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반역자의 피, 천한 관기(官妓), 탐관오리의 아내’ 뛰어넘은 마지막 승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06-04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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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대한 돈을 희사해 고향에 고등보통학교를 세운 여장부가 있었다. 모든 이가 그의 덕성을 기리지만, 정작 그가 어떤 경로로 거부(巨富)가 됐는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남편이 있었는지, 최고의 생이었다는 소문은 어떻게 나왔는지, 왕실을 등에 업은 권세는 무슨 수로 손에 쥐게 됐는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반란과 망국의 격동기, 홍진(紅塵)의 저잣거리에서 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온 여인은, 인생 막판에 어떻게 모든 조선인의 존경을 받게 됐나.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최송설당의 당시 사진과 ‘신여성’ 1933년 2월호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왼쪽).

    1935년 11월30일, 경상북도 김천고등보통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이른 아침부터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1931년 5월,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김천고보는 대구고보(현 경북고)에 이어 경상북도에서 두 번째, 사립으로는 최초로 설립된 중등학교였다. 당일 오전 10시30분에는 개교 기념식과 신축교사 낙성식, 설립자 동상 제막식 등 세 가지 행사가 차례로 거행될 예정이었다.

    시간이 가까워오자 하객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행사가 거행될 김천고보 운동장에는 교직원 37명, 전교생 250명, 하객 700여 명 등 1000여 명이 운집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카자키(岡崎) 경상북도 도지사, 와타나베(渡邊) 학무국장,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 이인 변호사 등 경향 각지의 저명인사가 총출동해 단 위에 앉았다. 단 가운데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든 노파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다소곳이 앉아 밝은 얼굴로 하객을 맞았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여인’

    행사는 1부 신축교사 낙성식과 개교 기념식, 2부 설립자 동상 제막식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정열모 교장의 개식사가 끝나자 오카자키 도지사와 와타나베 학무국장의 고사(告辭)가 이어졌다. 1부 행사가 끝나고 곧이어 본 행사에 해당하는 2부 설립자 동상 제막식이 거행됐다.

    산 사람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당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우상이라고 동상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해 5월 시작된 김천고보 설립자 동상 건립 운동은 김천은 물론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조만식, 방응모, 윤치호 같은 저명인사가 성금을 보내왔고, 신의주고보, 동래일신여학교, 대구계성학교 등 김천고보와 아무 상관없는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까지 성금을 모아 보내왔다. 만주에서 성금을 보내온 사람도 있었다.



    설립자의 약력 보고와 사업 보고가 끝나자 각계 인사의 축사가 이어졌다. 제일 먼저 조선중앙일보 여운형 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조선중앙일보를 경영하는 여운형이외다. 최송설당 부인 동상 제막식에 초청을 받아서 축사를 드리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경성을 떠나 남으로 내려오는 동안 쓸쓸하고 적막한 지방 상태가 눈에 띄는 것이 마치 저 광활한 사막을 밟는 듯한 감상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김천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탑이라 할 만한 이 고등보통학교가 뚜렷이 서 있음을 발견함에 오아시스를 만남과 같아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큰 사막 가운데 이러한 오아시스가 일개 부인의 피땀으로 말미암아 건설된 것이고 보니 동서고금의 역사를 들춰보더라도 그 유례가 극히 적은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을 위해서는 천금도 아끼지 않으면서 공익사업은 애써 외면하는 부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양심이 있다면 최송설당의 거룩한 동상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서 있는 김천고보 앞을 지날 때 반드시 머리가 숙여지고 무슨 감상이 일어날 것이외다.” (‘송설 60년사’)


    송진우 사장, 방응모 사장, 이인 변호사도 차례로 단상에 올라 최송설당을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긴 여운형 사장에 못지않은 찬사를 보냈다. 사회자는 추운 날씨에 하객들의 건강이 상할까 염려해 이인 변호사의 축사를 끝으로 “이만 축사를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스님 한 사람이 사회자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단상에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는 “나는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중인데, 최송설당 여사에게 축사를 한 마디 드리기 위해 일천사백리 길을 일부러 왔으니, 여러분 용서하시오” 하며 축사를 이어갔다.

    1000여 명의 축하를 받으며 동상을 봉정받은 최송설당은 학급 증설을 위해 3만원을 추가로 기부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현재 가치로 30억원에 달하는 3만원은 동상 건립비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 오전 10시30분부터 장장 3시간에 걸쳐 치러진 행사였지만, 그 누구도 짜증내거나 한눈팔지 않았다.

    김천의 숙원 사업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최송설당 동상 건립식에 참석한 송진우(왼쪽), 여운형과 찍은 기념사진.

    1920~30년대 조선의 중등학교 입시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게 치열했다. 명문학교든 아니든 가릴 것 없이 웬만한 중등학교의 입시 경쟁률은 10대 1을 훌쩍 넘겼다. 진학 희망자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입학시험에 통과한다고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골학생이 중등학교가 있는 도시로 유학하자면 학비와 생활비까지 매달 20~30원은 필요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50원 정도이던 시절, 20~30원은 가난한 농민이 부담하기에 벅찬 금액이었다. 도시로 유학 갈 형편이 못 되는 청년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학업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등학교 설립은 김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이었다. 1924년 김천 주민들은 ‘김천고보 기성회’를 조직하고 중등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했지만, 재단 설립에 필요한 30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무려 6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30만원은 가난한 김천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하기에는 몹시 큰돈이었다.

    김천 주민들의 숙원 사업은 1930년 서울 무교정에 사는 김천 출신 일흔여섯 살 노파의 조건 없는 기부로 결실을 보았다. 철종 6년 화순 최씨 집안에서 태어난 노파는 이름이 없어 ‘송설당(松雪堂)’이란 호를 이름 대신 썼다. 전라도 고부에서 살던 부친이 김천으로 이주해 터를 잡아서 ‘고부댁’ ‘고부할매’라고도 불렸다. 최송설당이 재단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재산은 김천, 김해, 대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20만2000원 상당의 토지와 10만원의 은행예금까지 총 30만2000원이었다. 그처럼 거금을 교육사업에 기부한 이유는 한없이 소박했다.

    “나는 원래 자수성가해 남보다 넉넉히 지내는 편입니다.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마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일찍부터 생각했으되 오늘까지 결정을 못하다가 이번에야 겨우 결정을 한 것입니다. 김천은 나의 고향인 만큼, 항상 그곳을 생각해왔습니다. 경상북도는 인구가 그렇게 많은데 중등학교가 한 곳밖에 없는 것을 늘 유감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학교가 설립되면 나도 김천으로 이사할 것이며, 김천 지역의 인사들과 협의해서 일을 처리하려 합니다.” (‘최송설당 여사 특지’, ‘동아일보’ 1930년 2월26일자)


    재단 설립 자금이 마련됐다고 학교가 순탄하게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경상북도 학무국은 김천에는 고등보통학교 같은 인문계 중등학교는 필요 없다며 농업학교나 상업학교 같은 실업학교가 아니면 재단 설립 인가를 내주지 않으려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0년 가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락하자 기부받은 토지에서 나온 소출로 교사 신축 대금을 치르려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공사 대금이 2만원가량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최송설당은 자신이 살고 있는 무교정 자택마저 내놓았다. 쉰다섯 칸 무교정 저택은 대지 234평, 시가 2만5000원에 달했다.

    살던 집까지 바친 최송설당의 열성 덕분에 교사 신축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그러나 임시 교사가 완공될 때까지 학무국은 실업학교가 아니면 재단 설립을 인가할 수 없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고보를 설립할 수 없다면 기부를 철회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학무국과 담판을 벌였다. 학무국은 공립학교도 세워주지 않으면서 사립학교 설립마저 막으려 드느냐는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실업교육을 병행한다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재단 설립을 인가했다.

    최송설당의 아낌없는 기부와 결연한 의지 덕분에 김천고보는 1931년 5월 개교했다. 그때부터 김천의 가난한 집 자식들도 실력만 있으면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김천고보 설립에 기부한 최송설당의 32만7000원은 적어도 매년 100여 명의 젊은이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사연 많은 여인

    김천고보를 설립할 때까지 최송설당은 대중에게는 물론 재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인이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주위 사람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대한제국 고위관료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기자들과 만나는 것도 꺼리지 않았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최송설당이 김천고보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일보 기자가 찾아갔다.

    뚱뚱하고 점잖아 보이는 여사는 기자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으시오.”

    기자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으며 간단한 첫인사와 기부에 대해 치하를 드린 후

    “경성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벌써 서른다섯 해가 지났네요. 동학란에 살 수가 없어 상경했지요.”

    지난날의 슬픔이 떠올라서인지 여사는 감개무량한 듯 얼굴을 숙였다. 기자가 다시 물었다.

    “가족은?”

    “아무도 없어요. 영감도 자식도.”

    “영감님은 돌아가셨어요?”

    “예. 젊어서 없었소.”

    자세한 말을 피하며 다시 쓸쓸한 표정이 떠도는 여사의 가슴엔 어떤 애화가 숨었는가? 곁에 앉은 여사의 조카라는 분이 말했다.

    “일생을 혼자 지내셨습니다.”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세운 부인’, ‘조선일보’ 1930년 3월5일자)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삼천리’ 1930년 5월호에 실린 ‘최송설당 여사 일대기’ 기사.

    최송설당이 꺼리는 기색을 보이자 기자는 궁금한 것을 묻어두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기부하신 동기는?”

    “내 본가가 본래 몹시 빈한해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근근이 살았습니다. 바느질삯으로 그때 엽전으로 두 냥 반짜리 밭을 한 뙈기 얻었지요. 그래선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가지고 농사를 시작했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밭 한 뙈기가 논 한 마지기가 되고, 한 마지기가 두 마지기, 두 마지기가 닷 마지기 이렇게 늘어갑디다. 그래 그것을 붙잡고 이렇게 살아왔지요.”

    최송설당은 궁핍했던 과거에 비겨 현재의 처지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 넉넉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인생은 고해라고 사람이 살려면 왜 고생이 없겠소. 누구나 다 많은 신고를 겪는 것이지요. 참 고생을 많이 했소. 별별 고난을 다 겪으며 한평생을 보냈지요. 환갑을 지날 때까지 젓가락을 들고 밥상 앞에 앉으면 집어 먹을 것이 없었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친가 8대의 성묘까지 다 지내고,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어머니 구순 잔치까지 해드리고 나니까 내가 환갑이었소. 그래, 진갑까지 다 치르고 나니 ‘이제는 내 일을 다 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그때부터 뭘 좀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벌써 15년이 되었구려. 세월도 빠르지. 긴 밤을 자지 않고 생각으로 밝힌 적도 많았건만 일이란 게 어디 그렇게 속히 됩디까. 내년에는, 내년에는, 하고 미루다보니 10여 년이 흘렀구려. 그래 작년 가을 추수가 끝나면 시작하려 했는데 수십만원이란 돈이 어디 뚝딱하고 나옵니까. 그래 또 한 해를 놓쳤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수 같은 세월이니 살날이 몇 날이나 남았겠소. 이번엔 아주 용단을 내어 올해 먹을 식량까지 다 내놓았소.

    이젠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같이 마음이 턱 놓이오만, 또 한편으론 살림이 궁해서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도 없진 않소. 아니, 이젠 내가 굶어죽어도 좋소. 일만 잘되면 그만이오. 그저 이젠 달 밝은 양춘가절이나 중추구월에 평안히 갔으면 하는 원밖엔 없소.”

    최송설당의 숭고한 마음에 기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독하시겠습니다. 혼자 계셔서.”

    “고독할 게 있소? 이제 학교가 설립되면 그 학생들은 모두 내 자식들인데.”

    한 배에서 난 자식 중에서도 경중을 가리는 부모가 있거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어린 것들을 모두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며 시원스럽게 웃는 여사는 과연 여걸이었다. 그러나 주름살 잡힌 여사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고독해보였다.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세운 부인’, ‘조선일보’ 1930년 3월5일자)


    최송설당은 50편의 가사와 258수의 한시를 남긴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이다. 예순여덟 살 되던 1922년에는 ‘송설당집’ 3권 3책을 간행했다. 최송설당의 시가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만큼 작품 수준도 높다. ‘송설당집’에 실린 자전적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이가 열여섯에 임박하자 마침 성혼의 논의가 있었으나, 나는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고하기를, “만일 한 번 남에게 몸을 맡기면 친정 일에는 여가를 내기 어려운 까닭에 결단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 했다. 얼마간 돈과 재산을 모아 피붙이들을 한곳에 불러 모으고, 농사짓는 이는 농사짓게 하고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게 하여 삼가고 두려워하며 세월을 보낸 지 오늘로 40여 년이나 되었다.

    旣而年迫二八 方議成婚 余失志而告之曰 若一委身於人 親家事有難暇 顧所以決意不嫁 孱鳩錢財 會集宗族 可使以農者農 學者學而 兢度日者于玆四十有年矣 (‘송설당서(松雪堂序)’ 중에서)


    최송설당은 1930년 조선일보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영감은 젊어서 없었다’고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1922년 ‘송설당서’에는 친정 일을 돌보기 위해 16세에 성혼 논의를 뿌리치고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한편 1939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전혀 다른 기록이 보인다.

    최송설당 여사는 병신년에 남편 이씨와 같이 서울로 이주했다. 여사는 자기가 행복해지려면 남편을 출세시켜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장안 큰길을 활보하면서 남편을 출세시킬 길을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결국 운명은 여사에게 방편을 허락했다. 의외의 행운으로 여사의 남편 이씨가 경상남도 창원군수로 등용문에 오르게 되자 더할 수 없는 영예는 일신에 집중되었다.

    여사는 만인의 찬양과 환호를 받으며 창원군수로 부임하는 남편 이씨를 따라갔다. 남편 이씨가 김해군수로 전보된 후 재산이 크게 불어났고 여사의 영귀(榮貴)도 덩달아 커졌다. 시간이 흘러 이씨는 군수에서 물러나 여사와 같이 경성에 올라와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남편이 노쇠하여 세상을 떠나자 가산 전부를 여사가 상속받았다. 무심치 않은 운명은 포부와 웅도(雄圖)가 있는 여사에게 큰 재산을 안겨주었으리라. (‘고 최송설당 여사의 사십구재를 당하여’, ‘동아일보’ 1935년 8월 15일자)


    창원군수와 김해군수를 지낸 버젓한 남편이 있었던 최송설당은 왜 결혼한 사실을 애써 숨기려 했을까? 남편 이씨를 창원군수에 오르게 한 ‘의외의 행운’이란 무엇이었을까?

    가문의 신원(伸寃)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1935년 11월30일 김천고보 교정에 설립된 최송설당 동상. 조각가 김복진의 작품으로, 1944년 일제에 의해 전쟁용 철물로 공출당해 사라졌다. 오른쪽은 현재 김천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최송설당 동상.

    최송설당은 1855년 김천에서 최창환의 세 딸 중 장녀로 태어났다. 원래 최씨 집안의 터전은 평안도 정주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관 벼슬을 하던 최송설당의 증조부 최봉관은 평안도 선천군에서 난군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난군에 패해 성마저 빼앗겼다. 난이 진압된 후 최봉관은 외가가 난에 가담했고 자신은 끝까지 항전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옥사했다. 맏아들 최상문을 비롯한 네 아들은 전라도 고부로 유배됐다. 멸문의 화를 당하고 전라도 고부에 유배된 최상문은 고부에서 외아들 최창환을 얻었다.

    최창환은 맏딸 송설당이 태어나기 5년전 고부에서 김천으로 이주했다. 고부에서 첫부인과 사별한 최창환은 김천에서 경주 정씨 집안 처녀를 후취로 맞았다. 첫아이를 임신한 정씨는, 달 밝은 밤에 흰옷 입은 노인이 노란 학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붉은 글자로 쓴 책 한 권을 주고 가는 태몽을 꾸었다. 조상의 원한을 풀어줄 아들을 간절히 원하던 최창환은 아내의 태몽을 듣고 아들 낳을 징조인 줄 알고 기뻐했다. 하지만 정작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다. 둘째아이도, 셋째아이도 모두 딸이었다.

    시골서당 훈장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최창환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과 멸문의 화를 당한 가문을 신원(伸寃)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어린 최송설당이 신세를 한탄하는 부친에게 다가와 공손하지만 비장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사내가 아니면 아버지의 한을 풀 수 없습니까? 조상의 원한은 제가 꼭 풀어드리겠습니다.”

    최송설당은 어려서 언문과 한문을 깨쳤고, 길쌈과 바느질에도 능했다. 소녀 시절 이후 마흔두 살까지 최송설당이 김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개화여성열전’에서 ‘시집도 안 간’ 최송설당이 열여섯 살에 머리를 틀어올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소저의 나이 이팔춘광이 차게 되니 얼굴은 활짝 피어 돋아오는 달덩이 같고 재질 또한 출중하므로 모든 사람이 탐내어 각처에서 통혼이 들어왔다. 동무들도 사주를 받고 택일을 하고 시집을 가고 수선수선 들끓었으나 소저의 한번 먹은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출가하지 않는다. 출가외인이라는데 내가 만약 남의 집에 몸을 맡기면 나의 맹세는 수포로 돌아갈 것 아닌가.’

    그녀는 더욱 마음을 도사려 먹고 다시 부모님 앞에 나아가 굳은 약속을 드리기 위해 하늘을 가리켜 맹세했다. 비록 혼인은 하지 않을망정 계례(禮·약혼한 여자가 올리던 성인 의식)를 행하는 것처럼 칠흑 같은 머리에 자주색 접영댕기로 끝을 물려 치렁치렁 땋아 늘였던 것을 거둬 올려 은죽절을 꽂았다. 그녀는 군자다운 마음씨를 매화잠(梅花簪·매화 무늬 비녀)에 얹어놓는다는 의미에서 은방에 맡겨 다른 처녀들의 것보다 비녀머리를 크게 만들고, 채색 올린 양 옆으로 붉은 산호봉을 박아 일편단심을 상징하게 했다. (최은희, ‘김천고보 창설, 최송설당’)


    최송설당 자신은 삯바느질과 농사로 땅을 불려 나갔다고 회고했지만, 장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최송설당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를 다했다는 평이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장삿길에 나서서 여러 방면으로 천신만고한 끝에 남의 집 가세를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생활을 하게 되었다. (‘최송설당 여사 일대기’, ‘삼천리’ 1930년 5월호)


    어떻게 재산을 불렸든 최송설당이 20대 후반에 이르렀을 때 최씨 집안은 김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됐다. 멸문의 화를 당하고 70년 가까이 고부와 김천을 떠돌던 최씨 집안으로서는 격세지감이었다. 1882년 스물여덟 살이 된 최송설당은 6촌 동생 최광익을 부친의 양자로 입적해 후사를 걱정하던 부친의 한을 풀어드렸다. 부친의 나이 쉰여섯, 최광익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부친은 맏딸의 도움으로 양자를 들인 4년 후 조상의 원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훗날 최송설당은 ‘병신년(1886년) 동학란’을 피해 서울로 이주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일으켜 삼남을 뒤흔든 동학농민운동은 갑오년(1884년)에 진압됐다. 최송설당이 실제로 ‘동학란’을 피해 상경했더라도, 그때 ‘동학란’은 갑오년 동학농민운동이 아니라 병신년 김천에서 지엽적으로 일어난 동학도의 소요 정도였을 것이다.

    1886년 마흔두 살에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 최송설당은 적선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문의 신원을 위해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할 길을 뚫었다. 부인들의 남편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임금께 자기 가문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려 한 것이었다. 간절한 염원과 노력 덕분에 최송설당은 상경한 지 1년 만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행운을 잡았다.

    영친왕의 보모가 되다

    1887년 2월 고종은 1년간의 아관파천을 끝내고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건립을 준비했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 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기 직전 잉태를 했다. 일찍부터 불교에 귀의해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리던 최송설당은 강남 봉은사에서 국운의 융성과 영특한 왕자의 탄생, 그리고 조상의 신원을 위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봉은사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세도를 부리던 덕수궁 전화과장 이규찬의 부인 엄씨도 매일같이 찾아와 불공을 드렸다. 엄씨 부인은 다름 아닌 엄 상궁의 친정 아우였다. 엄씨 부인은 최송설당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해 엄 상궁에게 찾아가 최송설당을 칭찬했다.

    엄 상궁 역시 최 여사의 지성을 가상히 여겨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차 산월을 맞았다. 최 여사는 출산 시에 필요한 제반 물품을 누락 없게 고급품으로 선택해 엄씨 부인을 통해서 엄 상궁에게 바쳤으니 이는 나라님께 진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왕자 은(垠)이 탄생하고 엄 상궁에게 귀비를 책봉하게 되므로 엄비는 이런 말씀을 고종황제께 진상하였고, 고종은 “서민층에서 이런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바 없다” 하며 매우 장한 일이라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고종은 즉시 최 여사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친히 보신 다음, 근엄 단숙한 태도에 흔연히 호감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왕세자의 보모로 명했다. 여사는 매사에 신중하고 민첩하여 황제의 신임을 얻어 ‘송설당’이라는 호를 하사받고, 조정 중신의 부인들과도 익숙히 교제를 하게 되어 조야에서의 세력이 떨치는 판이었다. (최은희, ‘김천고보 창설, 최송설당’)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최송설당의 후견인이었던 영친왕의 친모 엄 귀비(좌).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우).

    ‘소문에 들으면 최송설당이라는 이름은 이태왕(고종)께서 지어주신 것이라고도 한다’는 ‘신여성’ 1933년 2월호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 ‘송설당’이란 호가 고종이 하사한 것이라는 속설은 1930년에도 있었다. 그러나 최송설당은 ‘송설당서’에서 “삼동에도 타고난 성품을 더럽히지 않는 자, 사물 가운데 ‘눈 속의 소나무(雪中松)’가 있는 고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이를 호로 삼는다”며 ‘송설당’이 자호(自號)임을 밝혔다. 고종이 최송설당에게 호를 하사한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호감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영친왕 이은의 보모가 된 지 4년이 지난 1901년, 최송설당은 고종에게 가문의 신원을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몰적(沒籍)된 최씨 가문을 복권시켰다. 최씨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한 지 무려 89년 만에 신원을 풀었다. 어린 시절 부친과 약속한 대로 조상의 원한을 푼 최송설당은 평안도 어느 곳엔가 아무렇게나 묻혀 있을 증조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김천에 허묘를 만들고 제(祭)를 지냈다.

    가문을 향한 최송설당의 정성은 조상의 원한을 푸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송설당이 힘써준 덕분에 1901년 종9품 영릉참봉 벼슬을 얻은 양동생 최광익은 7년 만에 정3품까지 수직 승차했다. 사촌동생 최한익과 최해익도 6품 벼슬을 얻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보위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을 구실로 황태자에 책립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최송설당은 영친왕 보모 생활을 끝내고 궁에서 나왔다. 영친왕 보모 생활 11년 동안 최송설당의 재산은 처음 상경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궁에서 받은 봉급도 적지 않았고, 궁에서 나올 때 엄 귀비가 토지를 하사했다고도 한다.

    이후 최송설당은 제일 먼저 평안도 정주를 찾아 조상의 선영에 제를 지내고, 흩어진 친척들을 불러 모아 화수회(花樹會·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의 친목 잔치)를 열었다. 그러곤 농사를 원하는 친척에겐 농토를 사주고 공부하려는 친척에겐 학비를 지급했다.

    1912년 최송설당은 무교정에 쉰다섯 칸짜리 저택을 짓고 ‘송설당’이란 당호를 내걸었다. 양동생 최광익의 열한 살 난 둘째아들 최석두를 입양했다. 부친도 양자를 들이고 자신도 양자를 들이는, 어찌 보면 기구한 운명이었다. 최석두는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고 자유분방한 예술가 기질을 지닌 최석두는 엄격하고 꼼꼼한 양모와 성격이 맞지 않았다. 최송설당은 최석두를 양자로 들인 지 14년이 지난 1926년 법적으로 수속을 밟아 파양했다.

    1914년에는 양동생 최광익의 맏아들 최석태를 정주와 선천으로 보내 조부가 고부로 유배된 이후 104년 동안 방치한 8대조까지 선조 묘소를 찾게 했다. 김천에 허묘를 만든 고조부 최봉관의 묘소를 선천 오목동에서 찾았고, 정주 백현에서 8대조와 7대조 묘소를 찾았다. 6대조 묘소는 봉학산에서, 5대조 묘소는 아미산에서 찾았다.

    최송설당은 서울 가좌동 석물공장에 의뢰해 최고급 석물을 제작해 기차에 싣고서 평안도 곳곳에 흩어진 선조들의 묘소까지 실어 날랐다. 오랜 세월 방치한 선조 묘소 앞에 석물을 안치하고 제수 음식을 차린 뒤 절을 올렸다. 이로써 최송설당은 조상의 죄를 씻고 가문을 일으키며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석물을 안치하는 문중의 현창(顯彰) 사업을 빠짐없이 마쳤다. 후손된 도리를 모두 마쳤을 때, 최송설당의 나이 이미 환갑이었다.

    기생 송설이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최송설당 장례식이 열린 김천시 모암동 공설운동장에 모인 인파. 최송설당은 모든 조선사람의 추모 속에 1939년 6월16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시종원 부경(副卿)을 지낸 퇴산 정환덕은 ‘남가몽’이란 비망록을 남겼다. 시종원 부경이란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 차장 정도에 해당한다. 정환덕이 고종과 순종을 최측근에서 보필한 인물인 만큼 ‘남가몽’에는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궁중비사가 풍부히 기록돼 있다.

    정환덕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김천에서 우거하던 복술(卜術)에 능한 천문역학자였다. 동향인 관계로 입궐 전부터 최송설당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남가몽’에는 최송설당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사가 아니라 궁중비사인 만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다음은 ‘남가몽’을 정리한 박성수의 ‘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규장각, 1999)에서 최송설당과 관련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기생 송설이는 본시 전북 고부 여자였는데, 아홉 살 때 어미를 따라 김천에 왔다. 너무 가난해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며 품팔이와 절구질로 어렵게 살았다. 급기야 어미가 딸 송설이를 관기(官妓)로 팔았다. 그때 송설이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아전 백모가 송설이의 미모에 반해 공금을 빼돌려 송설이를 속량(贖良)해주었다. 관기 신세를 면한 송설이는 김천시장에서 술집을 차려놓고 고부댁으로 이름을 바꿨다.

    아전 백모와 헤어지고 배문옥의 첩이 돼 수천냥의 돈을 벌었다. 얼마 못 가 배문옥과도 재산 문제로 다투다가 헤어졌다. 불과 10년 사이 고부댁이 소유한 토지가 1만냥에 이르러 김천 바닥에는 고부댁을 흠모하는 사내가 들끓었다. 그러나 정작 고부댁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내는 상주 출신 이용교였다.

    “꿈에 보았더니…”

    이용교는 일찍이 무과에 합격해 한때 오위장(五衛將)까지 올랐으나 개혁 바람에 직을 잃고 실업자로 전락했다. 이곳저곳 배회하다가 김천에 당도했는데 돈 많은 과부 고부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작업’에 들어갔다. 돈 좋아하는 여자는 돈으로 유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형 이홍교에게 300냥을 빌려 고부댁에게 보냈다. 불시에 300냥을 횡재한 고부댁은 이용교가 자기 집을 찾아주기 바랐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두 사람은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부댁은 반색을 하며 “영감님, 왜 우리 집에 오시지 않습니까. 오늘은 저와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손을 잡아끌었다. 이용교는 “요즘 관청 일이 바빠서 몸을 뺄 수가 없네 그려. 오늘은 못 가겠네” 하며 시치미를 뗐다. 고부댁은 이용교의 손을 잡은 채 “그렇지만 잠깐이면 됩니다. 가십시다” 하고 억지로 잡아끌었다. 이용교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척 고부댁을 따라갔다.

    고부댁은 돈 한푼 없는 이용교를 상좌에 모시고 주안상을 내놓았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김천 과하주(過夏酒)에다 해산물, 산나물을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왔다. 한 잔 두 잔 비우다보니 어느새 대여섯 순배가 돌고 이용교는 크게 취했다.

    이용교는 이대로 드러누우면 속셈이 탄로날까 두려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부댁이 한사코 붙잡으니 그때서야 못 이기는 척 다시 술잔을 들었다. 이용교는 밤이 깊도록 고부댁과 술을 마시다가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그날 이후 이용교는 고부댁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

    하루는 고부댁이 이용교에게 물었다.

    “서방님의 중형(仲兄)께서 송경 유수(개성 시장)로 계신다니 관작(官爵) 매매가 생소하지 않을 듯합니다. 가셔서 형님과 상의해 수령 한 자리 얻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일은 돈이 있고 볼 일인데, 적수공권으로 어찌 능히 이루겠는가.”

    “돈이야 필요하시다면 제가 감당할 터이니 염려 마시고 빨리 상경하셔서 중형과 상의하시지요.”

    “그대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수령 자리쯤이야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 아니겠소. 염려하지 마시구려.”

    고부댁은 사람을 시켜 세마(貰馬) 한 필을 얻어오게 한 뒤 여비로 200냥을 주어 이용교를 서울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도록 이용교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고부댁은 가마를 타고 서울로 이용교를 찾아갔다. 이용교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중형과 상의해보았지만 관작 매매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서 궁 안의 내시나 별입시(別入侍·신하가 임금을 사사로운 일로 뵙던 일)에 부탁할 수 없을까 기다리고 있었다”고 둘러댔다.

    이용교는 그동안 고부댁으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갖다 썼다. 고부댁은 이왕 시작한 일, 이용교에게 맡겨둘 게 아니라 직접 부딪쳐보기로 결심했다. 줄을 잘못 잡아 몇 차례 헛돈만 쓴 후 고부댁은 엄 상궁의 처소인 경선궁에 출입하는 문 상궁과 줄이 닿았다. 먼저 사람을 보내 문 상궁에게 큰 선물을 안긴 후, 직접 만나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지난밤 꿈자리에서 하늘의 월궁(月宮)에서 부른다기에 따라 올라갔더니 금전(金殿)이 즐비하고 옥루가 높이 솟아 있는데 상제를 모신 선관(仙官)들이 시립해 있었습니다. 그때 서늘한 봄바람이 불어오기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중화전(中和殿)이 보이고 황금으로 경선궁이라 썼습니다. 이 꿈은 확실히 엄 상궁께서 생남하실 꿈입니다. 바라옵건대 해산 때 필요한 모든 물건은 소첩이 장만해 올리려고 하오니 받아주시도록 주선해주십시오.”

    문 상궁은 고부댁의 꿈 이야기를 엄 상궁에게 전했다. 문 상궁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 상궁은 크게 기뻐하며 고종께 고부댁의 꿈 이야기와 출산 용품을 바치려 한다는 고부댁의 갸륵한 뜻을 전했다. 고종 역시 기뻐하며 고부댁이 바치려는 출산 용품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윤허했다. 고부댁은 최고급 출산 용품을 엄 상궁에게 바쳤고, 얼마 후 엄 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출산했다. 영친왕을 낳은 엄 상궁은 엄 귀비로 승격됐다. 엄 귀비는 자기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준 고부댁을 불러 소원을 물었다. 고부댁은 이렇게 답했다.

    “소첩 별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소첩은 시골에서 비록 큰 부자는 아니오나 별로 궁색하게 사는 형편도 아닙니다. 그런데 간사하고 사나운 관리들이 탐학하지 않는 날이 없어 편히 살 수가 없습니다. 소첩의 재산도 그들에게 언제 빼앗길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렇다 할 좋은 방책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고을이건 군수 한 자리만 지내게 되면 이런 폐단은 없게 될 것입니다.”

    엄 귀비는 고종에게 이용교의 군수 자리를 부탁했고, 고종은 그를 창원군수에 제수했다. 이용교가 백수공권으로 군수 자리를 얻은 것은 관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고부댁이 여걸이었기 때문이다.

    이용교는 타고난 탐관오리여서 창원에 부임한 지 채 1년이 못 돼 수만냥을 끌어 모았다. 이용교는 이 돈을 모두 경선궁 엄 귀비에게 바쳤다. 덕분에 이듬해 이용교는 김해군수로 영전했다. 김해에서도 이용교는 창원에서 하던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아 전액을 경선궁에 바쳤다. 2년 뒤 진주목사로 승진해 1년 만에 100만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이번엔 경선궁에 보내지 않고 그 돈으로 땅을 사들여 거부가 됐다. 과도한 토색질로 진주에 민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용교는 재빨리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비움의 의미

    최송설당은 일찍부터 공익을 위해 돈을 쓰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1908년 미국 동포가 간행하는 ‘공립신보’를 보다가 의연금을 모집하는 취지서를 읽고 감동해 4원을 기탁하는 것을 시작으로, 1912년 김천 교동 주민을 구휼하기 위해 벼 50석을 희사했고, 1915년 경성부인회에 거금을 기부하고 일본 적십자사 특별회원이 됐다.

    1917년 아흔까지 천수를 누린 모친이 “너의 재산을 육영에 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모친의 유언에 따라 김천공립보통학교에 거액을 기부해 총독 표창을 받았고, 금릉유치원과 금릉학원에도 유지비를 기부했다. 전국 큰 사찰 30곳에 불기와 불등을 봉헌하기도 했다.

    그렇듯 사회와 종교를 위해 아낌없이 기부했어도 1930년 여든을 바라보는 최송설당에겐 30만원 상당의 재산이 남아 있었다. 근검 성실로 깨끗하게 모은 재산일 수도, 탐관오리였던 남편 이용교의 유산일 수도, 궁에서 나올 때 엄 귀비로부터 하사받은 전별금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셋 다일지도 모른다.

    최송설당의 엄청난 재산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최송설당 자신은 그 많은 재산을 깔고 앉아 지내면서도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진실은 30만원 상당의 재산이 남아 있은 게 아니라 30만원 상당의 재산밖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최송설당에겐 남편도 없었고, 자기 배로 낳은 자식도 없었다. 입양한 아들은 5년 전 파양해 조카로 돌아갔다. 한평생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아본 기억도 없었다.

    1930년 최송설당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재산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쓰려고 결심했다. 자신을 낳아서 길러준 고향 김천의 숙원 사업 김천고보 설립에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이었다.

    여걸 최송설당의 인생 역전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최송설당은 동상을 봉정받은 지 4년이 지난 1939년 천수를 누리고 여든다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 못할 숱한 사연을 간직한 최송설당은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순간, 자식도 남편도 없고 사랑받지도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비우고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 그녀는 세상사람의 추모와 애도를 받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최송설당은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움의 숭고한 의미를 일깨워준 마지막 승부로 인해, 최송설당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뜨겁게 살다간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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