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나는 그렇지 않다’는 독자라면 지금부터 나올 글을 읽지 말고 넘어가시길. 당신을 위한 다른 알찬 내용이 이 잡지엔 더 많으니까. 인간의 감정을 일직선 위의 스펙트럼에 놓는다고 치면 우울이나 행복, 어느 한 쪽도 느끼지 않는 절대 중용의 자리에 있는 시간보다는 아무래도 우울함 쪽에 조금은 치우친 시간이 더 긴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삶이 각박해지고 팍팍해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정(情)이 없어지고 개인화해 세상은 우울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라고 말을 받는다.
인간의 감정은 당연히 세상의 변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울해지고 비관적인 전망에 치우쳐 생각하는 이유가 꼭 세상이 팍팍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바로 생존을 위한 인간 본성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두뇌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전두엽은 두뇌기관 중 가장 늦게 발달한다.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자에 겨우 2%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존재다. 그런데 전두엽만큼은 크게 차이가 난다. 침팬지의 뇌에서 전두엽이 차지하는 비중이 9%인 데 비해 인간은 30%나 된다. 그만큼 인간이란 존재를 규정하는 데 전두엽이 차지하는 몫은 크다.
전두엽은 추상적 사고, 유연성, 언어의 유창함, 충동의 억제, 주의력의 유지 등 인간 특성이라 할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현재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그 의미를 판단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평가할 때 전두엽은 기본적으로 일단 ‘위험’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그렇지 않은 경향보다 강하다. 위험한 것으로 판단했다가 그렇지 않다고 밝혀질 경우 안도의 한숨만 내쉬면 그만이지만,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일단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중에 경계를 푸는 훈련을 오래도록 해왔다. 그것은 인간이 나무 위에서 내려와 살아가기 시작한 이후 수백만번 반복한 공습경보 훈련인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매우 안전한 세상을 살고 있는데도 세상을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칭찬하기보다 비판하고, 안심하기보다 경계하도록 유전자는 명령하고 있다.
그런 경계의 버릇이 반복되다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경계하고 비판하는 데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게 된다. 마치 지나친 국방비 지출로 국력이 소모돼 나라가 망해가는 것과 같이 차차 지치고 위축되고 방어적인 사람이 돼간다. 바로 그것이 우울함의 모태다. 이런 우울함의 씨앗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겉으로는 행복하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우울증으로부터 완전 ‘열외’는 아니라는 게 무서운 사실이다.
인간은 비판적인 동물이니까 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그렇다면 ‘투덜이 스머프’들부터 우울증에 걸리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울증이 생기는 원인에 대한 설명은 많다. 설명이 많다는 것은 뾰족하게 딱 떨어지는 답이 없다는 말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사회·생물학·심리적으로 다양한 요인에 의해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백화점식 문제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울해지기 시작하는 실마리는 좌절이다. 반복적 좌절, 그리고 지금은 힘들더라도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추산이 나오지 않을 때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린다. 그러고는 우울해진다. 이렇게 좌절을 의식하고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고 의식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해 억제하는 경우도 있다.
좌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하고자 했던, 가고자 했던 이상(ideal)과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 사이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더 이상 메울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올 때, 마치 옆방에 있다가 불쑥 나타나듯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지금 이 순간만 넘기면 이 정도 뒤떨어진 것은, 이 정도 멀어 보이는 것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여러 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데 양껏 원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본다는데, 왜 세상이 나를 몰라주는 것인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지쳐서 이제는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외곽에서 경계병의 임무를 다하던 우울함은 어느덧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그 사람의 생각, 감정의 중심 필터가 된다.
이제는 바깥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다. 그동안 꾸역꾸역 해오던 최소한의 일상을 영위할 에너지도 바닥난다. 마치 휴대전화를 오래 쓰고 나면 밤새 충전을 해도 다음날 오전이면 배터리 눈금이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듯이 아무리 쉬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금방 지쳐간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그저 쉽게 피곤하고 밥맛이 없고 재충전이 되지 않는 증상만 느꼈다. 모름지기 인간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애를 써야 불안해지지 않는 동물이다. 그래서 평상시와 달리 처지고 힘든 이유를 찾는다.
그렇게 찾아낸 원인은 대개 ‘인생 실패자’다. 다시는 좋아지지 않을 것 같고, 피곤하니까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싫고,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전과 달리 심장을 콕콕 쑤시고 폐부를 휘젓는 듯한 아픔으로 느껴진다.
결국 더 이상 즐거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세상과의 문을 걸어 잠가버린다.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한 후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우울해졌는지 원인분석에 들어간다. 원인분석의 리포트는 주로 두 갈래다. 하나는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는 경우다. 이 시기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벌어진 일조차 모두 자기 탓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후회와 자책으로 감정은 범벅이 된다. ‘만일 그때 그랬다면…’이라는 다른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복기하고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며 현재를 살기를 거부한다. 그러니 현재의 삶의 질은 떨어지고, 떨어진 인생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다시 한 번 자책의 늪으로 들어간다. 이전에는 가슴까지만 잠겨 있었다면 이제는 점점 더 깊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콧구멍까지 잠길 정도로 깊이 들어간다.
또 다른 원인 찾기는 ‘너 때문이야!’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다 나를 제외한 타인과 세상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강하게 투사(projection)해 튕겨버린다. 가난한 아버지,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던 선생님, 자기 개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직장상사, 일을 해도 세금만 왕창 떼어가는 정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는 장본인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자괴심과 좌절감을 합리화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격성으로 전환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 두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중무장되고 나면 우울증의 늪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함의 세계를 즐기는 듯한 사람이 된다. 처음엔 소외된 외톨이라 여기던 사람이 이제는 우울함에 익숙해져서 ‘자발적 외톨이’가 되거나 ‘세상에 대한 무차별적 투덜이’가 돼 더 이상 변화하려 하지 않게 된다.
병적인 상황에 남들의 동정을 얻고 의존하면서 사는 것이 더 편해진다. 더 이상의 의무나 책임을 지는 것이 버겁고 힘들다. 숨 쉬는 것도 힘든데 왜 일을 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하느냐고 말한다. 이 정도로 날이 선 우울감은 한 사람의 정신세계에 깊은 내상을 남긴다.
흔히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을 한다. 초기 감기몸살은 해열제를 먹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쉬면 된다. 몸살이란 ‘몸이 살아나라는 신호’라고도 한다. 몸살이 났다는 것은 그동안 무리를 해서 이제 그만 쉬어야 몸이 살아나지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그렇듯 일시적인 스트레스, 이별과 상실, 사회생활의 좌절은 가벼운 우울증상을 발생시킨다. 조금 웅크려들게 하고 위축되게 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이는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는 구실을 한다. 좀 쉬고 난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몸의 재생능력이 작동해 원기를 회복한다.
그런데 감기가 아니라 폐렴 수준으로 진행한 우울증은 위험하다. 위에서 얘기한 수준으로 진행된 우울증상을 감기로만 여겼다가는 큰일이 난다. 가래가 끓고 체온이 38℃를 넘나들고 숨쉬기도 힘들어지고 있는데도 ‘감기니까 쉬면 돼, 난 약 안 먹어’ 하고 버티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그렇듯 가벼운 우울증상이 아니라 2주, 혹은 한 달 이상 지속되는 우울감과 에너지 고갈, 좌절감, 자책이 지속되며 일상생활을 하는 능력 자체가 떨어지는 상황이 되면 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하고 적극적인 치료를 해야만 한다. 쉰다고 저절로 낫지 않는다.
여기서 적극적 치료는 필요에 따라 약물치료를 병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불면, 불안초조, 식욕 저하, 세상에 대한 흥미 저하, 체중 저하와 같은 생리적 변화는 생물학적 치료를 통해 개선해야 한다. 대부분 약물치료를 하면 처음 1~2주안에 수면, 불안 등의 증상이 좋아지고 한 달 이내에 세상에 대한 흥미가 생기고 덜 피곤해지고 식욕이 돌아온다.
그리고 두 달째가 되면 우울의 늪에 빠져 자책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던 양상들이 차차 좋아진다. 물론 이런 변화는 약물을 복용하고 며칠 잠을 잔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약물은 일종의 일시적인 보조도구다. 약물을 통해 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우울함의 악순환 고리를 개인의 의지만으로 끊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약물, 그리고 전문가의 정신치료라는 도끼로 내리치지 않으면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 배가 고파 죽겠을 때는 내 밥그릇밖에 안 보이다가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면 남들은 뭘 먹나 둘러보는 여유가 생기듯이 급한 불을 끄고 나면 그제야 그동안 자신을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의 왜곡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정해갈 동기가 생긴다. 그 길을 정신과 의사가 함께해주는 것이다. 증상이 오래됐을수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에 우울함의 필터가 전방위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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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런 우울감은 어릴 때부터 경험해온 마음의 상처와 무의식적 갈등에 의해 증폭되고 해방되려는 자아의 노력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는 웬만해서는 혼자 찾아내기 어렵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만성화되기 쉬운 폐렴과도 같다. 때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좀먹어 황폐하게 만드는 소나무 재선충 같다. 더 무서운 것은 재선충같이 밖에서 들어온 침입자가 아니라 원래부터 자기 안에 있던 생리적 감정의 한 부분이 어느 순간 암세포와 같이 무한증식, 결국엔 인천공항 같은 허브가 돼 모든 감정과 사고를 컨트롤한다는 점이다.
결론은 이렇다. 당신의 우울감의 뿌리는 당신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폐렴이 될 듯한 변화가 올 때는 혼자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해결은 가능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