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들이 어떻게 남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한 ‘생각의 탄생’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면 총알이 올라갈 때 속도와 내 머리 위로 다시 떨어질 때의 속도가 어떻게 다를까?” “빛이 유리는 통과하는데 왜 금속은 통과하지 못할까?”
중·고등학교 물리·화학 수준의 문제이나, 최신 이론으로 무장한 명문대 이공계 석·박사 출신도 이런 질문에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고 한다. 언뜻 업무와 관계없는 질문 같지만, 그는 “배운 지식을 삶에 적용하는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묻는다고 했다.
그 많던 지식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의 저명한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에서 2년간 교양학부 강의를 하면서 경악할 만한 일을 겪었다. 1엔짜리 동전의 지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0.1cm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5cm라고 대답한 학생도 있었던 것. 어떤 학생은 종이의 두께는 1000마이크론(1㎜) 이상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이런 학생들이 버젓이 도쿄대 이과에 다니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책상머리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만 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이 세상의 거리와 깊이와 넓이를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답이 나올 법도 하다. 교과서에 동전의 지름 따위를 계산하는 법은 나오지도 않고 그런 걸 묻는 시험문제도 없을 테니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명문대생들이 ‘학교’ ‘인생’ 같은 기초 한자도 쓸 줄 모른다거나(부모님 이름은 물론 자기 이름도 제대로 못 쓴다는 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지만), 대학마다 고교 수준의 수학, 글쓰기 기초를 가르치느라 야단이라거나, 토플 만점을 받은 학생이 실제 영어 실력은 별로라거나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대부분 한국 교육 현실을 개탄하기에 바빴지,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성실하지 못했다.
다행히 미시간 주립대 생리학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그의 아내인 역사학자 미셸 루트번스타인이 우리를 대신해 ‘창조적 사고’를 가로막고 있는 교육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각의 탄생(원제 Spark of Genius)’(에코의 서재, 2007)이 그 결과물이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다니던 대학 역사상 대단히 총명한 학생 중 하나였고, 공부밖에 모르던 친구 ‘존’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어느 날 기계학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존이 육중한 참나무 문을 열지 못해 낑낑거렸다. 보다 못한 다른 친구가 손잡이 부분을 한 번 밀자 문은 너무나 쉽게 활짝 열렸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열었지?” 존이 의아해 하자, 또 다른 누군가 대답했다. “농담하냐? 얼마 전 기계학 강의에서 문과 관계되는 물리학 원리를 배웠잖아.” 존은 이미 그와 관련된 방정식을 마스터했고, 중간고사에서 사상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왜 그는 그 원리를 모르겠다고 하는 걸까? 답답해진 친구들이 그에게 설명을 했다. “넌 문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를 밀었잖아. 왜 문 손잡이가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냐? 그냥 걸어 잠그기 편하니까? 아니 거기엔 물리학 원리가 개입돼 있다는 거 모르겠어? 토크(물체를 회전시키는 힘)잖아!”
토크는 자루가 긴 렌치를 쓸수록 작은 힘으로 볼트를 풀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를 말한다. 지렛대의 원리와 유사하다. 자, 그때부터 존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문의 크기를 X로 놓고 회전축에서부터 힘이 가해지는 지점까지의 거리를 Y로 놓으면….’ 몇 분 만에 답이 나왔다.
문제는 존이 머릿속에 있는 이론을 실제세계의 물리학적 경험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학교 교육은 수많은 ‘존’을 길러내고 있다. 그래서 수학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배우지 못하고 그저 전달언어로서의 수학을 배울 뿐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교육
원인은 이해가 아니라 외워서 알게 되는 교육시스템에 있다. 즉 현대 교육에는 ‘무엇’과 ‘어떻게’가 분리돼 있다. 그래서 수많은 ‘존’이 배운 ‘무엇’을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저자들은 이런 지식에 대해 실로 허약하며 쓸모없고 교육적 실패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학문적 성취’의 외장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교육의 실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교육심리학자 지앤 뱀버거는 학교 성적은 신통치 않으나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똑똑한 아이들을 주목했다. 이들은 따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돌을 움직이기 위해 지렛대의 받침대를 어디쯤 놓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치 “시소놀이처럼 느낌으로 그냥 안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이론적 지식이라는 ‘환상’이 없기 때문에 ‘학문적 행위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생각의 탄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리처드 파인만,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과학, 미술, 문학,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천재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탁월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천재인지 나열하며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창조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길러내는 통합교육을 통해 연마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 안의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저자는 천재들의 창조성에서 뽑아낸 13가지 생각도구-관찰, 형상화, 추상화, 패턴인식, 패턴형성, 유추, 몸으로 생각하기, 감정이입,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놀이, 변형, 통합-를 제시한다. 이 도구들을 잘 갖추면, ‘존’들이 겪고 있는 ‘환상’과 ‘실재’ 사이의 단절을 메울 수 있다.
관찰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철학자인 김용석 교수가 한국의 전문가들은 제대로 관찰을 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거지의 동냥그릇에 ‘쨍그랑’ 하고 동전 떨어지는 소리”라는 표현을 흔히 하는데 실제 요즘 거지들의 동냥그릇은 플라스틱 바구니여서 옛날 깡통그릇처럼 쨍그랑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통념대로 하는 것은 일상에 대한 ‘관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악보, 보지 않고 듣다
‘생각의 탄생’은 나아가 관찰이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어릴 때 시각을 잃은 생물학자 제라트 버메이는 시각이 사라지니까 소리, 냄새 등 전에는 그냥 무시해버린 것들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고 말한다. 눈으로 보는 대신 손으로 만져서 관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두 번째 도구는 ‘형상화’다. 상상 속에서 사물을 그리는 능력이다. 앞서 소개한 대기업 중견간부는 이런 말도 했다. “과학자라면 보이지 않는 원자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형상화다.
음악가에게는 악보가 기호가 아니라 음악으로 들린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실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연습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했다. 흔히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를 ‘논리수학적 사고’(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의 이론)의 전형으로 분류하지만,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상대적으로 수학에 취약했다. ‘상대성 이론’은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직관(直觀)에 의한 것이며, 이 직관이 작동하도록 힘을 실어준 것은 음악이었다고 했다. 그의 취미활동 중 하나가 바이올린 연주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3가지 도구를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결국 책 한 권 분량이 될 듯하다. ‘생각의 탄생’은 맨 뒤에 붙은 찾아보기까지 450쪽이 넘지만, 천재들의 생생한 증언을 감상하며 13가지 도구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진진하다. 특히 13번째 도구인 ‘통합’과 마지막 장인 ‘전인을 길러내는 통합교육’ 편은 건너뛰지 말 것을 권한다. ‘교육의 목적은 전인을 길러내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떻게’에 대한 답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해준 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