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돕는 조직에 親盧, 동교동계도 참여”
- “자문그룹 내분, 정대철 만난 게 결정타”
- 통장 잔고 1억원 남짓…현실적 고민
- “기업 상대 모금하다 상류문화 익숙해져”
- “호적, 병역, 여자, 논문 문제 깨끗하다”
- 광주 회식엔 삼성 임원 동석…‘불안한 질주’
- “출마 포기 후 비전, 자질 더 돋보여”
‘노무현 대통령과 결별하고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비(非)노무현-반(反)한나라 세력은 정운찬(鄭雲燦·60) 서울대 총장(이하 정운찬) 같은 신선한 이미지의 인물을 2007년 대선 후보로 내세울 것이다. 즉 열린우리당에서 노 대통령과 그 지지자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가 떨어져 나와 고건 전 국무총리,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과 함께 새 이미지의 정치체를 만든 뒤 정 총장을 극적으로 대선 후보로 선출하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이른바 ‘정운찬 대세론’이 처음으로 공개리에 거론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287일 후인 지난 4월30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많은 생각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번 대선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비전과 정책 제시만이 아니라 이를 세력화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태껏 그런 세력화 활동을 이끌어본 적 없는 저는…”(정운찬의 대선 불출마 선언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중)
“대선 구도 무너졌다”
그는 지난 9개월여 동안 ‘정치 안 한다’와 ‘한다’ 사이에서 20회 이상 표현을 약간씩 달리하면서 거취 결정을 유보해오다 이날 범(汎)여권에 결정적 충격을 안겼다. 대통령선거는 ‘구도’의 대결, ‘인물’의 대결인데 정운찬의 ‘드롭’은 범여권엔 이 두 가지 모두의 ‘상실’을 의미했다. ‘호남+충청 vs 영남’의 필승 지역구도, ‘참신한 경제·교육 전문가 vs 기성 정치권의 낡은 야당 후보’라는 인물 우위론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정운찬의 퇴장으로 여권의 후보경선은 이제 ‘도토리 키 재기’가 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선 구도가 무너져버렸다”(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정운찬이 안 나서면 범여권의 선거는 사실상 끝난 것이다”(김종인 민주당 의원)….
정운찬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한 측근 인사는 최근 기자에게 그의 대권 행보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인사의 증언을 토대로 2007년 대선 판도를 뒤흔들 뻔했던 ‘정운찬의 287일 대권 도전 과정’을 취재했다.
지난해 7월19일 서울대학교와 정운찬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대 개교 사상 처음으로 정운찬은 직선제 총장 4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전 총장들은 갖가지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하차한 터라 그의 퇴임은 각별했다. 언론은 그의 퇴임을 아낌없이 축하했다.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19일 물러나는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외롭게 대학의 자율성을 외친 사람이었다. 세계적 대학의 육성은 시급한 과제다. 대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정 총장의 행보는 그가 퇴임하는 시점에서 더 빛이 난다.’(동아일보 2006년 7월12일자)
당시에도 정운찬 주변엔 스승인 조순 전 서울시장, 김종인 의원 등 정계·재계·언론계의 지인그룹과 후배 교수 등 소장파 지지그룹이 있었다. 정운찬의 적극적 지지자들은 다음의 근거로 그를 이미 ‘대선 잠룡(潛龍)’으로 보고 있었다.
“정 총장은 충청이라는 확실한 지역연고가 있다. 경기고-서울대를 나와 20대에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됐다. ‘총리급’인 서울대 총장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론과 실무 모두 능하다.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교수직을 걸고 군사정권에 맞선 용기와 개혁성, 한국은행 총재직을 고사한 겸손함도 갖췄다.”
화려한 파티, 싸늘한 그 후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 뒤 총장 관사를 대폭 줄여 교수들의 숙소로 내줬다. 그 자신은 검소하게 총장직을 수행했다. 그런데 정운찬의 소장파 지지 그룹은 “정 총장은 그간 몸을 낮추며 살아왔다. 총장 퇴임 때만큼은 제대로 해드리자”고 했다. 지난해 7월 초 서울대 모처에서 ‘총장 퇴임 축하’ 야외 만찬이 열렸다. 정치권, 재계, 언론계, 학계, 문화계에서 많은 사람이 왔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중진 의원들, 유력 언론사 간부들도 초청됐다. 참석자들은 “서울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앞으로 더 큰일을 하시라” “상식적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며 덕담을 건넸다. 정운찬 부부도 흐뭇한 표정이었다.
상당수 참석자는 ‘정운찬의 대선 출정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자리가 무르익자 누군가 양주 1박스를 풀었다. 정운찬의 지인 중에는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정운찬 지지자인 인기가수 J씨와 시비가 붙기도 했다.
파티가 끝난 뒤 시니어 그룹에선 “정 총장에게 득이 될지 모르겠다”는 우려가 나왔다. 아니나다를까 우려는 현실이 됐다. 그간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정치권, 언론의 기류는 냉랭해졌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교육 문제를 놓고 노무현 대통령과 싸워준 정운찬에게 동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 내에서 이 파티가 화제가 되면서 ‘사람 끌어모아 세 과시하는’ 정운찬에 대한 경계심이 일었다. 며칠 뒤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이 ‘정운찬 대세론’을 공개리에 거론한 것도 이런 심리의 반영이었다. ‘경계의 대상’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다.
언론계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변했다. ‘그래? 대통령이 되시겠다고?’ 하는 의식이 발동했는지, 한 신문사는 정운찬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정운찬은 이 신문사 회장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이 신문사 사장이 정운찬을 찾아와 사과했다. 그러나 한번 방향을 튼 언론의 태도는 쉽게 ‘원위치’ 로 돌아서지 않았다.
이후 정운찬과 언론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언론은 그에게서 ‘대선 커밍아웃’을 원했고 천성적으로 신중한 그는 중간지대에 머무르려 했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사이, 실체 없는 레토릭(rhetoric)만 계속 보도됐다.
“정치를 안 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충청인이 나라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왔다” “여권에서 나를 ‘불쏘시개’로 이용하려 한다” “대통령에 관심이 없다. 특히 열린우리당에서 거론되는 게 더 싫다” “한때 언론에서 이야기해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정치를 ‘절대’ 안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대선 출마 생각을 안 했다고 한다면 거짓말”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은 다 지난 얘기다”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
언론은 ‘정치 참여의 수위가 미세하게나마 높아지고 있다. 결국 출마선언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연히 “빨리 결단하라”는 비판성 주문이 나왔다. 정운찬은 사석에서 “어떻게 그 신문이 내게…”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지인들은 “언론이란 원래 그렇다. 대통령이 보통 자리냐. 이런 정도의 비판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5년밖에 더 남았나”
정운찬은 ‘대통령의 꿈’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그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대통령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인들은 이런 그의 권력의지를 북돋우는 데 적극적이었다.
정운찬의 한 측근은 지난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측에 박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박 전 대표 측에서 “정운찬 총장도 함께 만나자”는 응답이 왔다. 순간 이 측근은 ‘내가 들러리냐’는 생각이 들어 박 대표 측에 화가 났다고 한다. 이후 이 측근은 정운찬의 대선 독자출마를 앞장서서 돕게 됐다.
정운찬은 자신이 대선에 출마하기 위한 5대 원칙을 갖고 있었다. ▲2007년 1학기 강의(서울대 경제학부 4학년 대상 ‘경제학연습Ⅰ’ 과목)는 끝까지 맡는다 ▲나의 당을 창당한다 ▲경선이나 오픈프라이머리는 하지 않는다 ▲정치참여 선언 전 지지율이 3%는 돼야 한다 ▲2012년 총선까지 책임진다 등이었다.
이 5가지 원칙을 지켜가며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김종인 의원은 “늦어도 3월 말, 4월 중순엔 출마 선언을 해야 한다”고 정운찬을 압박했다. 조순 전 시장도 그의 출마를 독려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면서 정운찬의 고민도 깊어졌다.
개강한 지 얼마 뒤인 일요일 오후, 그는 학교에 있었다. 그가 맡은 수업 준비를 위해서였다. 지인들이 그를 불러냈다. 지인들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하면서 그를 압박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4월 4일 광주 전남대에서 강연하고 있다.
만일 정 총장이 출마선언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그렇게 군불을 지피다가 이제와 포기하면 주변의 시선이나 대우가 예전 같지는 않을 거다. 정 총장의 교수 정년은 이제 5년 남았다. 남은 5년을 노교수로 그렇게 보내는 것과, 아니면 남자답게 큰 꿈에 한번 도전해 정치지도자로 우뚝 서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교수 그만두면 수입은…’
정운찬은 이날 폭탄주 등을 많이 마셨다. 그는 지인들의 논리에 설득이 되는 듯했다. “나, 대통령 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대통령직에 대한 의지도 나타냈다. 그러나 현실적 벽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출마하기로 하면 사무실도 내야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시드 머니’도 일정 정도 필요하다.
정운찬은 총장 재임 4년 동안 서울대 발전기금으로 1500억원을 모금했다. 그는 기업인들을 만나면서 특유의 CEO적 면모, 인간적 친화력을 보여줬다. 서울대 교직원들은 정운찬의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기금 모금 때문에 기업인들과 특급 호텔을 자주 찾다보니 어느덧 이런 상류문화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지인은 “이제는 신림동 시장에서 대학생들과도 어울리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정운찬은 본인의 재산을 불리는 재테크에는 밝지 않았다. 그는 출퇴근 거리가 멀어 수서에서 방배동으로 이사 오면서 대출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중형 승용차는 부인이 주로 타고, 본인은 택시나 지하철을 이용한다. 한 지인은 “정 총장의 경우 방배동 집말고는 이렇다 할 재산이 없다. 한번은 그의 통장 잔액을 확인해봤는데 1억원 남짓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면 생활비는 어떻게…’ ‘승용차도 새로 사고 수행비서도 둬야 할 텐데…’라는 현실적 고민이 그의 주변엔 없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정운찬이 정대철 열린우리당 고문을 만나 “돈이 없다”고 하소연했고 정 고문이 “돈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일제히 보도됐다. 정 고문이 대화 내용을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공개했고, 한 의원이 이를 한 언론에 얘기한 것이 계기였다. 정운찬과 정 고문 측은 “그런 말 오간 적 없다”고 했지만 정운찬은 곤욕을 치렀다. 한나라당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된 바 있는 정대철 고문과 돈 문제를 상의하다니…정 전 총장은 짝퉁 정치인”이라고 공격했다. 돈 문제는 그의 발목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정운찬의 ‘비전’은 요약하면 ‘일류국가론’이다. 이를 위해 민주화, 산업화 이념 대신 ‘경제와 교육의 글로벌화’를 내세웠다. 경제 생산성과 교육 경쟁력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내용이다. 경제와 교육은 어필하는 이슈다. 자신의 이력을 바탕으로 나온 비전이므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그는 “교수들이 현실을 모른다지만 이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문제를 더 멀리 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감의 발로였다.
“30군데 강연하면 되겠지”
정운찬은 강연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30군데 정도 강연하면 어렵지 않게 지지율이 5%대에 이를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부지런히 전국을 돌며 강연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7년 4월2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 정운찬은 0.5%의 지지율을 얻는 데 그쳤다. 손학규(6.0%), 정동영(3.0%) 보다 처지는 결과였다. 정운찬은 대선 출마 선언을 위한 ‘목표 지지율’을 3%로 낮췄지만 이마저 쉽지 않았다. 4월30일 동아일보 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2.2%였다. 그는 실망감을 비쳤다. 그러나 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여권 주자들은 인지율은 높지만 지지율은 낮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인지율이 낮다. 지지율이 오를 여지가 많다. 2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따르면 호남에선 ‘새 인물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응답이 56.5%나 됐다. 그가 출마 선언을 하고 여권 세력이 결집되면 달라진다.”
한 언론인은 “정 전 총장은 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연을 하기 때문에 할 말이 제한된다. 그 말이 그 말이므로 적극적으로 기사화하기 어렵다. 처음 몇 번 정 전 총장의 지방 강연에 따라다니다 관두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율로는 설명이 안 되는 비중이 그에게 쏠렸다. 몇몇 언론은 “이번 대선에서 정운찬이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범여권 진영 전체가 그만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이와 비례해 정운찬에 대한 루머, 검증론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정운찬은 자신과 관련된 루머가 돌고 있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적잖이 신경을 썼다. 지인들은 ‘루머가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꼼꼼한 성격상 그런 얘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잘 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운찬은 불출마를 결심할 무렵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만일 열린우리당 쪽으로 가게 된다면 김근태·정동영 전 의장과 천정배 의원이 지분을 주장하려 할 텐데 그렇게 해선 대통령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그럴 바엔 이명박 전 시장이나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을 하는 게 낫다”고 했다. 그의 지인은 “여권의 한 유력 인사는 정 전 총장에게 호남과 수도권의 지분 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지인은 “정 전 총장은 당면 과제인 대선 승리만 생각해야 하는데 ‘대선 이후의 약속 이행’ 문제까지 걱정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돈, 지지율, 루머, 연대 문제에 대한 대처에서 일관되게 확인된 것은 그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이상적 상황’을 꿈꿔왔다는 점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에 따르면 정운찬은 학생운동을 하느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유 장관을 포함한 학생들에게 무더기로 F학점을 준 바 있다. 부족하고 미비한 대로 일단 부딪쳐가면서 목표를 성취해 나아가는 게 정치의 일반적 패턴이지만, 한 치 오류를 용납 않는 엄격한 이론가로선 쉽지 않은 일이다.
방배동 단골집, 손잡는 습관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 검증론’이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정운찬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라고 그의 지인들은 입을 모았다. 정운찬에 대해선 호적 및 병역 루머,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루머, 표절 의혹이 없는 것은 연구실적이 적기 때문이라는 루머, 서울대 총장 시절 문제 등이 정치권과 증권가에서 나돌았다.
정운찬은 입양으로 인해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는 없다고 한다. 정운찬은 1947년 충남 공주에서 아버지 정창성씨와 어머니 이경희씨 사이에서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이후 딸밖에 없는 삼촌 정창록씨의 양자로 입적됐다. 그는 1966년 신체검사에서 ‘2을종’ 판정을 받았으나 삼촌이 이미 세상을 떠나 ‘부선망(父先亡)’ 조항에 따라 소집연기 처분을 받았고, 1970년대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이 징집면제됐다.
정운찬은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가 9세 때인 1956년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머니는 병원 침대시트 세탁을 하면서 남매를 키웠다. 정운찬은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입주과외를 했다. 그는 서울대 졸업 후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 조순 전 시장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그에게 비행기 삯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운찬의 지인은 여자 문제 루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여자 문제 루머로 그의 가족들이 속상해했다. 그러나 정 전 총장은 가정적인 사람이고 사생활이 완벽하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아래인 사람들과 만나면 지위를 막론하고 술값은 자신이 계산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 제자나 후배에게 자주 밥을 사줘서 재산을 많이 모으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자택 근처인 방배동에 다섯 군데 정도 단골집이 있다. 그중 한 곳인 횟집에 함께 간 적이 있다. 여자 사장은 아들이 서울대에 다녀 서울대 총장 출신인 그를 환대했다. 일행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정 전 총장은 그 여자 사장의 손을 잡고 덕담을 나눴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손을 잡고 자상하게 얘기하는 게 정 전 총장의 버릇이다. 이 때문에 그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 습관이 루머로 비화된 것이다.”
연구실적의 경우 그의 지인은 “정운찬은 뛰어난 경제학자로,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다만 2002년부터 사회대 학장, 총장 등 보직을 맡으면서 학교 일에 전념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수록된 정운찬의 저서(1984~2003년, 공저 포함)는 ‘경제학원론’ ‘경제학원론 해설집’ ‘거시경제학’ ‘거시경제론’ ‘경제통계학’ ‘금융개혁론’ ‘통계학’ ‘예금보험론’ ‘중앙은행론’ ‘중앙은행의 이론과 실제’ ‘화폐와 금융시장’ ‘예금보험제도의 평가 및 개선과제’ ‘금융환경변화와 예금보험제도의 발전방향’ ‘금융개혁과 기술금융제도에 관한 연구’ ‘동태경제학의 제 문제’ ‘한국경제 아직도 멀었다’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 ‘대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등 18권.
정운찬은 2002년 7월 서울대 사회대 학장에 오른 지 5개월 만에 총장선거에 출마해 ‘소장파 개혁’ 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낙선한 진영 등 내부 고발자에 의해 총장 재임시절의 문제가 드러날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2002년 서울대 총장선거 때 정운찬과 경쟁했던 장호완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을 맡았다. 교수협의회는 대학 본부 운영과 관련해 총장을 견제하는 기구. 그러나 장 회장은 2006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통합논술고사와 관련해 정운찬을 집중 공격할 때 “방향이 옳기 때문에 적극 지지한다”며 오히려 정운찬을 옹호했다.
정운찬은 1986년 4월 2명의 교수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정운찬 등 주동교수 3명을 해고하라고 지시했다. 김종인 의원(당시 민정당 의원)이 이를 막으면서 두 사람은 친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운찬은 학계에서 ‘중도개혁파 교수’로 알려졌다. 그를 눈여겨본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취임 초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를 한국은행 총재로 지목했으나 그는 이 제의를 고사했다.
“정대철은 만나지 말라”
범여권은 이 때문에 정운찬을 중도개혁진영의 대선주자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정운찬 본인이 주체적으로 구도를 엮을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조순 전 시장과 김종인 의원이 그에게 조언했다. 이들 외에도 소장파 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엔 학자뿐 아니라 동교동계 출신, 현 정권의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전문 정치인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자문그룹 간에 갈등이 발생했다. ‘반(反)한나라 반(反)노무현’이냐, 아니면 ‘반(反)한나라 비(非)노무현이냐’의 노선 갈등이 기저에 깔렸다. 일부 지지자는 노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한반노’ 성향의 지지자는 노 대통령을 불신했다.
정운찬의 대선 불출마 선언 후 노 대통령은 누가 봐도 정운찬을 겨냥한 듯한 독설을 퍼부었다. “나섰다가 안 되면 망신스러울 것 같으니 한발 슬쩍 걸쳐놓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다가 될 성싶으면 나서고…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분은… 거저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이 원하는 대선구도에 ‘범여권 통합후보 정운찬’은 없었다. 반한반노 그룹이 옳은 판단을 한 것이다. 이 그룹은 “정대철은 노무현 쪽 사람이다, 정대철과 만나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결국 정대철 고문과 만난 후 ‘돈 문제’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일이 정운찬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정운찬은 지지자들 사이에서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지자들 사이의 갈등은 대선 출마 포기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됐다.
광주 방문은 시련
4월4일 정운찬은 광주를 찾았다. 전남대 강연에서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을 옹호했다. 언론은 ‘여권 통합의 그림이 그려지려나보다’며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러나 이날 광주 방문은 정운찬에겐 시련이었다. 그를 대하는 분위기는 냉랭했다. 일부 동교동계 인사는 지난해부터 ‘고건과 정운찬을 경쟁시켜 정운찬을 여권 후보로 내세우면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고 봤다. 문제는 자신들이 정운찬을 ‘통제’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이들은 정운찬이 먼저 자신들에게 굽히고 들어오기를 원했다. 정운찬은 노련한 이들을 상대하기가 피곤했을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한 동교동계 인사도 있었다. 목표를 위해선 감내할 것은 감내하는 기존 정치인과 정운찬은 다르다고 봤다. 그는 ‘정운찬을 함부로 대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안은 정운찬뿐’이라는 얘기를 흘리고 다녔다. 그러나 정운찬의 낙마를 막지 못했다. 노 대통령과 달리 동교동계는 정운찬을 필요로 했지만 그를 잃었다.
광주에서 정운찬은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 삼성의 임원이 동석했다. 법적, 도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친노 진영에선 ‘정운찬의 행보는 의외로 불안한 질주 같다. 오래 못 갈 수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운찬의 한 지인은 “출마 포기 후 그가 갖고 있던 자질, 역량, 비전이 더 돋보인다”고 했다. 정운찬의 부상(浮上)과 추락에는 지역구도, 지분정치 등 한국 정치의 그늘이 녹아 있다.
정운찬은 바람직한 대통령상(像)에 대해 “품격이 있는 사람, 이해관계에 덜 얽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이해관계에 덜 얽혀들기 위해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꿈을 접은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