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문에 상께서도 사대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언어학적인 문제를 거론하셨다. “너희들이 ‘음을 사용하고[用音] 글자를 합한[合字]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吏讀) 역시 음이 (중국말과) 다르지 않으냐”는 말씀이 그것이다. 나아가 당신은 이두를 만든 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그 점에서 정음 창제 취지나 다를 바 없는데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비판하셨다(26/2/20).
하지만 부제학 최만리에게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며 얼굴을 붉히신 것은 내가 보기에도 좀 지나치셨다. 최만리가 ‘우려하는 바’를 당신께서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 경연석상도 아닌 자리에서 음운학적인 문제로 신하를 무안 주는 것이 평소의 당신 모습은 아니었다. 아마도 중국과 문명 경쟁을 벌이는 시점에서 여전히 ‘수입 학문’에 의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태도, ‘외교적인 우려’를 내세워 편민(便民)의 새길 찾기를 저지하려는 지식인들의 근시안이 답답하셨을 것이리라.
그런데 아마도 주상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정창손의 발언이었던 듯싶다. 처음에 ‘언문제작’을 찬성하다가 반대하는 쪽으로 돌아선 김문을 제외하면 정음반대파 중에서 유일하게 파직이라는 중벌을 받은 자가 정창손이었다. 사실 정창손은 내가 보기에도 주상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다. 처음에 상께서는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면서 정음 창제의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이에 대해 정창손은 ‘삼강행실’을 이미 반포했지만 충신과 효자 등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자질의 문제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상께서는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다”라고 하여 중벌을 내리셨다(26/2/20).
강직한 정창손, 세종을 찌르다
‘용속한 선비’라는 꾸중을 들은 정창손은 사실상 우직(愚直)한 학자였다. 1426년(세종8) 문과(文科) 급제자로 집현전에 들어온 그는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주상께 언문창제의 효과 없음을 아뢴 것이나, 나중에 ‘단종 복위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한 것에서 보듯, 그는 말할 때 앞뒤를 저울질하지 않았다. 하지만 맹자가 자막(子莫)을 비판하면서 지적했듯이, 정치세계에서 고지식한 정직은 때로 일을 망쳐놓는다. 청렴과 정직[淸直]이란 소신은 그에게 ‘단정한 선비’(28/10/10)라는 이름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과연 집현전의 이국편민(利國便民)이라는 지향점에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하긴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것은 그의 집안 내력이기도 했다. 그의 부친인 문경공(文景公) 정흠지는 김종서와 함께 육진을 개척한 공신이면서도 곧은 말 잘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일찍이 주상께서 철원에 강무(講武) 가셨을 때 짐승을 많이 잡은 자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겠다고 하자 정흠지 대감이 홀로 나섰다. “이제 짐승 많이 잡은 자를 벼슬 시키면 뒤에 전공(戰功)이 있는 자에게는 장차 무엇으로 상을 주시렵니까?” 주상은 뜨끔하셨고 결국 그의 반대를 받아들이셨다(21/6/16).
정창손의 맏형 정갑손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남들은 말할 수 있되 행할 수 없음을 근심하나, 공은 말할 수도 있고 행할 수도 있었다[公則有言又有行]”라는 그의 제문(祭文, 정창손 지음)이 말하듯, 정갑손은 말과 일을 모두 ‘절직(切直)하게’ 하는 신료였다. 예를 들어 이조판서 최부(崔府)가 자기 아들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 하자 정갑손은 어전회의에서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 모양”이라면서 그의 잘못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자 최부는 땀으로 등을 적셨으며 주상께서도 “내가 사람을 밝게 쓰지 못했으니, 매우 부끄럽다”고 말씀하셨다(문종실록 1/6/26).
정갑손은 이처럼 매양 굽히지 않는 강직한 간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공의 자세로 일하는 성실한 관료였다.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됐을 때, 그는 전국에서 올라온 쌀[稅糧] 중에서 조정에 바치고[監納] 남은 것을 사헌부 관원들의 주육비(酒肉費)로 쓰던 오랜 관행을 고쳤다. 그는 동료들의 갖은 회유에도 남은 쌀을 전부 국고에 집어넣었다. 그가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있을 때는 단 한 명의 직원도 사사로이 부리지 않았고, 청탁을 일절 거절했던 것도 유명하다. 그가 대사헌으로 있는 동안 “사헌부의 기강[臺綱]이 크게 진작되었고 조정이 숙청(肅淸)되었다”는 사관의 평가가 그의 자세를 말해준다(문종실록 1/6/26).
“충청감사 정인지는 일을 잘 돌보지 않아 전세수입이 형편없습니다.”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은 내가 세액을 책정할 때 그저 백성의 말만 듣고 너무 낮게 매겼다고 주상께 아뢰었다. 영의정 황희 역시 “정사(政事)에 경험이 없는 자가 관직을 맡으면 매양 재용이 부족하게 된다”고 거들었다. 거의 3년을 주상께 요청하여 겨우 외관직에 부임했는데, 이제 영락없는 무능한 관찰사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주상께서는 “옛 사람의 말에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어찌 넉넉하지 않겠는가’ 했고, ‘제왕의 부는 백성이 저장한다’고 했으니, 어찌 백성에게 후한 정사를 했다고 벌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로서도 할 말이 없지 않았다. 내 비록 홀로 계신 아버지의 봉양을 위해 지방근무를 자청[乞郡]했지만, 나름대로 계획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상께서 노상 강조하시는 ‘백성 사랑하는 정치[愛民之政]’(9/11/11)를 실천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 어떻게 하면 ‘백성을 살리는 정치[生民之政]’(18/7/21)를 구현할 수 있는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궁궐은 극히 선별된 정보만이 전달되는 공간이다. 민생의 고통을 실감하기엔 너무 폐쇄적이었다. 상께서는 낮 경연이 끝나면 지방에서 올라온 수령들을 붙잡고 백성의 형편을 물어보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령은 그저 좋은 얘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자기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 임금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는 듯했다. 그러다보니 민생과 관련해 꼭 필요한 정보는 자주 차단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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