, 북진을 거쳐 십삼산까지 일주일 동안 말을 타고 600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했다. 그런 중에도 어느 한 곳에 잠시 머물 때면 몸을 쉬게 하지 않고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청나라 문물을 샅샅이 살폈다. 허세욱 교수는 2006년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정 많고 호기심 많은 연암의 뒤를 쫓았다.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허세욱 교수가 뒤쫓을 연암 박지원의 연행도.

    여기 600리는 줄곧 일망무제의 벌판, 연암은 벌판의 짜릿한 전율을 체험했다. 그 전율의 내원은 두 가지. 하나는 지리요, 다른 하나는 역사다. 지리가 준 전율은 무한한 지평선에서의 직관이다.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가 수수밭에서 솟았다가 수수밭으로 슬금슬금 잠기는 그 장엄한 허무를 맛보는가 하면 지평선 위로, 가는 말과 오는 수레 그 점점한 동체가 인상에 심겨 있었고, 고만고만 옹기종기 움직이지 않는 집들을 햇볕 속에 늘어선 깃털로, 절간 앞의 당간을 바다의 돛대로 보는 그러한 시각들이다.

    역사가 준 전율은 좀더 앙칼졌다. 요양을 떠나던 날, 아침 연기가 흩어지는 요양성 밖 평원을 보면서 연암은 이렇게 감탄했다.

    “어허 참!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백병전을 벌이던 곳!(噫! 此英雄白戰之地也)… 천하의 안위가 예로부터 여기 요동벌에 달렸거늘(天下安危, 常係遼野) 요동벌이 조용하면 나라 안의 풍진이 일지 않을지요, 요동벌이 소란하면 천하의 병마들이 쇠북을 울릴지다(遼野安, 則海內風塵不動, 遼野一擾, 則天下金鼓互鳴)… 그래서 여기는 중국이 필사코 지키려는 땅이렷다((此所以爲中國必爭之地).”

    연암의 7월10일자 일기의 한 대목을 절록(節錄)해보았다. 읽기에 섬뜩했다. 섬뜩한 것은 연암이 중국의 마음을 짐짓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이 심양에서 분명한 톤으로 ‘심양은 본디 조선의 땅이다(瀋陽, 本朝鮮地), 혹자는 한(漢)나라가 사군을 둘 때 낙랑이 다스리던 곳이라고 했으나, 위·수·당 때는 고구려에 속했던 곳(或云漢置四郡, 爲樂浪治所, 云魏隋唐時屬高句麗)이다’라고 밝힌 만큼 일기의 행간에는 우리 고구려가 평양 천도를 단행한 427년 당시 바로 이 벌판에서 쇠북을 울리다가 호시탐탐 동진하는 수·당에 밀려 결국 남쪽으로 떠밀린 역사를 회고한 것이다. 그 천도와 함께 북으로는 요하 상류(시라무렌강), 서로는 대릉하 하류까지 뻗었던 고구려가 범의 울부짖음과 용의 틀임을 접었던 곳이다.

    수레와 다리에 눈이 휘둥그레



    그러한 ‘필쟁지지(必爭之地)’를 지나서 닿은, 연행의 최북단 심양은 더구나 굴욕의 땅이요 선망의 땅이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고, 우리의 진품을 조공으로 빼앗기고, 우리의 왕자를 인질로 잡혔던 그 침략의 총 지휘소였고, 연암이 이틀 밤이나 꼬박 뜬눈으로 탐문한 골동품가게 예속재나 비단 점방 가상루 같은 부상(富商)이 즐비했던 곳이다.

    연암이 배배 뒤틀린 현장이었다. 연암은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했던 행궁의 소재, 심양의 밤을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 해라” 하며 슬며시 숙소를 이탈해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는 오로지 실학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청나라의 머리와 가슴을 열어보고팠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꼭두새벽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마저 귀찮을 만큼 연암은 지쳤다. 심양을 구경하고 떠나던 날, 그는 말안장 위에 받침대를 깔고 좌우로 하인 창대와 장복이의 부축을 받으면서 드르렁드르렁 도적잠을 잘 만큼 곤했다.

    연암이 야간 구경을 나선 것은 다만 지식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광적인 정열의 투신이었다. 연암의 이렇듯 광적인 정열은 자칫 북학을 향한 단순 논리나 편향 논리로 비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균형 잡혀 있다. 실학만으로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부(富)를 위한 물량에 급급하지도 않았다.

    연암은 심양의 문명, 특히 수레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퀴의 높이가 팔꿈치까지 닿는 태평거나 수레 채를 겨드랑이에 끼고 미는 독륜거 등을 보곤, 수레는 뭍에 다니는 배요 움직이는 방이라고 치켜세우는 한편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수레란 것이 없음을 통탄했다. 수레를 말한 김에 연암은 불 끄는 수레 수총차(水銃車)를 비롯해 당나귀가 끌면서 곡식을 찧는 맷돌, 수레를 써서 가루를 치는 체, 고치실을 뽑는 이륜(二輪) 소차(?車)를 신기하게 소개한 나머지 따로 ‘거제(車制)’란 글을 써서 부록했다.

    또 이 지방 건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심양에서 영안교(永安橋)까지 그 진흙 수렁에다 나무를 엮어 200여 리의 다리를 놓은 공법 말이다. 먹줄을 친 듯 정일(精一)한 솜씨라고 극찬했다. 그것은 백성이 수렁을 걷지 않게 하는 배려요, 지방 관가의 재정적 과시였다. 연암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따로 ‘다리(橋梁)’란 글을 쓰면서 ‘다리들은 모두 성문 같은 무지개’라고 술회했다.

    “이밥을 장복하면 쓸모없노라”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중국 선양의 고궁.

    연암은 현실만 직관하지 않고 그 역사와 그 반면도 깊이 살필 줄 알았다. 필자는 여기서 연암의 두 가지 ‘소극적인 실학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하나는 오늘의 성장 억제론에 상당하는 ‘척토향의(瘠土向義)’론이요, 또 하나는 오늘의 도무소부재(道無所不在)론에 상당하는 ‘와력분양(瓦礫糞壤)’론이다.

    1780년 7월13일 고가자(孤家子)를 출발해 백기보(白旗堡)로 이동 중이던 연암은 영안교에서부터 끝없이 뻗은 진펄과 아름드리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기름진 녹수를 보면서 ‘저들을 개간해 몇만 뙈기 옥답을 만들면 금싸라기 몇억 석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풍요로운 꿈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천하의 강국 청나라를 이끄는 강희 황제는 왜 저 땅을 내버려둘까 의문을 가졌다. 더구나 농업을 장려하고 생산을 고취하는 ‘경직도’나 ‘농정전서’ 같은 책을 편찬하고, 그 자신이 농가의 자식이었으며, 그 땅은 산해관 밖 강희의 통치권이 안전하게 미치는 본향이 아닌가.

    그때 비로소 연암은 간파했다. 그것은 강희 황제의 깊은 사려라고. 번지레 기름이 흐르는 이밥을 장복하면 사람의 힘줄이 풀리고 뼈가 물렁거려 전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노라고. 그래서 차라리 백성에게 수수나 기장밥을 늘 먹임으로써 타고난 입맛을 잃을지언정 혈기를 돋우는 편이 나라를 위해서는 선책이라고. 옳지, 옛날 선왕들도 백성에게 ‘내기(耐飢)’, 곧 주림을 참도록 교화하지 않았던가. 아니 심양의 그 궁궐 대전에 붙어 있는 편액에도 ‘담박(淡泊)’ 두 글자가 빠지지 않았던가. 연암은 강희의 속내를 이렇게 표현했다. ‘차라리 천리에 뻗은 기름진 옥토를 팽개칠지언정 척박한 땅에서 갈고 마시며 충의를 지향하는 백성을 만들겠다’고.

    연암이 7월15일 의무려산이 에워싼 북진(北鎭·지금의 北寧)에 도착했을 때다. 서울과 북경을 오가는 조선의 사절이나 무역상이 대개 여기서 만나는데, 만나면 으레 여행의 소감을 나누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어디가 가장 장관이었냐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사람마다 달랐다. 요동벌을 비롯해 백탑, 연도의 점포, 계문(텺門)의 숲, 노구교, 산해관, 각산사, 망해정, 조패루, 유리창, 통주의 배, 금주의 목축, 서산 누대, 사천주당, 호랑이 우리, 코끼리 우리, 남해자, 동악묘, 북진묘 등이 주로 손에 꼽혔다.

    ‘3단계 장관론’

    그런데 연암의 장관론은 단순한 자연물이나 문물 그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 사람의 지체나 지식 수준을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로 3등분하고 각 계층에 따른 장관을 말하되 외관(外觀)이 아니라 정치관이요 사상관이었다. 그러한 관점은 연암이 평소 지니고 있던 실학관을 비롯, 조선인의 시각과 ‘춘추’에 따른 중화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를 굳이 ‘3단계 장관론’이라 담론하고 싶다. 그것은 연암의 담론이 그만큼 내외와 정치, 역사, 실학을 아우르는 정론일 수도 풍자일 수도 있어서다. “중국의 장관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이른바 상사(上士)는 발끈 화를 내면서 “중국에는 도시 볼 것이 없노라(都無可觀)”고 한다. 상사란 지체가 높은 계층을 말하는데 ‘도시 볼 것이 없노라’는 논거가 재미있다. 황제로부터 장상과 대신, 백관, 다시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깎았음을 꼬집는 말인데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면 개, 돼지나 다를 바 없는 오랑캐라고 혹독하게 매도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황제로부터 만백성까지 변발을 강요한 청나라 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번째, 중사(中士)에게 “중국의 장관이 무어냐”고 물으면 “볼 만한 것이 무엇일까(何足觀)?” 하고 되묻는다. 상류층처럼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명분론이 아니라 선은 무어고 후는 무어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차근차근 챙겨보는 현실론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중국은 오랑캐의 세상이 됐지만 중국의 성곽이나 궁실, 그리고 인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은·주 3대로부터 전습한 왕제와 한·당·송·명의 법률과 제도 등이 변함없었다. 요컨대 청나라 왕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를 충실히 집행해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치더라도 그것이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쓸모 있다면 주저 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긍정했다.

    “보라! 저들 (우리로부터) 오랑캐로 불리는 청조는 정말로 무엇이 중국을 이롭게 하고 그것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연암이 복중에 깊이 간직한 말이 여기서 불거져 나왔는지 모른다. 연암은 장관을 담론하면서 조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의 형제 국가로서 그동안 명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1592년 임진년 왜놈이 쳐들어왔을 때 명나라는 원군을 보내 이를 막았고, 다시 1636년 병자년 청군이 몰려왔을 때 명나라 열(列) 황제는 제 코가 석 자나 빠졌음에도 바다 건너의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200여 년 전 연암이 보았던 웃통 벗어젖힌 사내는 요즘 중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

    지금 청나라는 아시아에서 제국의 틀을 갖추고 용틀임을 계속하는데, 조국은 중국의 ‘춘추’ 정신인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노선을 따라 백년을 하루같이 중국 받들기에 장관을 이루어야 하는지. 연암은 나아가서 ‘중국을 받드는 것도 제 탓이요, 오랑캐가 그 힘으로 사는 것도 제 탓’이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엄연한 현실 앞에 우리가 중국에 볼 만한 것이 없다고 장담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차라리 남이 열 개를 노력할 때 백 개의 노력을 퍼부어 저들의 철갑과 첨병이 흙더미처럼 무력해질 때라야 비로소 중국에는 볼 만한 장관이 없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용후생을 도모해야 장관

    세 번째, 하사(下士), 곧 하등계층 사람에게 “중국의 장관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대답은 가장 시큰둥하면서 가장 아껴두었던 말인 듯하다. 우선 대답에 앞서 연암은 자신을 ‘나 같은 삼류 인사(혹은 하층민)’라고 낮추었다. 무언가 정곡을 암시했다.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이나 똥거름에 있노라(壯觀在瓦, 壯觀在糞壤).” 알다시피 그것들은 천하가 버린 물건이요, 천하에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주워 모아 다시 담을 치거나 담장의 어깨놀이에 깔면 여러 가지 무늬를 만들 수 있고, 그것들을 주워 거름간에 두거나 누각 모양으로 쌓으면 금싸라기처럼 쓸 수 있다.

    깨진 기와 조각이나 똥거름에도 장관이 있다는 논리는 장자(莊子)의 ‘도무소부재설’의 발전일 수 있겠다. 거기에 더해 경제와 예술, 실학과 도안(圖案)의 융합, 그 경지까지 심화됐다. 깨진 기와 조각 두 장씩 마주 붙여서 물결무늬를 퀼팅하고, 깨진 기와 조각 네 쪽의 등을 모아 붙이면 옛날 동전의 그림이 재현됐다. 얼마나 장관이랴! 이용후생에도 단단히 한몫을 하면서 그 미관이 사람의 영혼을 즐겁게 하지 않는가.

    그래서 연암은 결미에 강조했다. ‘기와 조각이나 똥거름은 모두 장관이다. 하필 성곽과 연목, 궁실과 누대, 점포와 사찰, 목축하는 벌판의 광막함과 자욱한 숲의 환상만을 장관이라 찬미할 일인가’라고.

    그러니까 ‘3단계 장관론’은 상류층의 명분론, 중류층의 현실론을 거쳐 하류층의 실학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말하는 장관이란 기국의 대소에 관계없이 이용후생을 도모할 수 있는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깨진 기왓장이 장관이라는 역설적인 심미안이 연암이라는 대형 작가의 속마음일 줄이야! 그가 ‘장관론’을 펼친 북진을 떠나 이튿날 여양(閭陽)을 거쳐 열세 개의 봉우리가 쌍륙의 말처럼 옹기종기 서 있는 십삼산(十三山)에 닿아서도 포근한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의 명징한 시력과 밝은 청력은 그렇게 열려 있고, 그렇게 따뜻했다.

    여양은 때마침 장날이었다. 그중에도 연암의 눈길을 끈 것은 별의별 이름의 새를 파는 새 장수였다. 매화나 오동조, 청작, 화미조 등의 새장을 실은 수레가 여섯 채, 벌레를 실은 수레만도 두 채여서 그것들의 지지구구 윙윙왕왕 울음소리가 마치 어느 산중에 들어온 것만 같다 하였다. 허연 수염의 영감이 가는 막대 끝에 참새 한 마리의 다리를 색실로 매곤 그것을 놀리면서 가는 모습은 마치 마술의 한 장면처럼 그려놓았다.

    연암의 눈에는 그 앙증맞은 풍물이 신선했던 것이다. 이른바 대국 사람들의 기호가 기껏 곰작거리는 벌레를 잡아다가 촘촘한 그물 안에 가두고 그 처량한 울음소리를 즐기고 있음이니 말이다. 하긴 예로부터 중국 사람의 놀이는 좀스럽고 느려빠진 데가 있었다. 투견(鬪犬)이나 투우가 아니라 투계(鬪鷄)나 투화(鬪花)가 그랬다.

    지금은 석산(石山)으로 그 이름이 바뀐 십삼산리(石山과 十三山의 중국 발음이 같다)를 걷다가 연암은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사(謝)씨 어린이와 친교를 나눈 적이 있다. 고동색 두루마기에 검정 공단 신을 신고 사붓사붓 예쁘게 걷는 백옥 같은 얼굴의 꼬마는 예의 바른 데다 총기도 밝았다. 갈 길이 바빠 총총 헤어지면서 연암이 손에 들었던 부채를 선물하자 아이의 할아비는 비단 수건과 부싯돌을 답례로 주었다. 그렇게 작별한 뒤 연암은 그 꼬마의 얌전한 모습이 눈에 늘 삼삼했다고 고백했다.

    눈에 삼삼한 사(謝)씨 어린이

    이 밖에도 요동벌 여행길에 주워 담은 생생한 중국 풍속도는 주렁주렁하다. 그 풍속도는 이백수십 년이 지난 21세기 오늘에 포개어도 한 모양 한 틀이란 점에서 연암의 기록은 역사의 한 증언일 수 있었다.

    연암이 7월10일 입성한 심양은 난생 처음 보는 중국의 대도시였다. 행궁이 있고 왕릉이 있고 점포가 즐비했다. 두 밤이나 아예 잠을 팽개치고 돌풍처럼 쏘다녔다. 진기한 풍경이 연암의 앵글에 잡혔다. 심양으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수백 명의 장사패를 만났는데 그 정경이 가관이었다. 버드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 수숫대 껍질로 만든 작은 바구니에 여치나 매미를 잡아놓고 흥정하는 사람, 양매차(楊梅茶)나 제호탕(醍?湯)을 사발로 사서 마시는 사람, 빈랑(檳?)을 씹는 사람, 징을 치거나 목탁을 치는 기름 장수, 땡땡이를 치는 청포(靑布) 장수, 쇠꼬치를 두들기는 이발쟁이….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연암이 요양을 떠나 입성한 심양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대도시였다.

    연암에겐 가까이 살면서도 생소한 풍경이었으나 50년 가까이 중국을 드나든 필자에겐 낯익은 모습이요 귀에 익은 소리다. 지금도 중국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필시 중국 문화의 골수가 녹아내린 편린이다. 양매차나 제호탕은 시큼달콤한 청량음료인데 남방의 과일이나 한약을 달여 만든 것이다. 대만이나 광동, 광서, 복건 등지서 여름 한철이면 길바닥 어느 구석에서나 마실 수 있는 냉차의 한 종류다. 빈랑 또한 열대의 야생 열매인데 올리브나 상수리 비슷하다. 그 껍질은 파랗고, 쪼개어 씹으면 온몸이 뜨거워지는 약물식이다. 이열치열의 방법이라지만 그것을 씹는 입은 물론 그걸 씹다가 뱉어내는 찌꺼기가 빨개서 보기에 흉측하다. 그러한 열대 식품이 어떻게 만주까지 번졌을까. 문화의 전파력이 새삼 놀랍다.

    웃통을 벗어젖힌 사내는 부끄러운 풍속이다. 중국의 남방이면 몰라도 북위 42。의 심양에서 말이다. 중국 도처에 산재한 쿠리(若力)들이 걸핏하면 웃통을 벗어 던진다. 루쉰(魯迅)의 대표작 ‘아Q정전’에도 그러한 사내가 자주 등장할 만큼 중국 하층에 널려 있는 적신적각(赤身赤脚)의 풍속, 그 단면을 읽는 느낌이다.

    중국엔 도부꾼이 지천이다. 물론 소리소리 치면서 골목을 누빈다. 그러면서 갖가지 연장을 친다. 징, 딱따기, 목탁, 땡땡이, 쇠꼬치, 대쪽, 작은북 등을 때렸다. 아닌게아니라 중국 골목에서 ‘사구려…’ 소리를 좀처럼 듣지 못했다. 무엇을 치는 소리만 듣고도 무슨 물건을 파는지 알고 아줌마나 꼬마둥이들이 우르르 문밖으로 나온다.

    중국의 오락 문화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중국의 오락 문화 중엔 바둑이나 끽다처럼 느리고 조용한 정양의 방법이 있는가 하면 왁자글 주사위를 던지는 투패(鬪牌)나 시끌작 가위 바위 보를 외치는 시권(猜拳) 등 소란을 피우는 놀이가 있다. 그중에도 시권은 특수했다. 시권은 중국어로 차이취안, 문자 그대로 주먹 안에 든 것을 알아맞히는 놀이다. 상대의 주먹 속 바둑돌이나 오이씨의 개수와 색깔을 맞히거나 가위 바위 보를 하되 두 사람이 내미는 손가락 수를 알아맞히는 싸움인데 술을 마시며 취흥을 돋우거나 취기를 깨려는 속셈으로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온 가게를 들썩였다.

    과객으로서 연암의 관찰은 광범하면서도 치밀했다. 예를 들면 길에 몰려다니는 수백 필의 말이나 강가에서 물을 먹는 수백 마리의 노새, 그 떼를 보살피는 목자는 기껏해야 촌뜨기 할멈이고, 그것도 고작 수숫대 한 개비로 맨 뒷전에서 쉬엄쉬엄 몰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구경거리가 잡혔다. 백기보에서 소흑산으로 가는 도중 초상집을 만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바라 한 쌍, 피리 한 쌍, 새납(태평소) 한 쌍의 풍악꾼들이 조객이 들 때마다 지지배배 불고 쳤다. 징을 치고 피리를 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상주(喪主)가 곡을 하고 대지팡이를 짚으며 땅바닥까지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우리와 비슷한데 풍악을 울리고, 대나무로 말을 만들어 거기에 백지를 바르는 습속은 ‘도시 괴변’이라고 비꼬았다. 연암은 겸연쩍지만 문상을 하고 백지 한 권과 돈 몇 푼을 부의로 내놓고 술상도 받았다. 연암은 수레 만드는 법칙을 부록한 글에서 상여와 장례를 언급한 바 있다. 상여는 매우 소박하나 장례의 격식이나 행렬이 너무 장황해서 매우 낭비적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漢人은 간교, 滿人은 순박”

    또 한 가지. 연암은 실학의 신도요 제창자로 평등과 풍요를 신념으로 삼았지만 민족 문제에도 은근히 집착했다. 7월13일, 고가자에서 백기보로 이동하는 길에 참외 장수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는데, 난데없이 참외밭 주인 영감이 길을 막고 무릎을 꿇더니 사절 일행에게 호소했다. 조선 사람 사오십 명이 참외 한 개씩 들고 도망쳤으니 그 대가로 청심환을 달라는 것이다. 영감은 벼락 눈물을 흘리면서 참외 아홉 개를 비싸게 팔아먹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하인들이 참외를 들고 뺑소니쳤다는 건 사실무근이었다. 그러니까 연암 일행이 새빨간 거짓말에 넘어간 것이다. 연암은 어느 하인의 말을 빌려 “한인(漢人)은 간교하고, 만인(滿人)은 순박하다”고 평했다.

    이보다 앞서 7월10일 요양에서 심양으로 들어갈 때, 노상에서 처음으로 몽골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수레 수천 대에 벽돌을 싣고 심양으로 가는데 소 세 마리가 수레 한 대를 끄는 모양도 희한하거니와 큰 코에 깊숙한 눈, 거기다 사납고 남루한 몽골 사람도 인상적이었다. 조선의 말꾼들이 놀려대며 그들의 모자를 벗겨 던지거나 그들을 길에다 넘어뜨려 희롱해도 화를 내기는커녕 빙그레 웃는 몽골 사람을 스케치했다. 이러한 스케치만으로 그 민족성을 단정하는 건 위험하지만 연암 나름의 속내가 담겼다. 교활한 한족에 순박한 만주족, 그리고 바보스럽게 너그러운 몽골족, 이렇게 이웃을 촌평한 것이다.

    연암의 앵글은 닥치는 대로 포착했다. 그렇게 먹고 삭이는 동안 엉뚱한 풀이를 거듭하기도 했다. 연암 스스로 털어놓은 실패담이다. 7월13일 신민(新民)에 당도해 어느 전당포에 들렀다. 주인이 주련 한 폭을 써달라고 청했다. 써주었더니 크게 좋아하면서 점방 문 위에 붙일 명구 하나를 또 청했다. 언젠가 어느 점포 문 위에서 읽은 적이 있는, 그래서 좋게 생각했던 네 글자 ‘기상새설(欺霜賽雪)’을 냉큼 일필휘지했다. 연암 생각으로는 ‘(마음 깨끗하기가) 서릿발이나 다름없고 눈보다 희다’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당포 주인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알고 보니 그 말은 ‘서리를 의심할 만큼 희고 눈보다 희다’는 뜻의, 밀가루 가게 밀가루 선전 문구였다.

    “이게 대어로랍니다”

    연암이 일주일 동안 말로 달린 요양에서 십삼산까지, 필자는 2006년 11월22일부터 25일까지 지방 버스로 달렸다. 늘 그랬듯 필자는 226년 전 연암의 그림자를 쫓았다. 연암은 요양을 벗어나면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어놓아 그 그늘이 침침하도록 우거졌다 했는데 지금도 버드나무는 가로수로 한몫을 하고 있었다. 늦가을로 옮겨가는 계절이라 그 작은 잎사귀가 흩날렸다.

    심양에 들어 돈 몇 푼을 내고 고궁을 휘적휘적 종횡무진하노라니, 관속에게 부탁해 대궐 한 번 구경하려 했으나 관속의 불친절로 인해 겨우 울타리 밖에서 건너다보았던 연암이 측은했다. 연암은 결국 허가 없이 정문 안으로 쑥 들어가서 전각과 정자 등을 구경했고, 골동품가게와 비단 점방을 제집 들고나듯 쏘다녔다. 그러고는 출입을 제한하는 관아를 겁도 없이 드나들었다고 자랑했다.

    필자는 심양에서 국도 G304를 타고 흥륭(興隆)을 거쳐 고가자까지 지방의 완행버스로 이동했다. 1780년 7월12일, 연암은 이 길 위에서 창대와 장복이의 모험적인 부축을 받으며 말 위에서 도적잠을 잤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눈에 핏발이 선 연암의 그 슬픈 정열을 기억하고 싶었다.

    고가자(孤家子)는 문자 그대로 쓸쓸한 벌판에 민가가 겨우 삼사십 채 있는 작은 부락이다. 심양에서 달려온 국도가 여기서 세 갈래로 갈라지지만 황량한 갈대뿐이다. 부락 한편에 표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청나라 초엽 여기에 집 한 채 있었나니, 이름 하여 고가자’라고 씌어 있었다. 마을에 약방이 있어 들어가 이 길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약사의 말이 “알고말고, 이게 대어로(大御路)랍니다”다. 그런데 어느 날 폭풍이 성을 내고 몰려온다면 옛날 누란(樓蘭)처럼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바람 벌인데, 연암은 어디서 잤을까. 그까짓 청나라 고종의 코빼기에 큰절 한 번 올리려고. 지평선이 부(富)의 상징이라고? 기가 콱콱 막히는 이 벌판이 부라고?

    장터엔 번듯한 시멘트 빌딩이

    다시 20km쯤 가면 신민(新民). 연암은 신민이 요양에 못지않게 번화했다고 썼다. 필자가 보기엔 아직도 빈티를 씻어내지 못한 시골 소읍이다. 물가가 매우 쌌다. 그 밤 싼값에 포식하고 배탈이 나서 혼이 났다.

    다시 백기보(白旗堡)에서 소흑산(小黑山) 가는 길을 달렸다. 그때 연암이 보았다는 풀죽 길이 이쯤인데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가 빠지는 진흙 수렁이 고가포(古家鋪)까지 질컥거렸다 했는데, 상전벽해는 도처에 징험되었다.

    드디어 ‘3단계 장관론’을 펼쳤던 북진에 이르렀다. 필자는 연암보다 행복했다. 병풍처럼 북진을 포위한 의무려산 866m를 오름은 물론 연암이 홀랑 반했던 북진묘 그 모두를 답파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력이 모자라서 볼 수 없었다는 북진묘 뜨락에 오래오래 서서 청공만리 푸르름에 젖어보았다.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1961년 중국시단 데뷔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일부러 여양에 들렀는데, 장날은커녕 번듯한 시멘트 빌딩들이 서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연암이 보았던 새장과 벌레 광주리를 떠올리며 훌쩍 떠났다.

    십삼산, 지금은 석산(石山)이란 소읍이다. 버스 정거장 옆 만두집에서 배를 채우고 돌산이 있는 망산촌(望山村)까지 5리길을 걸었다. 바위 봉우리가 세 개, 흙 두덩이 세 개, 들쑥날쑥 뫼 뿌리가 6개쯤 보였다. 그러나 더욱 보고픈 것은 연암이 예뻐했던 사(謝)씨 동자였다. 동네 사람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사씨가 사느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는 갈 길이 멀어 돌아섰지만, 지금쯤 그 꼬마둥이는 236세쯤 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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