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불확실성’ 월러스틴/유희석 옮김/창비/296쪽/1만5000원
자본주의 세계체제 분석
월러스틴의 저작 (공저도 포함해서) 대부분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저술은 이해하기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일정한 독자층이 있다고 얘기되는데, 필자는 ‘자유주의 이후’를 번역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그러한 속설에 다소 공감하게 됐다.
오래전 세계체제이론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월러스틴은 이론 대신 분석, 즉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분석을 강조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에 ‘체계’라는 레테르(letter)를 붙이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거부하고, 자신의 연구가 언제나 비판이자 분석으로 이해되기를 바랐던 것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월러스틴은 혁명 당시 프랑스가 편입돼 있던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이미 ‘자본가적인’ 사람들이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은 체제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혁명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속한 반(半)주변부 국가의 국가 중심 경제발전전략으로 상정하고, 그 이데올로기가 실패한 원인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틀 내에서 (일)국가 발전이란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월러스틴의 결론은 ‘마르크스에 대한 진정한 독해는 마르크스적인 방법을 통해서 마르크스의 근원적인 통찰력(새로운 과학적 인식론, 새로운 역사편찬관)과 가치들을 통합해, 더 민주적이고 더 평등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지양(止揚)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자유주의 이후’(당대) 385쪽).
지식체계의 기본 단위, 불확실성
이런 맥락에서 아프리카 분석으로 시작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분석이 다시 새로운 사회과학 패러다임 추구로 이어지는 상승 하강 궤적은 견실해 보인다. 특히 그가 공들여왔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분석 틀이 최근에는 새로운 학문적·이론적 패러다임 추구의 토양이 돼, 사회과학의 탈피와 개방, 재구성 요구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과학자이자 인문학자였던 일리야 프리고진’에게 헌정된 이 책 ‘지식의 불확실성’은 ‘시간의 불확실성들’이라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월러스틴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자연과학자 프리고진에게서 중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현재는 찰나적이고, 과거는 끊임없이 변하기에(월러스틴은 현재의 행위가 과거의 재해석을 요구하며, 이런 점에서 ‘현재의 정치학’은 고집스럽고 끈질기다고 평한다), 인간은 미래를 붙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얼마나 큰 혼돈과 낭패를 초래했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굳이 ‘종말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불확실성이며, 이 불확실성을 지식체계의 기본 구성단위로 수용한다면 “현재의 역사적 선택들에 집중하고 해법을 발견하는 데 유용할, 실재에 대한 이해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이 책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옮긴이도 밝히고 있듯이, 최근 나온 몇몇 저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참신한 사유(思惟)의 개진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분석으로 시작된, 혹은 그 분석을 토대로 한 새로운 지식이나 사회과학 패러다임 모색의 장기 프로젝트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 없어 보인다.
욕망에서 앎을 분리할 수 있나
월러스틴은 역사적 자본주의, 역사적 세계체제, 역사적 사회체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역사적 지식, 역사적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는 현재에도 계속되며 아직 완결되지 않은 과거를 뜻하는 ‘복합과거(La passe compose)’ 혹은 ‘역사적 과거(de passe historique)’ 같은 프랑스어를 강조하는데, ‘역사적’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에서 그의 사유가 가진 특징을 추측할 수 있다.
‘역사적 선택들에 대한 (과학주의적이 아닌) 과학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한가’ 질문하고, 가까운 과거의 경향과 가능성 있는 연속적인 궤적들, 가능한 사회적 선택의 지점들을 밝히는 것이 최선이라면서 그 과제를 ‘역사적 구성, 현재의 도전, 가능한 대안’으로 정리한다.
개별 기술적 인문학과 법칙 정립적 자연과학 ‘사이에 낀’ 그리고 ‘두 문화’ 사이에서 심각하게 분열된 지식 영역으로서의 사회과학, 그 분과학문들의 경향은 6등급의 분리에서 노정된다. 즉 과거의 역사학과 현재의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사회과학)의 분리, 서구 문명사회에 관한 이 4학문과 나머지 세계(‘미개한’ 민족을 연구하는 인류학과 비(非)서구 ‘고도문명들’을 연구하는 동양학)의 분리, 시장의 경제학, 국가의 정치학, 시민사회의 사회학 분리 등이 그것이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과 새로운 사회과학 패러다임 추구의 연계성은 세계체제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사회과학 간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해석을 재구성하고, 권력자들의 도구이자 억압당하는 이들의 도구가 된다.
그래서 월러스틴에게 세계체제 분석은 이론의 영역을 포함해 사회과학이 행해지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진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선택은 불가피하며, 그 선택에는 가치에 대한 동의 혹은 선호가 전제되게 마련이다. 선(善)이나 미(美)와 무관한 진리탐구는 존재할 수 없으며, 욕망에서 앎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수용할 때 우리는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언명은 반복된다.
새 패러다임의 실마리
월러스틴은 자연과학에서 연유한 ‘복잡성 연구’와 인문학에서 기원한 ‘문화연구’에서 새 패러다임의 실마리를 찾는다. 복잡성 연구는 ‘시간의 화살’과 ‘확실성의 종말’을 주장하는 방향에서, 문화연구는 심미적 판단이란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한 것이며, 사회에 뿌리를 두고 권력투쟁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므로 역사화와 상대화를 추구한다는 방향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지속(특히 장기지속)을 무시한 역사학의 지배적인 관점과 싸워야 했던 브로델, 시간을 무시한 물리학의 지배적인 관점과 싸우면서 ‘시간의 화살’을 강조한 프리고진은 그가 수시로 의존하는 버팀목이다.
복잡한 현실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지향하면서 지적·도덕적·정치적 문제를 동시에,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기하는 사회과학은 그 불확실한 가장자리를 영원히 방황할지라도 진· 선·미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는 고백은 진지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메아리로 계속 울린다.
월러스틴의 이 대단해 보이는 지적 프로젝트가 앞으로 얼마나 더 견실하고 더 총체적이고 더 종합적인 패러다임 구축에 기여하고 소중한 결실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스스로 밝히듯이, 예전에 비판받은 ‘반증 불가능한’ 성격의 세계체제 분석이 여러 비판을 극복하고, 그가 지향하는 ‘역사적 총체적 사회과학’의 굳건한 토대가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도 일부 최근 저작들은 예전 연구의 재정리에만 머무는 것 같아 아쉽다. 그래서 반복되는 그의 선언적 언명들 역시 진보의 구체적 성과나 단계라기보다 이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불확실한 지식체계를 향한 안타까운 질타로만 제자리걸음하는 것 아닌지 하는 기우도 든다.
하지만 이 불확실한 시대에 그런 자극마저 없다면 우린 분명 더 난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