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결될 듯 될 듯하던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마침내 마지막 고비를 넘었다. 시작부터 따지면 1년9개월, 해결 논의 4개월 만에 비로소 실마리가 풀린 것. 예상과는 딴판으로 이렇게 지연된 까닭은 무엇일까. 북한에서 엘리트 금융가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하다 1995년 탈북한 최세웅 BGC캐피털마켓 서울법인 대표로부터 북한이 BDA 문제와 관련해 보여준 ‘알 수 없는 행동’의 배경과 속사정, 그간의 혼선이 남긴 교훈을 들어봤다.
6자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3월21일,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 마카오 BDA의 북한 계좌와 관련해 쏟아져 나온 언론보도의 헤드라인이었다. 3월19일 북-미 양측의 합의에 따라 BDA 자금의 동결이 풀렸지만, 송금을 신청해야 할 북한이 52개 계좌주 전체의 서명 대신 달랑 한 장의 신청서를 들고 왔다는 소식이었다. 해결을 눈앞에 둔 것 같았던 BDA 문제가 다시 엉키기 시작해 이후로도 한참을 더 끌게 된 상징적인 계기였다(상자기사 참조).
계좌주 본인의 서명도 없이 예금을 찾겠다고 나선 북한의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을 두고 언론과 전문가들, 정부 당국자들조차 “북한 당국이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당국의 명령이라면 모든 절차가 무시될 수 있는 북한에서처럼 은행들이 미국이나 중국 정부의 말 한마디에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었다. 한 정부 고위당국자는 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이번 일이 북한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BDA 문제에 임하는 북한의 태도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다. 2005년 이후 동결조치만 풀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매달렸던 북한은, 정작 올해 1월 베를린 회동과 2·13합의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자 오히려 버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를 두고 무수한 억측과 논의가 쏟아졌지만, 정작 북한의 국제금융체제가 ‘사각지대’로 불릴 만큼 제대로 알려진 게 없는 분야이다보니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막연히 ‘폐쇄국가 북한이 국제금융에 밝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추측뿐이었다.
1995년 탈북한 최세웅(47)씨는그런 의미에서 BDA 문제에 얽힌 뒷배경이나 북한의 국제금융에 대해 풀이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다. 북한 노동당 재정경리부장(한국의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최희벽씨의 차남으로, 1979년 평양외국어학원, 1984년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후 북한 노동당의 대외결제를 담당하는 조선대성은행에 입행해 외환담당 과장과 국제부 차장을 거쳤다. 이후 수년간 런던 현지법인에서 대표로 일하며 금과 외환선물을 거래하다(대성은행은 BDA 문제의 당사자 은행 가운데 하나다) 조선통일발전은행 부총재보를 끝으로 서울에 온 그는, 이후 금융결제원 자금중개실과 나라종합금융 국제부 과장으로 일했으며 지난해까지 ‘에스엔뱅크’라는 벤처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는 전세계 외환도매시장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통합음성전자 중개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 기업 BGC캐피털마켓 서울법인의 대표로 일하는 최 대표는, 그간 북한이나 BDA 문제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발언이나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란다. 서울 토박이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적인 이 왕년의 ‘붉은 자본가’를 어렵사리 설득해 만난 자리. 먼저 BDA 문제와 관련해 가장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 BDA 문제에 접근하는 북한의 태도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북한이 그 정도로 국제금융에 대해 무지한가.
“계좌주가 아닌 사람이 자금을 인출하거나 송금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하다. 북한이라고 해서 그 당연한 상식을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다(웃음). 북한 역시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역하고 외환을 거래하고 있는데 그런 기본적인 상식을 왜 모르겠나. 여기에는 분명 내부적인 원인이 있다. (52개 계좌주 가운데 몇몇이 사망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권리 승계자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릴 이유는 없다. 북한 경제의 특성상 해외에 있는 북한 계좌는 국가기관 혹은 그 대표자의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BDA에 국가기관이 파악하지 못한 계좌가 있었다면 이는 누군가가 횡령한 돈을 맡겨놓은 비자금 계좌라는 뜻이 된다. 3월21일의 해프닝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BDA 계좌 가운데 애초에 북한 당국이 파악하지 못한 계좌가 있었다는 사실은 정보 당국자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52개 계좌 가운데 39개는 대성은행과 마카오에 있는 조광무역 등 국가기관의 공식계좌였지만, 나머지 13개는 평양 당국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계좌였다는 것. 국가정보원은 2005년 BDA 문제가 불거진 직후부터 이 같은 내역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이 무렵 청와대 안보라인 관계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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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예치된 자금이 2500만달러’라는 초기 관련보도에 대해 평양은 깜짝 놀라 내역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마카오 소재 무역회사로 동남아 일대의 외환출납 루트인 조광무역 박자병 총지배인과 한광철 부지배인이 2006년 평양으로 소환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계좌의 명의자였던 박 총지배인은 사망했고, 한 부지배인은 숙청당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조사는 공금횡령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박 총지배인이 처형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북한은 바보가 아니다”
▼ 평양 당국이 애초에 몰랐던 13개 계좌의 자금과 관련해, 몇몇 정부 관계자는 이 돈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외의 실력자가 만든 비자금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최근 북한이 내각 총리 등의 경질인사를 단행한 것을 이와 연결시키는 추론도 있다. 2·13합의 이후 BDA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들 계좌의 처리를 둘러싸고 비자금 주인과 당국 사이에 알력을 빚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당국의 승인 없이 13개 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쌓아놓은 주체는 오히려 박자병 총지배인 본인일 가능성이 크다. 평양의 실력자가 비자금을 만든다면 굳이 해외 계좌를 이용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박자병이 자금결제나 회사 운영과정에서 받은 리베이트를 계좌에 보관하다가 BDA 건으로 자금이 묶이면서 꼼짝달싹 못하고 유탄을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 박자병은 예전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고, 1990년대 이전에도 무역사기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
언론보도나 BDA의 통보를 통해 계좌수나 자금의 규모가 당국이 파악하고 있던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중앙검찰소(우리의 대검찰청)와 자금을 담당하는 중앙당 39호실의 검사부가 함께 조사를 개시했을 것이다. 물론 김정일 위원장 본인의 지시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BDA 계좌를 관리해온 조광무역 관계자들이 소환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이후 조광무역은 새 총지배인을 임명하면서 마카오 사무실을 철수하고 중국 주하이(珠海)로 자리를 옮겼다-편집자).
금융은 투명하다. 계좌가 있으면 입출금 명세가 있고, 그럼 그 돈이 어디서 왔는지도 추적이 가능하다. 박자병 명의의 계좌로 평양 모르게 입금된 돈이 해외에서 왔다면, 동남아든 유럽이든 해당국 대사관이나 금융기관에 연수 나가 있는 직원들을 통해 역추적할 수 있다. 실제로 해외까지 조사가 이뤄졌을 수도 있고, 박 총지배인이나 한 부지배인이 계좌자료를 들이밀며 윽박지르는 검찰소 직원들에게 자백했을 수도 있다. 박 총지배인 본인이 한때 39호실 검사부에서 일했던 만큼, 그런 추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4월 하순 52개 계좌 모두 하나의 계좌로 통합됐다는 것은) 결국 모르고 있었던 13개 계좌의 정체를 모두 파악했다는 뜻이 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북한 검찰은 비자금 계좌의 주인인 박자병이 죽었다 해도 그 합법적인 권리 승계자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근 수개월 사이 북한이 BDA뿐 아니라 다른 해외 계좌에 대해서도 포괄적인 조사를 벌인 일이 있다고 전했다. 평양 당국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무자들의 비자금 계좌가 또 있는지, 있다면 그 돈은 어디서 온 것인지 등에 대한 조사였다는 것. 박자병 총지배인의 횡령을 둘러싼 이러한 과정 때문에 BDA 문제에 대한 북한의 대응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코레스’의 연쇄고리
▼ 4월10일 미국이 BDA 자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조치한 이후에도 북한이 이를 계속 미룬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계좌주가 파악됐다면 얼마든지 인출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그간 평양이 그토록 BDA 자금에 집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인데.
“동결만 풀어놓으면 북한이 현금으로 인출할 것이라는 생각은 국제금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나온 것이다. 현금으로 들고 나가는 것은 북한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돈을 다시 어느 해외 은행에든 입금해야 대외결제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요는 돈 자체가 아니라 국제금융망 사용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어차피 평양의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쓰고 가는 달러화 현금도 가방에 담아 해외에 반출해 해외 은행에 입금한 후에야 대외결제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달러화 송금은 무조건 미국 은행을 거쳐야만 국제금융망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신환이 될 수 있다. BDA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북한 외교관들이 수십만달러 규모의 달러화 현찰을 들고 다니다가 외국 공항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국내에 쌓인 달러화는 무조건 해외로 갖고 나가서 입금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달러화의 모국인 미국 은행과 ‘코레스 협정(correspondent agreement)’을 맺고 있는 자국 내 은행을 통해 해외 반출이 가능하지만, 북한은 이게 자유롭지 못하다. 테러지원국 지정 등으로 미국 은행에 예금을 상계처리 할 코레스 계좌(correspondent account)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국 내에 모인 달러화 현찰도 제3국 은행으로 가지고 나와서 거기서 계좌를 만들어 그 은행이 미국과 상계처리 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국제금융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국경을 넘는 송금을 하려면 양국의 은행이 서로 코레스 협정을 맺어 계좌를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송금’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현찰이 그 나라의 은행으로 가는 경우는 없다. A은행이 B은행으로 500만달러를 송금한다면, ‘스위프트 시스템(swift system)’이라는 전산망을 통해 A은행에 만들어놓은 B은행 명의의 계좌 잔고를 500만달러 늘리고 B은행에 만들어놓은 A은행 명의의 계좌 잔고를 500만달러 줄이는 식으로 상계처리 하는 것이 ‘송금’이라는 행위의 실체다. 이때 쓰이는 계좌가 코레스 계좌, 이러한 처리를 약속하는 것이 코레스 협정, 이 협정을 맺어놓은 상대 은행을 코레스 은행이라고 부른다.
코레스 협정은 양자협정이므로 원칙적으로는 A은행이 C은행에 돈을 보내려면 두 은행이 서로 협정을 맺어야 한다. 그러나 B은행이 양쪽과 모두 협정을 맺고 있다면 A와 C가 직접 협정을 맺지 않아도 B를 거쳐 송금이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세계 각국의 은행들은 거미줄과 같은 협정의 그물망으로 연결돼 웬만한 국가의 웬만한 은행으로는 모두 송금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외국 은행들끼리 오가는 달러화 표시 전신환을 ‘유로달러’라고 한다(1950년대 ‘유럽 은행이 사용하던 달러화 표시예금’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으로, 현재 유럽연합의 통화인 ‘유로’와는 관련이 없다). 문제는 달러화 현찰을 전신환으로 만들려면 달러화의 본국인 미국 은행이 그 코레스 연쇄고리의 어느 단계에든 끼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달러화 예금이 어디서 어디로 송금되든, 애초에 그 예금을 가능케 한 물리적인 현찰 자체는 최종적으로 태환(兌換)이 가능한 미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2005년 9월 미 재무부가 자국 은행들에 대해 북한 자금을 중개하는 은행과의 거래를 조심하라는 ‘경계령’을 발동했기 때문에 북한이 현찰 달러화를 얼마 갖고 있든 이를 전신환으로 만드는 게 어려워졌다. BDA는 북한이 달러화 현찰을 전신환으로 만드는 주요 해외 은행이었고, 다른 은행들도 BDA와 같은 일을 당하게 될까봐 달러화가 아닌 북한의 홍콩달러나 유로화의 송금처리조차 꺼리게 됐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돈 2500만달러가 있고 없고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2500만달러를 현찰로 인출할 수 있게 해줬다는 4월10일의 조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북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 국무부든 한국 정부든 언론이든 돈만 인출할 수 있게 해주면 BDA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김정일 비자금’은 없다
▼ 미국이 2500만달러를 인출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하면 북한이 이를 문제 해결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그간의 예측은 이 돈이 김정일 위원장의 비자금이라는 분석 때문이었다. 이 돈이 묶이는 바람에 고가의 선물로 측근들의 충성을 관리하는 그간의 통치방식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지금 한 설명은 이와는 거리가 있는데.
“북한에서 국제금융을 총괄하는 핵심부서는 중앙당 39호실 재정경리부이고, 39호실이 만든 은행이 조선대성은행이다. BDA 계좌를 관리하던 조광무역은 39호실이 만든 회사 대성총국의 산하기관이다. 사족이지만, 흔히 조광무역이 마카오에 나와 있는 ‘로열 패밀리’를 관리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 업무는 서기실이나 39호실 요원들이 직접 나와 처리한다. 애초에는 출납기관 성격이 강했던 조광무역은 1990년대 초에 서기실 과장 한 사람이 나와 근무하면서 급속도로 힘이 커져 동남아 일대의 무역 전체를 관할하기도 했다. 조광무역이 39호실 산하인 만큼 당 자금을 관리했던 것은 사실이고, BDA 계좌도 상당수가 대성은행 명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김정일의 비자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정일의 비자금’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흔히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법적으로 만든 비자금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북한에서는 국가와 지도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김정일이 곧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의 돈은 모두 김정일의 돈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지시로 북한의 모든 기관, 모든 기업이 갖고 있는 돈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정일은 국가회계 이외의 다른 주머니를 만들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BDA뿐 아니라 ‘스위스 은행에 김정일 비자금 수억달러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도 의미가 없긴 마찬가지다. 북한 은행이나 기업소의 돈은 그게 외화든 북한 돈이든, 해외에 있든 북한에 있든 모두 김정일이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꾸 김정일의 비자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자기 시각에 억지로 꿰어 맞추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북한의 모든 외화지출은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 가능하다. 각 은행과 기관, 기업소는 모두 한 해에 얼마의 외환을 어디에 쓸지 중앙에 보고하고 이는 김정일의 서기실(비서실)에 올라가 최종결제를 맡는다. 예정에 없던 지출을 하려면 역시 김정일의 친필 사인을 받아야 한다. 일반 기업에서 돈이 나가려면 사장의 결재를 맡아야 하는 것과 똑같다. 북한이라는 국가의 사장이 김정일인 것이다. 다만 이 회사는 주주가 따로 없고 김정일이 주인일 뿐이다. 따라서 배임도 횡령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 외의 사람이 김정일의 결재 없이 외환을 쓴다면 그게 비자금이고 불법자금이다.”
북한의 외화관리법은 국가가 모든 대외경제교류를 독점하고 모든 외화를 통일적으로 통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기관과 기업소는 국가계획위원회에 외환관리계획을 제출하고 내각의 재정성이 작성해 김정일 위원장의 승인을 얻은 외화재정계획을 부과받아 준수한다. 2002년 이전까지는 아예 모든 외환을 재정성이 수집해 보유하는 식이었다가 외화관리법이 개정되면서 각 기업소와 기관이 부분적으로 외환을 자기 명의의 계좌에 보유할 수 있게 됐지만, 국가의 승인 없이 사용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측근들에게 벤츠나 시계를 나눠줄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는 2500만달러가 없어서가 아니다. 각국의 은행이 북한 자금을 중개하는 것을 꺼려 국제금융망을 통한 대외결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해외에서 물건을 사기가 어려워진 것이 문제다. 돈이 문제였다면 다른 돈으로 사면 되는 것 아닌가. 2500만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걸 못 쓴다고 당장 구멍이 날 만큼 큰돈도 아니다.”
‘버티기’의 배경
▼ 북한의 대외결제가 그처럼 큰 문제였다면 BDA 문제가 터진 이후 북한의 실물경제 지수가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해외 물품 수입이 불가능해졌다면 중국산 수입쌀의 가격이 폭등하는 등 물가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을 텐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국제금융망을 통한 대외결제가 필요한 부분은 국가가 관장하는 공식 무역에 한정된다. 이와는 별개로 ‘보따리 장사’로 통칭되는 개인들의 비공식 무역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굳이 은행을 통해 송금하지 않는다. 달러든 중국 위안화든 현찰로 거래하면 된다. 10만달러면 큰돈 같지만 사실 서류가방 하나에 들어간다. 이 정도 현찰을 지니고 북-중 국경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대외결제 장애로 공식 무역이 타격을 입어도 비공식 무역이 이를 만회하기 때문에 실물경제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또 공식경제 분야에도 구멍이 있다. 북한은 COCOM(對공산권수출통제)이 있던 냉전시대부터 금수조치나 경제제재를 뚫고 거래하는 노하우를 쌓았고, 이를 이용해 폭리를 챙기는 외국 무역상도 적지 않다. 공식적으로 금지된 거래니만큼 위험수당 차원에서 1만달러짜리 물건을 10만달러에 파는 식이다. 그런 라인들이 곳곳에 있다. 아마 이 주변 어디에도 있을 것이다(웃음).
물론 그런 비정상적인 거래의 경제적인 부담이 크다보니 북한은 하루빨리 BDA에서 비롯된 대외결제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언젠가 풀릴 게 확실하다면 한두 달쯤 늦어져도 비공식 무역 등에 의지하며 참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BDA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이중적이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풀어야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2·13합의 이전에는 쫓기는 것 같았던 북한이 이후에는 도리어 버티기에 돌입한 이유다.”
“무지한 건 북한이 아니라 남한”
▼ 북한의 최종목표가 BDA 자금 송금을 통한 대외결제 장애의 사실상 해소였다면, 또 BDA에 들어 있는 미국 달러의 송금이 구조적으로 미국 은행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면, 애초부터 미국 은행이 나서서 중개를 자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야 하나.
“그렇다. 애초에 이 일은 달러화의 본국인 미국 은행이 나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기에 중국 은행을 통해 입금하겠다고 한 것이나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은행, 심지어 한국의 수출입은행 얘기가 나왔던 것이 오산이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한 방식으로도 홍콩달러나 유로화는 송금이 가능해지지만, 결국 북한에 필요한 것은 세계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달러화 송금의 정상화이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 은행의 중개가 필수적이다. 미국 은행이 송금에 간여하면 다른 나라 은행들이 안심하고 북한 돈을 받아줄 수 있게 된다는 분석은 오히려 부차적인 부분이다.
북한은 국제금융과 대외결제에서 달러화가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 은행을 거쳐야 한다는 판단도 정확하게 내렸다. 오히려 미국과 한국 정부가 그러한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이 국제금융에 무지한 게 아니라, 남한이 북한의 국제금융에 대해 무지한 셈이다.
나만 해도 대외결제에 관한 모든 것을 북한에서 배웠다. 코레스 제도에 대한 정리는 오히려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돼 있다. 북한은 국가 전체 외화수지(balance)의 균형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는 원칙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어 남한보다 더 신경을 쓴다. 북한에 있는 10여 개 은행 가운데, 남한의 한국은행에 해당하는 조선중앙은행 하나만 국내 금융을 담당할 뿐 나머지는 모두 대외결제에 종사한다. 각각 자본주의 국가의 은행이나 기업과 신용장을 만들어 무역거래를 연결하고 외환을 거래한다. 신입 행원이 처음 은행에 들어가면 해외 신용장 통제규정과 원문부터 암기한다. 내가 처음 대성은행에 들어갔을 때 보통 한 건에 500만~1000만달러짜리 결제를 맡았다.
북한의 은행원들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대우를 받고, 당원인 경우가 많다. 보통 김일성종합대학이나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영어 등 서방 언어를 전공한 사람들을 뽑아 은행 내에서 OJT를 하며 가르친다(북한의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다보니 국제경제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이나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의 금융기관이나 투자회사, 민간기업에서 연수를 받는다. 6개월에서 2년 정도 그 은행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실무를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이미 1970년대 이전부터 꾸준히 유지돼왔다. 나만 해도 오스트리아 빈의 은행에서 2년간 연수했고,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처럼 지금 북한의 국제금융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도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최세웅 대표에 따르면 이들 은행은 모두 국영은행으로 기관별로 필요에 따라 설립한 것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내각 재정성 소속으로 조선중앙은행 산하인 조선무역은행이 대외결제를 총괄적으로 책임진다. 그밖에 당 경제정책검열부 소속의 금강은행, 인민무력부 소속의 금성은행, 군수경제를 담당하는 제2경제위원회 산하의 용악산은행 등이 있고, 해외에도 합작법인과 지점을 운영하며 외환을 거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주요 은행의 총재는 남한으로 치면 장관급이고, 은행별로 직원 수는 400~700명 선이다. 모두 합하면 5000명 정도인 셈인데, 그중 해외 연수를 거친 사람이 절반을 조금 넘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남한의 일반 은행보다 국제금융 업무에는 더 밝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웃음).”
‘합법-비합법 자금 분리’의 무리수
▼ BDA 문제가 해결되고 2·13 프로세스가 본격화된 이후에 IMF(국제통화기금)나 세계은행(World Bank),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차관으로 북한의 경제개발 종자돈을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다. 최근에는 통일부나 국정원 등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계획과 업무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한이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국제금융기구에서 보면 남한은 제3자일 뿐이다. 남한이 중간에 커미션을 챙기려는 게 아니라면 나설 이유가 없다.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위한 프로세스는 북한과 해당 국제기구가 직접 협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다.
차관도 마찬가지다. 북한도 이미 1970년대 중화학공업 개발과정에서 서방국가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도입한 경험이 있다. 현재도 북한은 120억달러 이상의 외채를 지고 있는 상태다. 그런 프로젝트를 이미 충분히 수행해본 북한 당국이 차관 도입과정에서 남한의 기술적인 도움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한국이 보증을 서면 차관 도입이 쉬워질 것이라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는데, 공적 차관을 제3국의 보증으로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제3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도,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혹은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서울이 고민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웃집에서 아이를 낳는데, 그 집 산모는 이미 애를 많이 낳아봤는데 옆집에서 무슨 명목으로 끼어들겠나(웃음).”
“예단으로는 정답 낼 수 없어”
최 대표는 인터뷰 내내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과소평가가 정확한 판단과 예측을 어렵게 한다고 강조했다. 2·13 프로세스의 첫 단추인 BDA 문제를 둘러싼 지난 3개월여의 혼돈이야말로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1년6개월간 합법자금과 비합법자금의 분리로 실마리를 풀어내려 무리수를 두었던 한국이나, 현찰로 인출할 수 있게만 해주면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판단한 미국이나, 본질을 보지 못해 어긋나는 답안지만 내놓았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속사정은 국제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북한이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할 리가 없다고 예단하는 바람에, ‘통치자의 비자금’ 같은 사고방식으로 접근할 것이라고 넘겨짚는 바람에 시간이 지연된 셈이다.
이는 앞으로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경제제재란 돈 문제이고, 돈 문제에 대한 이해관계는 북한 역시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다. 이걸 명확히 인식해야 북한의 다음 수와 앞으로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북한을 이상한 나라로 취급하는 동안에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