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시절 남북관계는 脫냉전의 호조건에서도 북쪽의 경직성과 남쪽의 조급성 탓에 근본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못했다. 전략과 일관성 없는 남한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체제 붕괴와 개혁개방 흐름 속에서 체제 고수의 명제를 놓지 않음으로써 경제적 침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9월11일 국회에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
냉전시대의 대립은 20세기 후반의 신 세계질서로 대체됐고 분단 40년의 남북한 관계도 불신과 갈등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게 됐다. 남한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시대를 열었으며 북한에서도 49년 동안 장기 통치했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장남인 김정일이 후계체제를 확립했다.
탈(脫)냉전시대의 격랑 속에 북핵 문제라는 새로운 쟁점이 부각되면서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했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10년 동안 남북한 기본합의서 체결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그리고 북-미 간 제네바합의 등으로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경색된 남북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김영삼 정부가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라는 유산을 남긴 채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 위기 속에 퇴장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발전과 분단해소의 과제는 차기 김대중 정부의 몫으로 넘겨졌다.
탈사회주의와 탈냉전의 물결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하던 5년은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로 우뚝 서는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1980년대 제2의 경제성장기를 맞이해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데 이어 1987년 6·10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는 등 정치적 민주화에서도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뤄냈다.
이 같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하고 새로운 5년 단임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자신 군 장성으로서 전임 전두환 정부에서 주요 직책을 역임했으나 민간 정치지도자로 변신하면서 민주화 투쟁에 빛나는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당선됨으로써 민주화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하계 올림픽을 주최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건국 40년을 맞은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는 데는 시운(時運)도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동서 냉전의 종식이라는 20세기 후반 최대의 역사적 변혁의 혜택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고르바초프의 신(新)사고,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차례로 탈사회주의를 선언했다. 동유럽 각국의 급격한 체제변혁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의 맹주이던 소련마저 탈사회주의로 급속히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덩샤오핑(鄧小平)의 확고한 지도력이 발휘되던 중국도 개방과 개혁을 더욱 가속화해 시장경제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벗어났다.
마침내 1989년 12월 몰타에서 개최된 미-소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정식으로 냉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탈냉전시대의 서막을 장식했다. 탈냉전시대 각국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협력과 갈등관계보다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따라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치열한 생존경쟁에 돌입했다.
이 같은 대내외적 환경의 변화는 남한의 대북관(觀)을 변화시켰으며 과거 체제경쟁을 전제로 한 대립 정책은 북한을 동족으로 포용하는 정책으로 탈바꿈했다. 노태우 정부는 집권 후 북한을 적대시하거나 경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로 간주하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나아가 재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전향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노 대통령은 하계 올림픽 개최국의 위상에 걸맞게 1988년 7월7일 남북한 교역 문호개방 등 6개항으로 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고, 10월4일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 및 남북간 불가침선언을 체결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어 1989년 9월11일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노 대통령은 특별연설을 통해 새로운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창했다. 이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과정 및 통일의 방식을 제시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일방안이었다.
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추구한 7·4남북공동성명의 기본정신을 계승하면서 남북대화 추진과 상호 신뢰 회복을 당면 과제로 상정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남북한의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돼 상호 적대감이 사라지고 신뢰가 구축되면 남북한은 공동으로 민족공동체 헌장을 채택하게 된다. 민족공동체 헌장에 의해 남북 정상회담, 남북 각료회의 및 남북평의회를 구성해 남북연합을 출범시키고, 남북평의회에서 통일헌법을 제정하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 공동체 통일방안의 주요 내용이다.
과거 남한의 통일방안이 냉전시대의 대결과 경쟁의 산물로 선언적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북한과 같이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체제간 통합을 위해 우선 상호 신뢰를 쌓고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민족공동체를 구축해 향후 명실상부한 통일을 달성한다는 탈냉전시대에 걸맞은 진일보한 현실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통일방안 제창에 대한 북한의 사정은 다소 복잡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동서 냉전의 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동유럽,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는 것과 달리 북한은 이데올로기의 순수성을 고수하며 김일성·김정일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남한이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대폭 강화하면서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해 소련,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에 힘쓰는 동안 북한은 1989년 세계 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는 등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에 이어 1990년 10월 동독이 서독에 편입됨으로써 이룩된 독일의 통일은 북한 지도부로서는 6·25전쟁 이후 최대의 충격이자 위기로 다가왔다. 북한 당국으로서는 급변하는 탈냉전의 정세 속에서 동요하는 엘리트들을 진정시키고 각종 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는 등 체제 결속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러한 수세적인 정책만으로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놓인 북한 체제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남한의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전향적으로 7·7선언을 발표하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창한 노태우 정부의 진의를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됐다. 이러한 의도에서 북한은 1988년 8월 남북 국회회담을 시작으로 남북 고위급회담, 체육회담, 적십자회담 등 각종 남북대화에 임하게 됐다.
북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응수
남북 국회회담을 위해 양측은 3차례 준비접촉(1988.8.19~8.22)과 수석대표접촉(1988.8.24), 이어 7차례 후속 준비접촉(1988.8.26~1990.1.24)을 했다. 그러나 북한측이 회담 외적 문제에 대해서만 집중 거론함으로써 국회회담은 판문점에서 준비접촉만 10차례 개최된 후 중단됐다. 반면 강영훈 총리가 남북간 문제를 포괄적으로 협의·해결하자고 제의(1988.12.28)한 총리회담은 고위급회담이라는 명칭으로 성사됐다.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양측의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의 경우 8차례 예비회담(1989. 2.8~1990.7.26)을 거쳐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총 8회 본회담이 개최(1990.9.4~1992.9.18)됐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남북대화가 재개된 후 1990년 9월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 양측의 총리를 대표로 하는 고위급회담이 개최됐다. 남북 고위급회담이 성사되기에 앞서 북한은 노태우 대통령의 7·7 특별선언에 대해 1988년 11월7일 두 개의 조선 반대 및 외국군 철수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괄적 통일방안’을 제의했으며 1990년 5월24일 김일성 주석은 시정연설을 통해 조국통일 5개 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나아가 동독이 서독에 편입, 통일독일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1991년 신년사를 통해 1990년대식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제시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비교할 때 1990년대식 방안은 남북 자치정부에 국방·외교 등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할 수 있는데, 역시 북한이 처한 수세적 상황을 십분 감안한 제안으로서 남북 고위급회담 진행과 맞물려 북한의 협력적 자세를 뒷받침하는 조처였다.
남북 고위급회담은 한-소 수교와 한-중 관계 개선, 독일 통일 등 주변 환경이 급변하고 나아가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상황에서 전개됐다. 특히 남북 고위급회담은 4차회담(1991.10.22~ 10.25) 이후 북한측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와 한반도 핵부재선언 등으로 급진전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남한과 북한의 정부 대표가 서명하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1991.12.13)했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12.31)을 도출했다.
1995년 7월2일, 시민들이 우리 쌀을 북한에 수송하는 선박의 출항을 축하하고 있다.
남북 간의 제반 현안에 대한 포괄적 협상기구인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 남북적십자 실무대표 접촉이 성사돼 제2차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관련 회담이 8차례(1989.9.27~1990.1.8) 개최됐으나 구체적 합의 사항을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어 남북 이산가족 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 관련 실무대표 접촉이 8차(1992.6.5~8.7)에 걸쳐 속개됐으나 역시 구체적인 합의를 달성하지 못한 채 중단됐다.
북한의 발 빼기
1980년대 말 급변하는 정세 속에 남북 고위급회담이 개최되는 등 남북 간 화해 기운이 감돌면서 체육분야의 남북대화도 재개됐다. 1990년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아시아경기대회에 남북 단일팀 구성, 참가를 위한 남북체육회담이 9차례(1989.3.9~1990.2.7) 개최됐으나 북한측의 한국팀 개별 참가 저지 의도와 단일팀 구성 실천 의지 부족 등으로 결렬됐다. 비록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단일팀 구성은 실패했으나 남북 체육장관은 베이징에서의 남북접촉(1990.9.23)을 통해 통일축구대회 개최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남북통일축구 평양대회(1990.10.9~10.13)에 이어 서울대회(1990.10.21~10.25)가 성사된 이후 남북한은 국제경기대회 단일팀 참가 및 남북체육교류를 위한 남북체육회담을 4회(1990.11.29~1991.2.12)에 걸쳐 열어 일본에서 개최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4.24~5.6)와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1991.6.5~6.17)에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했다. 그러나 남북체육회담은 북한 유도선수의 귀순과 관련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총체적으로 볼 때,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역사적인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 발효되는 등 남북 당국간 대화에서는 급진전을 이룩한 데 비해 비당국간 교류협력사업은 전반적으로 이에 미치지 못했다. 사회주의권의 급속한 붕괴와 독일 통일 등으로 위기감에 빠진 북한이 남북 당국간 기본합의서 발효를 계기로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 등 체제 위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러한 북한의 노선과 전략은 기본합의서에 대한 공식 견해에서도 드러난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가 “북남대화가 시작된 이래 20년 동안 지속돼온 서로 다른 두 입장과 두 로선 사이의 대결에 결판을 내린 일대 사변”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는 “동유럽사태를 기화로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반(反)공화국 책동과 남조선의 ‘승공통일’ 전략을 짓부수기 위한 강력한 정치사상적 공세 속에서 이룩한 승리”라고 자평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끈 북한은 더 이상 남북대화를 지속할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93년 초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그에 따라 남-북, 미-북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노태우 정부 임기말 남북관계는 또다시 경색 국면에 접어들었다.
다만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한 막후 비밀협상이 열린 점은 향후 불발에 그친 1994년 7월의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과 2000년 6월 성사된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은 1990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김정일을 만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관해 논의한 적이 있다. 최고통치자의 뜻을 받아 북측의 최고지도자를 대면했다는 점에서 과거 이후락 정보부장과 장세동 안기부장의 방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김정일이 배석한 것은 남북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배석한 북한의 윤기복 대남사업담당비서는 그에 앞서 1992년 4월초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서울을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을 면담한 적이 있다. 당시엔 의제 조율이 난관에 부딪혀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탈냉전시대의 흐름을 활용해 북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고 이에 편승해 다양한 형태의 남북대화를 성사시켰으나 결국 북한의 수세적 처지와 남북관계의 주요 변수인 북-미관계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정권을 넘겨야 했다.
이인모 송환 후 NPT 탈퇴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1993년 2월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화 투사였다. 김 대통령은 오랜 세월 박정희, 전두환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 정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한 정치인이다. 특히 권위주의 정부와 관계를 끊을 수 없었던 노태우 대통령과 달리 김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자칭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를 수립할 것을 공언했다. 군대 내에 잔존한 하나회를 제거하면서 강력한 문민정치 시대를 열어갈 것을 다짐한 그는 다양한 민주화 세력을 끌어안으며 여론에 호소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와 같이 김영삼 대통령도 출범 초기 대단히 유리한 국제 정세와 국내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중국과 수교를 통해 새로운 경제적 활로를 개척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구(舊)사회주의권과 관계 정상화를 통해 매우 단단한 외교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사회주의권과의 단절로 더욱 폐쇄되고 고립됐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실정이었다. 김 대통령은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정치적 정통성을 기반으로 국내 여론을 주도하면서 각종 경제사회개혁도 과감하게 단행했다.
남북관계, 대북정책과 관련해 김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쳐 보임으로써 자신감에서 비롯된 전향적인 관계 개선과 민족간의 화합을 제창했다. 집권 초기 이 같은 전향적인 대북관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미전향 장기수 문제는 전임 노태우 정부 때도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로막은 걸림돌이었는데 취임하자마자 북한이 강력히 요구해온 이인모씨의 송환을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열어가고자 했다. 진보적 재야 민주인사이던 한완상 교수를 초대 통일부총리에 임명한 것도 새로운 남북관계를 구축하려는 김영삼 대통령의 의중과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은 핵개발 의혹이 제기된 이후, IAEA가 제재를 본격 검토하는 시점에서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1993.3.12)하고 준(準)전시상태를 선포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면서도 1993년 4월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회의에서 강성산 총리를 통해 김일성이 직접 구술했다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발표하는 등 대남 유화적 자세를 보여줬다.
10대 강령은 김영삼 정부의 집권 초기 민족주의적 내용을 포함한 전향적인 대북정책에 대한 대응으로서 민족대단결을 전면에 내세운 대남정책, 통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대단결은 남북의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온 민족이 단합해 통일과 번영을 이루자는 주장으로 사회주의 붕괴로 빚어진 탈냉전 상황에서 북한 체제를 유지하면서 독일과 같은 흡수통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됐다. 10대 강령 첫머리에 동족 사이의 분열과 대결을 조장하는 정쟁을 일절 중지하자는 제안이나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의구심을 버리고 서로 신뢰하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지 말고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독일식 흡수통일 방안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이에 따른 새로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도발적인 태도에 대해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초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NPT를 탈퇴하자 북한에 대해 중단된 남북 고위급회담을 재개해 핵 문제 등 현안을 비롯해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논의하자고 긴급 제안(1993.5.20)했다. 그러나 대화 재개를 요구하면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개최한 1993년 6월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고 강경한 방침을 천명함으로써 남북관계가 경색됐고 북한은 남한을 배제한 채 미국만을 상대하는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본격화했다.
북방정책을 통해 우회적으로 북한에 접근한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한 김영삼 정부는 통일방안에서 부분적으로 보완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통일정책으로 수용했다. 1994년 8·15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에서 발표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은 기존의 공동체 통일방안을 남북 화해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 등 3단계로 나눔으로써 이전보다 구체적으로 절차를 정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문맥상의 차이보다 김영삼 정부의 통일방안은 통일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통일의 목표나 방식이 북한을 남한체제에 사실상 흡수, 편입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통일 문제에 관한 한 북한과의 대화가 진전될 수 없었다.
이같이 통일정책의 목표나 통일방식이 독일식 흡수통일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주변 대내외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1990년대에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꾸준한 정치발전을 이룩하고 있던 남한과 비교할 때 북한의 대내외적 상황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미 북한의 최대 지원국이자 동맹국이던 소련과 중국은 남한과 관계개선을 이룩한 반면 북한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동유럽, 구소련과의 교역량이 대폭 감소함으로써 북한은 외화난, 에너지난에 봉착했다. 또한 1994년부터 연이은 수해와 가뭄은 북한의 경제사정을 악화시켰는데, 특히 식량의 절대적인 부족 현상을 빚었다. 아울러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NPT 탈퇴는 북-미관계를 악화시키고 북한을 정치·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말았다.
더구나 1994년 7월9일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함으로써 북한이 정권 수립 이후 초유의 위기상황을 맞게 되자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조기 붕괴를 더욱 확신하게 됐다. 이는 김영삼 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이 독일식 흡수통일 방식을 모델로 삼는 데 힘을 실어줬다.
반면 같은 시기 핵 문제를 놓고 북한은 미국과 직접 대화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미국과 제반 문제를 일괄타결하려는 시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수세에 놓인 북한으로선 벼랑끝 전술인 동시에 에너지원 확보를 비롯한 경제적 이익의 도모와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카터 중재로 위기 넘겨
이러한 북한의 전략은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북한과 협상해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클린턴 정부를 통해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거나 남북관계 복원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북핵 사태가 초기의 위기 국면을 지나 본격적으로 북-미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 김영삼 정부는 남북특사교환을 통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대화의 재개를 모색했다. 이에 따라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8회(1992.10.5~1994.3.19) 개최됐으나 북한이 IAEA 사찰에 충분히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미-북 간 협상도 교착상태에 빠지고, 남북대화도 북한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급속히 냉각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1994년 6월 북핵 문제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해결하려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방침이 굳어지면서 한반도에 일촉즉발 전쟁의 위험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도 김영삼 정부는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이 같은 상황에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북한으로부터 다시 대화를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을 받아내는 동시에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북한측 호응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한반도 위기가 해소되고 남북관계 역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계기가 마련됐다.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분단 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나는 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1994년 6월26일 판문점에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한 데 이어 정상회담 개최에 따르는 실무절차 협의를 위한 대표접촉 2차례(1994.7.1~7.2)와 통신 및 경호 실무자 접촉(1994.7.7~7.8)이 있었다. 남북한 모두 커다란 기대와 감격 속에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준비에 만전을 기했으나 회담을 불과 3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써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어 남한에서 발생한 소위 ‘조문(弔問)파동’으로 남북관계는 또다시 냉각기를 맞았다.
냉각된 남북관계는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을 계기로 풀리기 시작했다. 중단된 남북대화가 재개된 것은 극심한 식량난에 처한 북한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남북한은 차관급이 대표가 돼 베이징에서 2차(1995.6.17~7.19)에 걸쳐 회담을 개최해 북한에 남한 쌀 15만t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대북지원 쌀은 북한 항구를 통해 전달됐다.
북한에 대한 쌀 15만t 제공은 1995년 6월27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일에 임박해 이뤄졌다. 이는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 중 대표적인 실책 사례로 평가되는 것으로, 관련 회담은 물론 지원 과정에서도 숱한 문제점이 제기됐다. 일본에 앞서 북한에 쌀을 지원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북지원을 통해 중단된 남북관계를 재개함으로써 여론 지지를 획득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결부된 급조된 지원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쌀 지원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긴급 식량지원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쌀을 수입해서라도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겠다”고 언급함으로써 국내의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북한의 경직성과 남한의 조급함
이후 남북한은 대북 식량지원 등 후속지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제3차(1995.9.26~10.1) 차관급 회담을 개최했으나 지원 절차와 형식에 관해 타협을 보지 못해 더 이상 회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국제식량기구를 통해 인도적 차원에서 식량을 지원하기 위한 남북적십자 대표 접촉만이 이뤄졌다. 구호물자 전달을 위한 적십자회담은 1997년 5월3일 베이징에서 제1차 접촉을 시작한 이래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 3월말까지 베이징에서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이후 3년간 ‘유훈(遺訓)통치’ 기간을 거쳐 1997년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한 데 이어 새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권력서열 1위인 국방위원장에 추대됐다. 이로써 김정일 시대가 도래했다. 1997년 8월4일 김정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논문을 통해 7·4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그리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등을 통일의 3대 헌장이라고 규정하면서 김일성의 통일방안을 그대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의 민족공조와 관련된 선전 차원의 제안과는 별개로 핵 문제와 조문파동이 발생하고 북-미 제네바합의가 발표된 이후에도 북한의 잠수정 침투에 따른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지속됨으로써 남북관계는 김영삼 정부 내내 냉각됐다. 제네바 북-미 합의 후속조치로서 금호지구에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한반도에너지기구(KEDO)가 구성됐다. 남한이 KEDO의 이사국으로 경수로 건설을 통해 미국, 일본 등과 함께 북한과의 협상에 참여함으로써 남북관계는 양자관계보다는 미국을 축으로 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지됐다.
아울러 제네바합의를 통해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4자회담이 개최됨으로써 김영삼 정부는 임기말까지 남북대화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나갔다. 북한은 벼랑끝 전술로 미국과의 협상 지렛대를 유지했으나 실질적인 관계 개선이나 경제 발전은 도모하지 못한 채 극심한 식량난 등 체제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울러 흡수통일에 대한 우려로 핵무기 개발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자초했다.
국내 정치용 대북정책
노태우 정부는 성공적인 북방정책으로 대한민국의 위상과 대외환경을 극적으로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도출했음에도 치밀한 전략 부재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김영삼 정부는 미국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북한 핵 문제에 끌려다님으로써 제네바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등에 막대한 부담을 짊어진 채 한반도 비핵화나 북핵 문제 주도권을 미국과 북한에 내줬다. 북한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 것은 노태우 정부보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더욱 심각했는데, 이는 대북정책이나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국내 정치용으로 삼으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실책이었다. 또한 관련 정책부서 간의 혼선과 비효율적 정책 집행은 김영삼 대통령의 통치철학 부재에도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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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부나 정책 당국의 이러한 실책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했으며 가장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도 기여하지 못했다. 대북 강경책의 지속으로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성사시켰음에도 북한 지배 엘리트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수십만의 탈북자가 중국 내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는 데도 역부족이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한 북방정책이 김영삼 정부에서 북한의 변화,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결국 그 과제는 김대중 정부로 넘겨졌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통해 새로운 남북한 시대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