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로 가득 찬 국민…용기만 있으면 됐다
- 87년 5월, “6월에 잽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자”
- 명동성당 농성, 이한열 죽음이 6월항쟁 장기화 두 축
- 全 정권 군 동원 가능성?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 수도”
- 6·29선언 직후 ‘정권 꼼수에 말려들었다’ 지도부 책임론 제기
- 이한열 장례식에 모인 수십만 시민…“그러나 선배들은 없었다”
- 87년 전대협의 ‘DJ 비판적 지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 노무현 정권의 失政, 386 탓으로 매도하지 마라
정확히 하자면 그는 ‘6·10항쟁’이 아닌 ‘6월항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야 맞다. 6월10일에 그는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심과 학생운동 조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당국은 서대협 의장인 그를 6월1일 체포했다. 그는 6월10일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수송차량의 작은 창틈으로 시청 앞에 모인 군중의 성난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6월17일 ‘구속취소’라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 전개로 감옥에서 풀려난다. 세상은 그렇게 긴박하게,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목청 높아지고, 손짓 강렬해지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대학을 다닌 기자로선 일개 대학 총학생회장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을지 사실 좀 회의적이다. 그러나 1987년 당시 고려대에 다닌 동료 기자의 전언에 따르면 이인영 의원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학생들 앞에 서면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의 손짓에, 그의 외침에 학생들은 응어리진 분노를 터뜨리고, 용기로 무장했다. 이 의원은 20년 전 자신의 모습이 개인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됐다기보다, 그 시절이 그를 비롯한 모든 대중으로 하여금 전사가 되도록 부추겼다고 말한다.
“사람들 가슴속에 사회 정의가 짓밟히고 유린되는 데 대한 분노,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학살자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때였으니까요. 정서적, 정신적 공유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나 토론이 아니었어요. 왜 나가야 하는지를 설득하기보다, 용기를 내도록 선동하는 게 필요했죠. 그래서 목청이 높아지고, 손짓이 강렬해지고…. 제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과 사람들 가슴속 분노를 터뜨리는 건 일치된 과정이었지, 사람들에게 없는 분노를 심는 게 아니었어요. 의식을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용기를 터뜨리는 과정이었어요. 그때는 그게 필요했을 뿐, 저는 카리스마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 의원은 충북 충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재수 끝에 1984년 고려대 국문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를 뒤따라 교사가 되거나, 운 좋게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돼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성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대학 1학년 봄이 채 저물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인 것인지 깨닫는다. 당시 대학은 민주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었기에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는 그에게도 금세 전이됐다. ‘언더서클’에 가입해 활동했고, 3학년 2학기 때 과 학생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년 가을, 비공개 서클 활동이 점차 공개 활동으로 전환하는 흐름을 탔다.
혈서 유세
1986년 10·28 건국대 사태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언더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선도투쟁에서 대중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 의원이 이듬해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 의원은 당초 총학생회장은 자신과 상관없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같은 조직 내에서 출마를 준비하던 친구가 학점 미달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고, 조직은 그에게 출마를 권유했다. 선거를 30여 일 앞둔 2월 중순이었다.
“당시만 해도 학생운동을 하면서 ‘조직의 오더’ ‘사명’ ‘헌신’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또 총학생회장이 폼 나는 자리가 아니라 ‘징역 가는 길’이었으니 뺄 일도 아니었고요. 그게 옳고, 집단적 의사결정이 그렇다면 그대로 따라야 했죠.”
6월항쟁 당시, 학생뿐 아니라 화이트칼라를 비롯한 시민의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조직의 결정과 함께, 그도 마음을 굳히고 충주 집에 내려갔다. 그의 결심에 놀란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형에게 당장 휴학계를 써갖고 내려오라 호통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는 독했죠. 그게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줄 알면서도 군사독재와의 싸움이 우선이라, 부모와 가족을 뒤로 하고 뛰어들었죠. 그게 ‘더 큰 어머니’ 조국에 대해 아들 노릇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다음 날 새벽 서울로 올라와 선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고려대 서창캠퍼스 혈서 유세는 그의 독한 구석을 보여준다.
“고려대 안암캠퍼스와 서창캠퍼스 간에 학력고사 성적, 학생에 대한 대우 차이가 컸음에도 총학생회를 단일하게 구성했는데, 서창캠퍼스 학생들 불만이 컸어요. 선거 때만 되면 우르르 몰려와 ‘우리는 하나다’고 외치는데, 자신들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죠. ‘또 표 달라고 왔냐’며 냉랭한 반응을 보였어요. 운동권의 정의를 놓고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학생운동이 핑계가 됐든, 타성에 젖어서이든 어쨌든 노력을 안 한 거죠. 그런 점들에 대해 사죄하고 싶었어요. 제 진심을 표현할 다른 방법을 못 찾겠더라고요. 당초 준비했던 원고를 찢어버리고 혈서를 썼죠. ‘서창 민주화 투쟁 만세’라고. 그런데 그럴듯하게 가공하진 못했어요. 면도칼로 그어야 피가 잘 나온다는데, 이로 깨물어서 하려니까 피도 잘 안 나더라고요. 그래도 그걸로 진심이 통하긴 했어요.”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
그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지만 결국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서창캠퍼스 발전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1987년 정치 투쟁이 워낙 긴박하게 진행된 탓이지만, 어쨌거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분명했다. 이 의원은 “혈서를 썼을 당시 학생들이 표구해 걸어뒀는데, 2~3년 뒤에 가보았을 땐 액자가 없었다. 그게 그들의 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을 때만 해도 6월항쟁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까.
“1987년이 워낙 중요한 시기라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대회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어요. 군사정권은 정권을 재창출해 자신들의 군사독재 기반을 재편하려 했고, 학생운동세력으로선 그에 대응하는 총공세를 퍼부어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정권을 세워야 했으니까요. 물론 6월항쟁이라는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거나 성공을 예단했던 건 아니죠. 이길 거라 생각해서 싸운 게 아니었어요. 다만 ‘정의는 승리하고, 옳으니까 싸운다’였죠.
대회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미 각성한 사람들만으로 투쟁하는 건 동력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문화적, 정서적으로 유도해야 했죠. 3월 총학생회 선거, 4~5월 대학 축제 등을 통해 참여 기반을 넓히고, 대중적 역량을 쌓아올리는 정도는 목적의식을 갖고 계획했어요. 총학생회 투쟁위원회 100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1만명의 결의를 모으는 게 더 힘을 발휘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고려대에서는 매년 4월18일에 4·19탑까지 마라톤을 하는데, 거기에 1만명 이상이 참여하면 그 합법적 공간 안에서 터져 나오는 ‘독재타도, 호헌(護憲)철폐’ 함성이 비합법적 공간에서 500, 600명이 외치는 것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지닐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최대한 합법적이고, 최대한 대중적인 방법을 고민했죠.”
▼ 5월에 서대협을 결성한 것은 대회전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학생운동세력이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 대회전의 기반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4월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 선언을 했습니다. 온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 불이 붙고 있는데, 개헌 논의가 무의미하다며 호헌 선언을 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려고 하니 민심이 들끓었죠. 1월에 박종철 물고문치사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이 훼손됐는데, 4월13일에 정치적 정통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선언이 나오니까 분노가 끓어오를 수밖에요. 4월19일 수도권 30여 개 대학이 연합집회를 하고, 5월 초에 각 대학 학생회장이 모여서 학생회장 협의체를 구성해 대학간 연대의 틀을 공식화하자면서 서대협을 만들었죠.”
▼ 그후 서대협 의장에 선출됐는데,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 서울대에서 고려대로 넘어온 겁니까.
“전체 학생운동의 리더 노릇은 서울대가 주로 해왔어요. 대개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의 이념과 노선을 팸플릿을 통해 창출하고 제공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6년 들어 서울대 운동권이 자민투, 민민투로 나눠지고, 자민투가 친북 성향을 띤다고 매도되면서 서울대 학생운동조직이 많이 파괴됐습니다. 5월3일 인천에서 직선제 개헌 대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연세대 지도부도 역량이 절반 정도 파괴되고, 10월28일 건국대 투쟁에서 나머지 역량마저 대부분 사라지고 말죠. 그 결과 고대의 지도부 역량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았어요. 또 다른 이유는, 학생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 대한 주도적 권위 못지않게 분열을 넘어선 대단결을 통해 의기로, 용기로 뚫어 나가는 것도 필요한데, 그런 면은 고대가 강했어요. 언더서클이 동아리나 총학생회 활동을 배후조종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중노선으로 전환해 대중적이고 공식적인 형태로 학생운동을 이어갔죠. 그런 것들이 학생운동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어요. 보통은 총학생회장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언더서클의 ‘대빵’이 따로 있게 마련인데, 고대는 그런 걸 없애버려 어떤 의미에선 제가 막강한 총학생회장이 된 거죠.”
6월은 징검다리, 9월이 귀착점
시위대 맨 앞줄에 이인영 의원과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우상호 의원이 있다.
“그때 각 대학도 6월10일에 맞춰 총궐기하기로 뜻을 모으고, 준비를 해요. 하지만 6월 안에 ‘쫑’ 날 거라고 생각진 못했어요. 6월에 ‘잽’을 날리고 9월에 제대로 붙어보자는 계산이었죠. 6월을 징검다리로 삼고, 방학 때 역량을 농축하고 넓혀서 9월에 농민 추곡수매가 인상 투쟁, 노동자 임단투와 결합해 결론을 보자는 거였어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필리핀 2월 혁명을 참고했고, 9월이 결국 귀착점이 아닌가 생각했죠.”
맨몸으로 방패를 뚫다
▼ 당시 기사를 보면, 국민운동본부는 국민 행동요강까지 정하는 등 아주 조직적으로 6·10 집회를 준비했던 것 같아요. 학생운동세력과의 협의나 교류는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학생들은 재야나 야당이 혁명적이지 않고 프티적이라고 과소평가했고, 반대로 재야나 야당은 학생운동권이 급진적이고 위험하다고 인식했죠. 인천 5·3사태, 10·28 건대 사태 영향이죠. 학생들은 쉽게 통제가 안 된다며 조심스러워했는데, 박종철군의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벽이 와해됐어요. 정권의 치부, 바닥이 드러난 마당에 서로에 대한 작은 불신 때문에 연대하지 못해 적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죄악이라고 생각한 거죠. 학생들이 화염병 던지거나 각목 휘두르는 것을 자제하고, 차도로 바로 뛰어드는 대신 인도에서 군중에 섞여 함성을 지르는 비폭력 시위로 전환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 강화됐지요. 학생운동은 전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 광주민주화운동 7주년 기념행사 마지막 날인 5월23일에 학생들이 종로3가 도로에 드러누웠던 것은 계획된 일이었나요.
“그날 3000여 명이 나왔는데, 그중 1500여 명이 드러누웠을 거예요. 고대생이 800~900명쯤 됐죠. 지나고 나서 보면, 그날의 일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관성의 찌꺼기를 털어내는 거였어요. ‘싸움’ 하면 으레 돌 던지고, 화염병 던지고, 각목 휘둘러야 용감한 거라는 생각을 털어내고, (경찰에) 끌려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맨몸뚱이로 맞서는 더 큰 용기를 발휘했죠. 그 때문에 국민 대중의 공감을 얻었고, 도덕성을 인정받았어요.
이른바 결사항전, 옥쇄를 각오했죠. 한 사람이 잡혀가면 두 사람이 분노하고, 열 사람이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예요. 우리 몸뚱이를 내던져 불을 지핀다는 생각이었어요. 친구, 부모님, 교수님한테 편지를 썼어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간다, 왜 우리가 가는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가자’ 해서 간부들은 혈서로 다짐하고, 일선에 있는 활동가는 편지를 썼어요. 다 잡혀 감옥에 갇히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공개하고, 대자보를 붙여 많은 학생이 총궐기하도록 하려고 했죠.
그런데 의외로 수배 중이던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그날 밤 거의 다 풀려났어요. 그게 오히려 뚫어낸 거라고 생각해요. 건국대 사태 때 1300여 명이 구속됐는데, ‘다 잡아가라’하며 나서니 정권이 오히려 풀어준 거잖아요.”
이 의원은 연좌시위나 연와시위와 같은 평화투쟁 방식이 대중의 6월항쟁 참여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구속 취소’
고려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이인영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6월1일 새벽에 붙잡혔어요. 6·10 궐기 준비하면서, (학생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 대학 총학생회장이 단식에 들어가고, 6월6일엔 고대에 몇천 명, 몇만 명이 모여 연합대동제를 해서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로 하고, 프로그램을 가동하자마자 붙잡혔어요. 6월10일 마침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는데, 시청 앞에서 ‘안드로메다 군단’(전경)에 둘러싸인 인파를 호송차 창 틈으로 볼 수 있었어요. 그러고 6월17일엔가 나왔죠. 그래서 사실 6·10항쟁은 나중에 들은 얘기가 다예요.”
▼ 사건이 검찰로까지 넘어갔는데 풀려났단 말인가요.
“구속이 취소됐어요. 아주 이례적인 일이죠. 4월19일에 수유리에서 연합집회한 걸 집시법 위반으로 걸고넘어졌는데, 그날 제가 빠진 다음에 소요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절 주범으로 몰기엔 법적 고리가 약했어요. 고대 학생들이 석방투쟁을 강렬하게 해준 덕도 크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6월항쟁이 성공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죠. 저를 풀어주면 진정효과가 있을 거라 기대한 거예요. 제가 나온 뒤에 국민운동본부 주요 인사들도 거의 다 석방됐어요. 그렇게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거죠.”
그가 풀려났을 때는 이미 6·10 궐기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명동성당 농성과 이한열군의 희생이 6월항쟁을 장기화하는 결정적인 두 축이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국민운동본부 실무자들은 6월10일 밤 이미 승리의 축배를 들었고, 학생운동세력도 6월은 ‘본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성난 민심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걸로 예상했다.
그러나 밤늦게까지 경찰과 접전을 벌인 시위대 중 일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명동성당 농성은 6월15일 오후까지 5박6일간 계속됐다. 국민의 눈은 명동성당으로 쏠렸고, 매일같이 그 주위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벌어졌다. 6·10대회 하루 전날, 시위를 벌이다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군이 6월 내내 사경을 헤매는 동안, 최루탄은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어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 결국 ‘6·18 최루탄 추방대회’로 다시 한 번 수만 군중이 집결하는 기회를 만들었고, 6·10항쟁의 불씨는 6월 내내 꺼지지 않았다.
▼ 항쟁이 장기화하면서 아무래도 열기가 식고, 연대에도 분열 조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최루탄 추방대회 전후로 ‘비상조치설’ ‘계엄설’이 떠돌아 위기를 맞는 듯했죠. 6월20일이라고 날짜까지 박아서 꽤 구체적으로 소문이 떠돌았어요. 군부대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어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아침마다 교문 앞에 집합하고, 오후엔 시내로 퍼져 쉽게 진압당하지 않게 하자는 식의 준비를 했죠.”
6·26 최후 항전
▼ 당시 정권에서 정말 군을 동원할 생각이 있었을까요.
“실제로 군부대가 나올 준비를 했다고 하던데요. 광주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럴만하죠.”
▼ 그렇다면 당시 정권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군부대를 투입해 강제 진압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선택을 한 건 자신들의 용단이었다고 하는 게 억지는 아니네요.
“그건 그렇지 않죠. 군부대를 투입했어도 민중은 온몸으로 맞붙었을 겁니다. 그게 두려우니까 군부대 투입 계획을 접은 거죠. 아직도 6·29선언이 정권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옳다고 봐요.”
▼ 야당과의 연대는 어땠습니까.
“비상조치설이 나돌면서 YS(김영삼)가 정권과 타협하려는 듯한 조짐이 있었죠. 영수회담을 제의한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영수회담 때 정치적으로 적당히 타협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6월23일과 26일에 연합집회를 세게 하기로 계획했어요. 결국 24일 영수회담은 합의된 게 아무것도 없이 결렬됐죠.”
6월26일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국민평화대행진엔 전국 30여 개 지역에서 100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6·10대회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 결과적으로 이날 시위는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최후의 항전이 됐다.
“조기 게양!” “청와대!”
▼ 당시 학생운동 세력에선 6·29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일단 승리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말려든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인데, 집권세력에 시간만 벌어준 것 아니냐는. 그래서 지도부 책임론도 제기됐고요. 사실 완전한 승리라고 보긴 힘들죠. 하지만 부분적인 승리나마 인정할 건 인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투쟁을 계속할지 고민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어요.”
서대협 의장이던 이 의원은 이한열군이 사망한 7월5일, 장례식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국대학생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8월19일 충남대에서 전국 100여 개 대학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발족, 그를 제1기 전대협 의장으로 선출한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21’에 1987년의 이인영 의원에 대해 쓴 대목이 있다. 한 교수는 “민주화운동의 독수리 오형제 가문에서 4·19세대, 6·3세대, 긴급조치 세대에 이은 넷째인 386세대는 집안이 가장 요동칠 때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고, 형들이 변변치 못한 탓에 민주화의 큰 짐을 누구보다 많이 짊어져야 했다”고 하면서 이 의원 관련 일화를 소개했다(막내는 ‘(강)경대 친구’라 불리는 91학번 이후 세대라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이 끝나고 이한열군 장례식 날이었다. 군사정권이 주검을 탈취해갈지 몰랐기 때문에 청년학생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장례식장을 지켰다. 노제(路祭)를 지내러 시청 앞에 다다랐을 때 인파는 월드컵 때보다 더 많았다. 시청 앞 광장이 꽉 찼는데 아직도 후미는 신촌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관제동원을 제하고는 단군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파였고, 누구도 책임지지 못한 현장이었다. 당시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 기자로 일하던 나는 왔다갔다하다가 전대협 의장이던 이인영을 보게 되었다. 재야인사 누구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할 때 그래도 그는 백만 인파를 향해 앰프 시설도 제대로 없는 마이크를 잡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이 의원도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날, 주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인간 방어막을 치기로 되어 있었다. 대열에서 뒤로 밀린 그가 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영구차는 떠나고, 수십만 인파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 대열의 맨 앞에 서자 군중 속에서 “조기 게양” “조기 게양”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금세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조기 게양”을 외쳤다. 결국 서대협 일원 중 한 명이 시청 직원과 담판을 지어 조기를 게양했다. 그러자 군중은 “청와대” “청와대”를 외쳤다.
최초의 패배
“난감했죠. 전태일 열사 어머니까지 나와서 연설을 했지만, 시간을 끄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을지로나 퇴계로로 시가행진을 하다 자연스럽게 해산하는 방법도 떠올랐지만 그 많은 인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결국 청와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결국 광화문에서 경찰에 막혔죠. 대치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시위대 일부에서 경찰을 공격하는 바람에 경찰이 ‘지랄탄(다연발탄)’을 퍼부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요. 저에겐 최초의 패배였어요.
수십만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였는데, 그냥 그렇게 도망치듯 흩어지고 말았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쉬워요. 그 사람들이 시내 곳곳을 누비며 행진을 하다 YS와 DJ(김대중)에게 몰려갔더라면 두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미스터리예요. 그날 그 자리에 선배들이 왜 아무도 없었는지.”
▼ 선배들에게 물어보지 않았나요.
“물어봤지요. 그냥 뭐 회의하고 있었다, 어디 가 있었다 하는데….”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6월항쟁은 미완으로 남았다. 정권교체 실패의 원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그중엔 ‘전대협 책임론’도 있다.
▼ 12월 대선을 20여 일 앞두고 전대협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것이 학생운동사에 남을 결정적 실수라는 지적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것이 전대협 책임이라고 하면 제 잘못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당시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요. YS와 DJ가 양립하는 상황에서 독자후보, 후보 단일화, DJ 비판적 지지라는 세 노선이 있었는데, 지향점은 정권 교체 하나였어요. 전대협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건, 그렇게 어느 한쪽을 지지하면 후보단일화를 앞당길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어요. 지지 대상이 YS가 아닌 DJ였던 건, DJ가 더 진보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고요.”
사실 전대협이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11월26일, 그는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를 잃은 뒤에야 풀려났다. 그 사이 군부독재는 제도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지지율 36%’를 받고 합법적으로 정권을 연장했다. 그는 정권교체 실패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 그 후 10여 년을 재야 시민운동에 헌신한다.
“386, 관상용 꽃 아니다”
2000년 16대 총선은 운동권 출신 386이 대거 국회 입성을 시도해 화제가 됐다. DJ의 이른바 ‘젊은층 수혈’ 바람이다. 이 의원도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구로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의 386,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386 정치인들은 너무 빨리 시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3김(金)이라는 화훼업자들이 젊은 피를 찾아 채 피지도 못한 꽃을 따다 꽃병에 꽂은 격”이라고 비유했다. 이 의원은 이런 비유가 언짢은 듯했다.
“한홍구 선배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알겠습니다만, 전 관상용 꽃이 아니니 그렇게 비유하는 건 좀 그렇고…. 더욱이 386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전적으로 3김(金)의 발탁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는 건 옳지 않아요. YS 정권 이후 민주화운동은 재야보다 제도권 정치 안에서 하는 게 효과적인 면이 있어요. 정권의 성격 자체가 그 전 정권들과 다르니까요. 그런 변화들을 따져보고 정계 진출을 결정한 겁니다.”
▼ 그러나 대중이 운동권 출신 386 정치인들에게 실망한 건 사실입니다.
“386 정치인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386에 대한 불신은 언론 탓도 있어요. 노무현 정권을 386정권으로 인식시킨 바람에 386이 싸잡아 비난을 받게 됐어요. 노무현 정권에 386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386 정치인들이 잘못하는 것은 비난하되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그것대로 인정해줘야죠. 평생교육법, 사학법, 기초노령연금법 등은 운동권 출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넥타이 부대의 꿈
지난 4월23일 국무회의에서 6·10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 의원은 지난해 12월, 125명의 의원이 서명한 ‘6·10 민주항쟁 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는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 지정됨에 따라 6·10항쟁과 6·29선언 중 ‘1987년 민주화’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야 하는가 하는 논란이 일단락될 것으로 기대한다.
“1987년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나온 건 그들이 가장 빨리 이뤄지길 소원했던 꿈이 민주화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거리로 나왔던 넥타이 부대가 지금 바라는 꿈은 뭘까요. 돈 많이 벌어서 자녀들 사교육비 충분히 대주면서 교육시키는 것? 아니면 그렇게 사교육비 들이지 않고 공부시키는 것?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요즘은 가족에게 잘하려고 노력해요. 제 아내가, 제 아들이 행복해지는 길이 뭔지, 제 가족으로부터 답을 찾아보려고요.”
이 의원은 자신의 이름 앞에 ‘6월항쟁의 주역’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위대하고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갔을 뿐이다.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작은 노력에 비해 이미 과분한 격려와 보상을 받았다. 민주화항쟁은 꿈을 실현하고픈 민중의 열망이 빚어낸 것이다. 꿈은 박제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지금 대중이 원하는 꿈을 파악해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6월항쟁의 혜택을 입은 정치인으로서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