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4년 6·3항쟁의 ‘방아쇠’가 된 ‘학원 프락치 폭로 및 보복 린치 사건’의 주인공 송철원(宋哲元·65·신시대21 회장)씨가 ‘신동아’에 귀중한 자료를 보내왔다. 그의 아버지 송상근(宋相根·94)씨가 1964년 3월25일부터 1969년 4월30일까지 모은 이 자료에는 당시 학생운동과 관련된 각종 보도물과 선언문, 재판 기록, 서신, 운동권 내부 문서 등이 망라돼 있다. 이들 살아 숨쉬는 기록이 보여주는 역사의 진실과 암울한 시대에 피어난 애틋한 부자(父子)의 정.
6·3항쟁 스크랩북을 보고 있는 송철원씨 부자. 아래는 아버지 송상근씨의 일기장.
1961년 3월10일, 서울시립 영등포병원장 송상근씨는 셋째아들 철원의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 소식에 하도 기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송씨는 일기장에 아들의 서울대 입시 본고사 점수와 경쟁률까지 기록할 만큼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까지 쓴 그의 일기는 암울한 군사독재 치하의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역사적 기록 그 자체다.
송철원씨는 1960년 4·19혁명 이래 학생운동을 주도한 서울대 문리대 내 학원 프락치(사찰요원) 사건을 폭로한 뒤 중앙정보부로부터 보복 린치를 당해 1964년 6·3항쟁의 기폭제가 된 인물.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이후락 중정부장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특히 송씨는 공화당에서 자금을 대며 뒤를 봐준 것으로 알려진 극우파 학생 집단 YTP(Youth Thought Party, 靑思會)의 존재를 ‘동아일보’에 연일 폭로함으로써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송씨의 대학생활은 도피와 은신, 투옥의 연속이었고, 졸업 후의 인생항로도 저항과 연행으로 점철됐다. 아버지의 일기장이 아들에 대한 걱정과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버지 송씨는 시립병원장과 철도병원(서울교통병원)의 장을 겸임한 국가공무원 신분이었다.
운동권 주치의이자 代父
어버이날을 며칠 앞둔 지난 5월4일 오전 서울 은평구의 실버타운 클라시온 로비에는 근 40여 년 만의 만남이 이어졌다. 송씨와 함께 6·3항쟁에 참가했던 6·3동지회 회원들이 송상근씨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송씨에게 큰절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송씨는 고희(古稀)에 가까운 아들의 친구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님 저희들 기억하시겠습니까. 원범이와 성섭입니다.”
“그럼 기억하고 말고…얼굴이 옛날 그대로인데 뭘.”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벌써 죽은 목숨인데.”
“다 내 아들들이고 옳은 일을 했는데 당연하지.”
6·3동지회 상임고문 이원범(68·11·15대 국회의원)씨와 사무총장 오성섭(68·전 동명기술공단 부사장)씨는 1964년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가 경찰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한 뒤 송상근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특히 이씨는 잦은 부상으로 송씨의 신세를 많이 졌다. 이씨는 “아버님이 집에 가나 병원에 가나 늘 숨겨주고 치료해주며 자식처럼 대해 주셨다”며 “가난한 우리에게 단 한 번도 병원비를 받은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송씨는 학생운동권의 전담 의사나 다름없었다. 지방 출신 학생들에겐 아버지 노릇도 톡톡히 했다. 송씨의 집안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형편이 어려운 지방 학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송씨는 공무원이었지만 비판적 시대의식이 남달랐다. 다시 그의 일기를 보자.
‘1961년 4월19일(수) 맑음 : 젊은 사자들이 부정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한 돌이다. 역시 과(科)가 과인 만큼 철원이는 3일째 행사준비로 귀가조차 하지 않고 있다. 젊은이의 앞날에 광명이 있기를 빌며….’
40년 만에 공개된 6·3 자료
송상근씨에게 큰절을 하고 있는 6·3동지회 회원들.
6·3항쟁 동지들의 5월4일 모임에서 송철원씨는 놀랄 만한 자료들을 공개했다. 1964년 3월25일부터 1969년 4월30일까지 주요 시국사건에 대한 신문보도를 모아놓은 대형 스크랩북 8상자와 6·3항쟁과 관련된 각종 자료였다. 모두 쌓으면 높이가 4m에 달하고 무게는 소형 트럭 적재량의 절반 분량이다. 6·3항쟁 관련 신문 보도뿐 아니라 관련 학생들의 입건에서부터 재판과정, 결과까지 정리한 도표와 담당 판사, 검사의 이름이 정리된 일지, 운동권 주요 멤버들 간에 오고간 서신, 선언문과 격문 등이 망라돼 있다. 스크랩북은 종이봉투를 뜯어서 바탕을 하고 달력을 오려 페이지 표시를 하는 등 모두 재활용품을 이용한 것인데 아직까지도 보관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 방대한 스크랩북과 자료들은 아버지 송상근씨가, 아들 철원씨가 6·3항쟁에 앞서 1964년 3·24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한 이후부터 모은 것. 철원씨와 관계된 것으로는 도피 생활 중에 보낸 편지, 구속통지서, 격려편지, 감옥에 넣은 영치금 영수증, 면회기록 및 차입표, 계엄사령관의 출두 공고서, 중앙정보부로부터 린치 당한 사실을 동아일보 김원기 (전 국회의장)기자에게 연락하라고 아버지에게 건네준 메모, 불꽃회 관련 자료 등이 있다. 서울대신문 기자인 정치학과 61학번 동기 김학준(현 동아일보 사장)이 철원씨 사건과 관련해 쓴 기사도 눈에 띈다. 송상근씨는 스크랩을 시작한 이유를 스크랩북 맨 앞머리에 이렇게 써놓았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을 중심으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한 후 5월21일 새벽 불법납치 폭행당함을 계기로, 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제반 데모에 관한 지상(紙上) 보도기사를 전부 발취 수집하기로 결심하였다.
4년11개월이 지난 이달 (철원이가) 교직생활(건국대 강사)에 들어감으로써 다음달 5월분으로 중지하려고 한다. 그간의 가택수색 여러 차례 등으로 일부가 습기 차고 벌레 먹어 훼손된 것은 유감천만이다. 1969년 4월.’
철원씨는 6·3항쟁 한 해 전인 1963년 2학기 중반까지만 해도 운동권에서 그리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3학년 때인 1963년 정치학과 학생회장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한 경기고 동문이 낙선하자 기성 정치판과 비슷한 학생회에 낙담하고 운동권 핵심세력과 가까워진다. 이때 그는 6·3항쟁의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김중태·현승일·김도현과 지도부 그룹이던 김정남·김지하(김영일)·최동전·박재일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집을 나와 김도현이 편집장으로 있던 문리대 학생기관지 ‘새세대’ 사무실에서 합숙하며 운동권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중정 프락치 밝혀내다
그러던 어느날 송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 선배인 김모씨가 영자신문 기자라며 학교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김씨는 문리대 학생회장과 서울대 총학생장을 지낸 인물로 1963년 봄 대학 졸업 후 행방이 묘연했다. 대학1, 2학년 때 김씨를 분신처럼 따라다니며 선거활동을 도왔던 송씨는 김씨가 느닷없이 나타나 “정치를 하게 도와달라” “입당원서를 써 달라”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자 최동전·김도현에게 그의 뒤를 캐보겠다고 하고 김씨에게 접근했다.
조사 결과 김씨는 졸업 후 중앙정보부의 학원사찰 전문요원이 돼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던 서울대 문리대 근처를 배회하며 동향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결국 중정의 프락치로 밝혀진 김씨는 뒷날 국가안전기획부 국장을 지냈다). 몇몇 학생이 그에게 도움을 준 사실도 밝혀냈다. 송씨는 이런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린 후 그해 말쯤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송씨에게 형과 누이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학비를 벌 생각으로 라디오 수리학원과 영어학원에 다니며 유학준비를 했다.
송상근씨가 모은 스크랩과 자료들을 아들 철원씨가 설명하고 있다.
‘1964. 3. 24(화) 흐림 :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해 연·고대 등으로 퍼져 많은 학생이 연행되고 국회의사당에서는 연좌데모가 있었고…상당수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철원이가 그 속에 들어 동대문서에서 자정이 지나도록 귀가치 못하였다. 위정자들은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아니 주고 일시적인 속임수로 그때그때 모면하여 나가는 식이어서야 신임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극우단체 YTP의 실체
송철원씨는 3·24시위 이후 다시 유학 준비를 위해 집으로 들어갔지만 얼마 안 있어 다시 학교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기고 후배들이 찾아와 “학교에서 경기고 출신은 모두 프락치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경기고 선배이자 중정 프락치였던 김씨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나와 학원사찰 조사활동을 재개했다.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이런 활동은 곧 전국을 뒤흔드는 사건으로 비화된다. 학원사찰 문제가 대학가의 이슈로 가닥을 잡아갈 즈음 송씨가 엄청난 자료를 입수했다. 후배를 통해 송씨에게 찾아온 사람은 자신을 중앙대 학생이라고만 밝히고 가방 하나 분량의 서류뭉치를 안기고 사라졌다. 이들 문서는 공화당의 재정지원을 받는 극우파 학생단체로 알려진 YTP에 대한 것이었다. 내용은 놀라웠다. 전체 조직도와 입회원서, 서약서뿐 아니라 미행법, 접선법, 교살법, 교살을 자살로 위장하는 법 등이 자세히 제시돼 있었고, 실제로 조직원들은 모처에서 훈련까지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사무실의 위치와 전화번호, 암호 등도 씌어 있었다.
이 단체의 서약서엔 “일체의 비밀은 생명을 걸고 엄수하며 배신할 때는 생명을 바친다. 생명을 걸고 복종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4·19 이후 KKP(구국당)로 출발한 이 단체는 5·16군사정변 세력과 결탁한 이후 극우 청년·대학생 단체로 변모해 1963년 7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용 비밀폭력단체로 재조직됐다. 이후 중앙정보부가 이를 학원사찰에 이용했다는 게 운동권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송씨에게 발각된 당시에는 이미 생명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정권에도 이 단체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YTP가 과연 어떤 일을 했고,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선 지금까지 거의 밝혀진 게 없다. 이와 관련, 6·3동지회 사무총장인 오성섭씨는 송씨의 아버지를 찾은 자리에서 기자에게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네가 유관순이야?”
“당시 제 애인(현재 부인)의 오빠가 YTP 총책이었는데, 애인을 시켜 관련 문건을 빼낸 뒤 윤보선 의원 측에 전해줬지요. 윤보선과 김영삼이 국회에서 YTP와 관련한 질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빼낸 문건 때문입니다. 처남은 아직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만 언젠가는 말할 때가 올 겁니다. 제가 보기엔 공화당의 거물 김○○이 배후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송철원씨는 문리대 동기인 손정박·최혜성·이영섭 등과 학원사찰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경기고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송씨는 문리대 내 관련자들을 불러 조사하고 사실 확인용 각서를 받는 대신 ‘신상명세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써줬다. 조사 결과 문리대 내에만 중정 끄나풀과 YTP 회원이 20여 명에 가까웠다. 심지어 정치학과 동기 중에도 거기에 속한 이들이 있었다. 송씨는 “중정 사찰요원인 김씨의 조직과 YTP는 완전히 별개인데도 사람들은 흔히 같은 단체로 오해를 한다”며 “조사해보니 두 쪽 모두에 프락치로 거명된 경기고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1 송상근씨가 스크랩 북에 정리한 1964년 6·3항쟁 당시 구속 학생 명단. 이명박 전 서울시장 등의 이름이 보인다.
2 6·3항쟁 당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3 6·3항쟁의 주역 김중태씨가 피신 상태에서 송철원씨에게 보낸 편지.
4 신문에 난 6·3항쟁 배후 조직도. 맨 위가 도예종이고 그 밑에 김중태, 송철원이 보인다.
5 6·3항쟁 이후 문교부 장관과 계엄사령관이 신문에 낸 제적 통보문. 송철원을 송원철로 이명박을 이명백이라고 오기(誤記)했다.
6 1964년 8월 피신 당시 ‘병철’이란 가명으로 부모님께 쓴 편지. ‘밖으로 사람을 자주 보내지 마라’는 글귀가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7 송철원씨가 1964년 중앙정보부로부터 보복 린치를 당한 후 아버지에게 준 메모지.
8 1965년 2월 출감한 송철원씨.
1964년 5월 기자들에게 중앙정보부의 린치 상황을 설명하는 송철원씨.
‘5개 항목을 내걸고 학원사찰 성토대회가 있었는데 철원이가 선봉이었던 모양이다. 부정부패와 싸우는 기개가 가상하다.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 든든한 마음이 든다. 위정자는 부정부패를 빨리 척결하고 일대 영단을 내려 국민의 신망을 얻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YTP 사건은 반박정희 시위의 절정을 이룬 5월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연결된다. 최루탄과 돌이 날아드는 가운데 학생들은 민주주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관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외신에도 보도되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날 송씨는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로 시작하는 김지하의 조사를 직접 읽고 도주했으나 21일 새벽녘 중부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서울대생 린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중부서에서 검은 지프로 옮겨 태워진 그는 건장한 남자 둘 사이에 머리를 처박힌 채 어딘가로 끌려갔다. 느낌으로 남산 근처임을 알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러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구타했다.
“네가 뭔데 우리 동료를 못살게 굴어, 김중태는 어디 있어? 네가 유관순이냐. 이 새끼 산꼭대기에 묻어버리면 그만인데…. 왜 국가기관을 상대로 싸워….”
계속 맞다간 죽을 것 같아 실신한 척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담뱃불로 손등을 지졌다. 비명을 지르자 구타의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그들이 “이러다 죽는 것 아니야” 하며 수군거리는 말을 들었다. 한참이 지나 눈을 떠 보니 경찰병원이었다. 그는 안도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경찰서로 가면 살고, 정보부 대공분실로 끌려가면 죽는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슷한 시각,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중무장을 한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법원을 습격해 판사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협박한 것. 전날 붙잡힌 학생과 시민 102명에게 신청된 구속영장을 법원(양헌 판사)이 대부분 기각한 데 대한 위협행위였다. 영장 기각 덕에 풀려난 송씨는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에게 기자를 불러달라며 자신의 메모가 적힌 쪽지를 내민다. 6·3항쟁에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6·3항쟁 방아쇠 된 메모지
‘동아일보 김원기 기자, 조선일보 이종률 기자, 경향신문 박신일 기자. 중부서원(中部署員) 괴한 4~5명에게 21일 밤 0시30분부터 20분간 구타당한 후 동일 4시경 동대문경찰서로 연행.’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뛰어온 동아일보 김원기 기자는 이를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이후 온 언론이 이를 보도하자 정권은 여론에 밀린 나머지 중정 요원 3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그 배후는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 전국에서 격려의 편지가 쇄도했다.
송씨는 또 4월에 마무리한 학원사찰 조사 결과와 YTP 문건 일체를 김원기 기자에게 모두 넘겼다. 동아일보는 이를 연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고, 다른 매체들은 이를 받아쓰느라 바빴다. 문건이 워낙 방대해 며칠을 써도 다 쓰지 못할 분량인지라 송씨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김 기자는 신이 나 있었다”고 한다.
송씨는 몰려드는 취재진을 피해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던 철도병원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운동권뿐 아니라 국민적 스타가 돼 있었다. 아버지 송씨는 그 무렵의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법치(法治)한다는 민주국가에서 특수한 사람 이외에는 다닐 수 없는 심야에 누구인지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서 얻어맞고 실신 상태의 것을 동대문경찰서에 보냈다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사실상 약자에 대한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일이 횡행(橫行)되니 그 이면에는 얼마나 억울한 매를 맞는 이가 많겠는가? 이번에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네들 두목의 마음을 녹여 동족끼리 그 야수적인 만행만은 중지하고 그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하여주십사고 기도하였고 또한 바라는 바이다.’
김지하의 지휘로 단식농성을 벌이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은 6·3항쟁 당일 송씨를 들것에 실은 채 중앙청 앞으로 행진했다. 그 뒤로 단식으로 쓰러진 학생들의 들것 행렬과 앰뷸런스가 잇따랐다. 전국적인 6·3시위에 정권은 그날 6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송씨는 이때부터 피신을 다녀야 했다.
기나긴 도피
6·3 당일은 최선규(아버지가 재무부 과장)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은 장충동에 있던 유창열 의원(당시 민주당 의원)의 집으로 가서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 인근의 경기고 동기이자 서울대 공대 출신인 배순훈(전 대우전자 회장, 정통부 장관)의 집으로 피신했다. 배순훈의 아버지 배동환씨는 당시 한국타이어 사장으로, 피신 기간 내내 자기 자식의 일인 양 송씨를 숨겨주고 돌봐줬던 은인이다.
형사들은 가택 수색을 빌미로 송씨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아버지와 그의 병원을 괴롭혔다. 병원에 대한 보복성 감사도 이어졌다. 6월22일엔 문교부 장관과 계엄사령관 명의로 6·3항쟁 주도자 38명에 대한 조건부 제적 공고가 신문에 실렸다. 학교에 등교하고 해명하면 제적을 면해주겠다는 내용으로, 검거를 위한 미끼임에 분명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선 송씨를 비롯해 김덕룡·손정박·김정남 등이, 법대에선 조해녕·정정길 등이, 고려대에선 이명박 등이, 성균관대에선 오성섭 등의 이름이 올랐다.
피신 중이던 7월29일 계엄해제 소식을 듣고 학교로 돌아간 그는 형사에게 검거됐으나 급하게 연락을 받고 찾아온 아버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송씨는 “당시 아버지가 ‘9·28 서울 수복 때 급히 나와 만세 부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너도 꼼짝 말고 있어라’고 하시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후 집 마루 밑에 숨어서 몇 달을 보낸 그는 정국이 해빙되고 무기정학 처분이 풀리면서 10월14일 학교로 돌아왔다. 그나마 아버지가 담당교수와 경찰서를 오가면서 뒤치다꺼리를 한 결과였다. 그는 12월 졸업시험지에 학번, 학과, 이름, 과목, 담당교수만 적어내고 백지 시험을 치른 뒤 이듬해인 1965년 2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1964년 한 해 동안 그가 들어간 수업은 ‘원서강독’ 단 1시간이었다.
결혼기념일도 63, 전화번호도 63
송씨는 1965년 3월24일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 1주기를 맞아 김지하와 함께 3·24 제 2선언문과 격문을 작성한 사건과 한일회담 비준반대 운동 혐의로 그해 9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후 1966년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던 6개월간 아버지는 영치금을 넣을 때마다 그 영수증 뒤에다 아들에게 해야 할 말을 꼼꼼히 써놨다.
송씨는 이후 건국대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건국대 동국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하다 최동전·이영희·이재오와 함께 반정부 간행물 ‘신시대’를 발행하기 위해 상아탑을 다시 떠났다. 잡지 발행 계획이 무산되자 1971년에는 김지하·김민기 등과 함께 종로구 무교동에 주점 ‘레지스탕스’를 개업했으나 반정부 유인물 ‘타도’ 사건과 관련해 연행되면서(후에 무죄 석방) 문을 닫았다.
1971년 10월부터 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쓴 글들 때문에 한때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고, 1975년에는 어렵사리 얻은 건국대 경제학과 전임강사에서 해직됐다. 그러다 뛰어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1976년부터 학원 영어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대입을 준비한 이들 중에는 ‘송문영’이라는 이름의 유명 강사와 그가 쓴 참고서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송문영은 송씨가 강사 때 쓴 가명이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는 정치권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셨고, 이후 대한교과서(주) 상임고문과 (주)에듀TV 사장을 거쳐 현재는 ‘신시대 21’ 회장으로 있다. 요즘 그는 2004년에 귀국한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며 6·3항쟁의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그의 휴대전화 번호는 0063이고 결혼기념일도 6월3일이다. 그에게 6·3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며 사랑이고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