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한일관계 축소판, 이명박-이시하라 신타로 비교

경제회복 열망 VS 보수우경화 발판으로 성장, 대권 꿈은 누가 먼저?

  • 이창위 대전대 교수·국제법 chweelee@dju.ac.kr

    입력2007-06-05 1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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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관계가 경색돼 있다. 2년 전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 강경정책 선회 이후 좀처럼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 적절한 대일 정책을 수립하려면 일본 사회의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같은 시기에 서울과 도쿄의 수장을 지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정치적 행보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서울과 도쿄의 관계는 한일관계의 축소판과 다름없으며, 더욱이 이 전 시장은 유력한 대선후보 중 한 사람이고 최근 도쿄도지사 3선(選)에 성공한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일본의 핵심 우파 정치인으로 여러 차례 총리 물망에 올랐다.
    한일관계 축소판, 이명박-이시하라 신타로 비교
    이명박(李明博·66) 전 서울시장은 단임으로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했다. 한나라당 경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이 전 시장이 당내 갈등을 봉합하고 경선에서 승리한다면 대선에서도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75) 도쿄도지사는 지난 4월, 일본 통일지방선거에서 51%의 득표율로 여유 있게 3선(選)에 성공했다. 이시하라 지사는 중의원 의원 시절부터 자민당 총재직에 도전했으며, 그동안 여러 차례 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비정치인 출신에 대한 호감

    이명박 전 시장과 이시하라 지사는 비(非)정치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전 시장은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CEO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고, 이시하라 지사는 23세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인기 작가 출신이다. 젊은 나이에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은 역경을 딛고 현재 한일 양국의 주목받는 정치인이 됐다.

    두 사람에 대한 양국민의 관심과 지지는 다른 정치인을 향한 것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그러나 지지의 이유나 배경은 전혀 다르다. 이 전 시장에 대한 지지는 대기업 CEO와 서울시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대한 평가이지만, 이시하라 지사에 대한 지지는 일본 사회의 보수우경화에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연히 두 사람의 정치에 대한 인식과 접근방법도 다르고, 그러한 차이가 현재 두 사람의 정치적 위상을 결정한 요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장면 1



    2006년 11월8일 오후 2시 도쿄대 야스다 강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준비한 원고를 읽으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세계도시를 향한 서울의 꿈’을 주제로 서울시장 시절의 행정 성과와 경험, 그리고 새로운 한일협력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1층을 가득 메운 500여 명의 청중은 강연을 경청했고, 개중엔 부지런히 받아 적는 이도 있었다. 일본 대학에서는 이런 강연에 학생을 동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청중은 교수나 전문가, 공무원 등 30대 이상 연배가 대부분이었다.

    “청계천 복원에 대해 많은 사람이 기술적인 문제, 교통난, 이해갈등을 들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철저한 현장조사, 치밀한 계획, 신공법과 최신 기술 투입, 그리고 원칙과 성의 있는 설득으로 임했습니다. 하루 17만대에 이르던 통과 교통량을 적절히 분산, 감소시켰습니다. 현지 주민 및 이해 당사자와 만난 횟수는 4200여 회에 달했습니다. 조기 완공을 위해 여러 회사가 구간별로 동시에 작업하도록 했으며, 모든 공무원이 자신의 일처럼 뛰었습니다. 그리하여 2003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한 지 2년여 만인 2005년 10월, 복개된 지 40여 년 만에 청계천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복원된 청계천은 직장인의 휴식 공간 및 학생들의 자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패널리스트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청계천 복원을 가능하게 한 리더십과 그 비결을 묻는 질문이 주를 이뤘다. 당시 청중의 관심이 다른 사업보다 청계천에 집중된 것은 도쿄가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쿄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노후지역의 재개발, 특히 도심 하천 위의 고가도로에 대한 처리가 현안이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예컨대 니혼바시 지역은 고가도로들이 입체 거미줄처럼 이중, 삼중으로 교차하고 있어 지역의 큰 골칫거리다.

    도쿄도가 하천 복원이나 고가도로 처리에 성과를 못 내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나라에 비해 더 신중한 일본의 국민성이나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문제일 수도 있고, 천문학적인 보상비와 건물주·지주들의 이해 대립도 걸림돌이다. 그러나 일본 내에선 무엇보다 지도자의 추진력 내지 자질 부족이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 장면 2

    2005년 5월20일 이시하라 신타로 지사는 도쿄도로부터 1740km 떨어진 환초(環礁)인 오키노토리시마에 상륙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이 섬(국제법적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섬이 아니지만)은 엄연한 일본의 영토이며 배타적경제수역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령임을 나타내는 경계표지 앞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오키노토리시마는 일본의 섬이다, 불만 있냐?”고 외치며 단독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섬 주위를 수영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한 뒤 도쿄로 돌아갔다. 72세라는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퍼포먼스였지만, 이시하라의 극우(極右) 성향을 익히 아는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시하라는 일본의 영토 문제에 대해 과격한 대응을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운수성 대신이던 1988년에는 독도에 대한 불법 상륙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다케시타 총리의 만류로 무산된 적이 있다.

    이시하라가 오키노토리시마에서 선동적이고 유치한 시위를 한 것은 2001년부터 중국이 그 주변의 경제수역을 인정하지 않고 해양과학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오키노토리시마는 원래 매트리스 두 장 정도의 면적밖에 안 되는 환초의 하나였는데, 일본 정부가 1988년부터 보강공사를 해 현재 직경 50m 정도의 콘크리트 바닥을 가진 바위가 됐다. 일본이 이 섬에 집착하는 이유는 일본 국토 전체보다 넓은 면적(40만㎢)의 경제수역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경영하고 싶다’

    그러나 현행 국제법, 특히 유엔해양법협약 제121조 3항을 아무리 융통성 있게 해석하더라도 오키노토리시마는 섬의 지위를 인정받기 어렵다. 오키노토리시마는 단순한 바위로, 대륙붕이나 경제수역을 갖지 못하고 12해리의 영해만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시하라가 이 같은 억지스러운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일본 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대선을 7개월여 남겨놓고 이명박 전 시장은 여전히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선두를 지키고 있으며, 박근혜 전 대표가 그 뒤를 달리고 있다. 두 후보의 지지율을 합치면 70%를 넘기도 한다. 야당의 두 후보가 6개월 넘게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건 과거의 대선에 비해 특기할 만한 상황이다.

    이 전 시장에 대한 높은 지지율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경제 문제 해결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값 폭등과 양극화에 따른 서민경제 붕괴는 대다수 국민에게 좌절감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정치인의 요란한 구호나 공약만으로는 경제회복이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전사회적으로 팽배하다.

    이 전 시장측은 그런 점들을 고려해 기존 정치인과 차별화한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이 전 시장은 ‘대권을 노린다’는 표현 대신 ‘국가를 경영하고 싶다’는 식으로 즐겨 이야기하는데, 그런 부분이 지지율 제고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시장은 세련된 화술을 구사하지는 않지만, 눌언민행(訥言敏行)의 이미지, 즉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인상이 오히려 국민에게 호소력을 갖게 한 것이다.

    이시하라 지사도 기존 정치인과의 차별성을 부각해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이 전 시장과 닮았다. 1968년 참의원 전국구에 출마해 300만표라는 최다 득표로 당선된 것도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인기 덕분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시하라 지사는 히토쓰바시대에 재학 중이던 1956년에 ‘태양의 계절’이라는 소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그 뒤론 영화감독이나 이벤트연출가로도 화제를 몰고 다녔기에 정치적 스타로 변신하는 데 별문제가 없었다. 1972년에 참의원 의원을 그만둔 이시하라는 도쿄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연속 8회 당선됐으며, 그 사이 환경청 장관, 운수성 대신을 역임했다. 1999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2003년에는 308만표라는 사상 최고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으며, 이번 선거에서도 무난하게 3선에 성공했다.

    무력한 일본 사회의 자존심

    이시하라 지사는 여느 극우 정치인이나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의 범주를 벗어나는 과격한 언행을 일삼아왔다. 장애인을 무시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며 여성을 차별하는 발언으로 악명 높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지방선거 기간엔 호화 해외출장이 줄곧 비난의 대상이 됐다. 1999년 도쿄도지사 취임 후 2006년까지 총 19회 해외출장을 다녀왔는데, 그 목적이 올림픽이나 마라톤 관람 같은 개인적인 관심에 집중됐으며 별다른 성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 지사는 해외출장 때 미국(5회), 유럽(3회), 에콰도르(1회), 대만(6회), 인도(1회), 그 밖에 동남아지역(3회)을 방문했는데, 단 한 번도 한국이나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시하라가 그만큼 한국과 중국 양국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지금껏 일왕의 한국 방문이 이뤄지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시하라는 중국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며, 중국인을 멸시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시하라는 중국과 중국인을 지나(支那)와 지나인(支那人)이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의 중국 비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2005년 6월 영국 ‘타임스’와의 단독 인터뷰에선 베이징 올림픽 보이코트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이 영토분쟁 중인 댜오위다오 문제로 포클랜드 전쟁과 같은 국지전을 벌일 수도 있음을 주장했다. 2000년 도쿄도 주도로 출범한 ‘아시아대도시네트워크21(ANMC21)’에 중국 도시가 배제된 것도 이시하라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ANMC21은 도시들의 다자간 교류를 선호하는 이시하라의 의지가 반영된 국제교류협의체로 현재 방콕, 델리, 자카르타, 하노이, 콸라룸푸르, 싱가포르, 마닐라, 타이베이, 양곤, 도쿄, 서울 등 11개 도시가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 대표로는 서울시 부시장이 줄곧 참석해왔다.

    한일관계 축소판, 이명박-이시하라 신타로 비교

    2006년 11월, 이명박 전 시장이 도쿄대 강당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시하라는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도 불사해야 하며, 일본이 선제공격을 못하면 북한이 먼저 일본에 미사일을 발사해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차별의식이 없으며, 한국 친구도 꽤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이 원해서 한일병합, 신사참배, 창씨개명이 이뤄졌다”는 망언을 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이시하라 지사의 인기는 대단한 수준이다. 지금도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새 총리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 일본 정계가 요동칠 때마다 ‘이시하라 총리 대망론’ ‘이시하라 신당 구상’을 내용으로 하는 기사가 언론에서 빈번하게 다뤄졌다. 예컨대 그가 직접 자민당 총재직에 입후보하거나, 중의원·참의원 선거 때 공명당 대신 자민당과의 연합정당을 창당하는 방안이 정계에서 논의돼왔다.

    이 점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인 정서와 일본 사회 변화의 연장선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며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은 일본인에게 이시하라의 강경한 주장과 고집은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일본 국민이 볼 때 이시하라야말로 무력한 일본 사회를 변화시킬 정치인이며, 일본의 정치대국화, 군사대국화를 실현할 수 있는 적임자다. 중국과의 영토 문제 외에 일본인 납치 및 북한 핵 문제 등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시하라 개인의 인기는 일본 사회의 보수우경화와 맞물리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이시하라 지사의 극우적 정치행태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은 매우 비판적이다. 2005년 4월 이시하라가 후지TV 대담프로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신한일 독트린’을 비난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노 대통령이 일본의 계속되는 망언과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천명하자 이시하라는 “대통령이 자신의 인기 회복을 위해 강경한 발언을 하는 것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한 것으로 정치가로서는 3류 수법”이라고 혹평했다. 이에 대한 이 전 시장의 반응은 이랬다.

    이명박, 재임시 訪日 못한 이유

    “도쿄도지사가 우리 국가원수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하고 비하 발언을 한 것은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정치를 3류라고 한 이시하라의 지적이야말로 4류, 5류의 망언이다. 그의 언행은 시대에 맞지 않는 극우적 도발로 일본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시하라 지사가 중심이 돼 진행된 역사교과서 파문은 아시아인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됐다. 일본은 독일처럼 지난날의 잘못을 사과하고 이를 행동에 옮겨 아시아의 공동번영과 인류행복에 적극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전 시장과 이시하라 지사는 같은 시기에 서울과 도쿄의 수장을 지냈지만 교류는 전혀 없었다. 이시하라가 서울을 방문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 시장도 재임 중 한 번도 도쿄를 방문하지 않았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양 도시의 수장이 재임 중 회동하지 않은 사실은 그만큼 한일관계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전 시장뿐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인 대부분이 도쿄를 방문하더라도 이시하라 지사를 잘 만나지 않으며, 설령 만나더라도 그런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이 전 시장은 퇴임 후 일본을 방문하면서, 재임 중 방일(訪日)하지 못한 사정을 일행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도쿄는 분명히 서울이 벤치마킹해야 할 중요한 도시다. 그래서 자매결연도 했고 공무원들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도지사가 너무나 선동적이고 극우적인 발언을 많이 하는 탓에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구미의 선진도시는 물론이고 아시아, 멀리 중남미의 도시와도 교류를 하는 마당에 이웃 도시를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불편한 상황이 개선돼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명분보다 실리가 우선

    이 전 시장의 지적대로 도쿄는 장점이 많은 도시다. 특히 이시하라 지사가 재임한 지난 8년 동안 시행된 정책 중에는 서울시가 눈여겨봐야 할 내용이 많다. 방만한 복지예산의 절감, 기업회계 방식의 도입 등은 대표적 성공사례로 분류된다.

    이시하라 지사는 1999년부터 6년 동안 661억엔의 예산을 절감했다. 특히 경로우대권 전면 유료화와 노인 복지수당 축소는 거센 반발에 부딪혔지만 결국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공공단체는 민간기업처럼 효율적인 예산편성과 집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시하라의 개혁은 일본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 대도시들도 지하철 적자가 심각해 어떤 형태로든 개선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선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지자체장으로서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예산 절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지지로 3선에 성공한 이시하라 지사는 국내 지자체장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환경행정 분야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깨끗한 대기 질은 선진도시 중 모범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도쿄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이구동성으로 깨끗한 대기를 높이 평가한다. 지난 선거에서 이시하라 지사의 첫 번째 공약이 ‘환경혁명의 지속’이었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도 선거 기간 내내 대기의 질을 도쿄 수준으로 개선하겠다고 공약했다. 오 시장이 구체적인 안으로 언급한 디젤차량 규제, 간선도로에 공기정화설비 설치, 광촉매제 공기정화시스템 도입 등은 도쿄가 야심적으로 추진한 사업들이다.

    물론 이시하라의 정책 중에는 실패한 것도 적지 않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신은행도쿄 설립, 도쿄도립대학의 개혁을 위한 수도대학도쿄 개교, 카지노 구상, 요코다 기지 반환 문제 등은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꼽힌다. 신은행도쿄는 설립 취지와 달리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많지 않고 누적적자도 투자금액의 50%에 달하는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도쿄도립대학 개혁도 우수한 교수들과 직원이 다른 대학으로 이적하는 후유증만 남기고 끝났다. 카지노는 기존의 파친코 사업체에 밀린 끝에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에 포기했다. 이렇게 실패한 도정(道政)은 대부분 이시하라가 작가적 감성에 치우쳐 무모하게 추진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시하라의 실패는 서울시가 개혁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서울과 도쿄는 1988년에 자매결연한 후 오랫동안 공무원 교환근무를 실시해왔다. 그러다 1999년부터 정기적 파견 및 교환근무는 중단됐지만 비정기적 교류는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서울은 도쿄의 방재, 도시계획, 주차관리, 상하수도관리, 재개발, 환경 등 여러 부문에 대해 자문했고, 도쿄는 서울의 환경복원, 환경재생 등에 대해 자문했다. 서울과 도쿄는 수장끼리의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으나 도시간 우호관계는 잘 유지해온 셈이다.

    이명박 전 시장과 마찬가지로 오세훈 시장도 도쿄도지사와 직접적인 교류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양 도시의 효율적인 교류 확대를 위해서는 두 도시 수장들의 상호방문이 조속히 실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지나치게 한일관계를 의식해 거리를 두는 것은 어딘지 어색한 측면이 있다. 차제에 오 시장이 먼저 방일해 선진 환경정책에 대해 경당문노(耕當問奴)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민족주의적 명분보다는 깨끗한 서울 만들기 같은 실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전 시장도 지난해 도쿄대 강연에서 양 도시의 협력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전임자들의 실패

    “서두에 가까운 길을 둘러왔노라고 말씀드렸지만, 서로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가깝고도 유사한 두 거대도시가 긴밀히 교류·협력할 수 있다면 두 도시의 동반자적 관계는 양국관계에도 결국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서울과 도쿄가 손을 잡고 시야를 넓히면 보다 성숙한 동북아의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의 역대 대통령 중엔 주지사나 시장 출신이 적지 않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욕주 지사였으며, 카터는 조지아주 지사였다. 클린턴은 아칸소주 지사,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주 지사, 부시 현 대통령은 텍사스주 지사 출신이며,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은 파리 시장을 오래 역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시장의 대권 도전이 지금껏 실패로 끝났다. 조순 전 시장은 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통합이, 고건 전 시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견제가 대선 중도 포기로 귀결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낮은 지지도와 당사자의 정치력 내지 카리스마 부족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들과는 달리 이명박 전 시장은 현재까지 유력한 후보로서 한나라당 경선을 앞두고 있으며, 경선을 통과할 경우 당선에 근접한 후보로 예상되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지금껏 지자체장이 총리 물망에 오를 만큼 높은 인기를 얻은 건 이시하라 지사가 처음이다.

    이시하라가 고이즈미와 아베에 밀려 도지사 3선에 머문 것은 자민당 내에서의 인기가 높지 않다는 결정적인 약점 때문이었다. 이시하라는 자민당 의원 시절 나카가와(中川)파를 승계했으나, 지도력 부재와 빈약한 대인관계로 인해 파벌이 해산된 바 있다. 75세라는 나이와 무책임한 언동 또한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걸림돌이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도쿄도지사직이 이시하라의 마지막 공직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일관계 축소판, 이명박-이시하라 신타로 비교
    이창위

    1959년 부산 출생

    고려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석사, 일본 게이오(慶應)대 박사(국제법)

    現 대전대 법학부 교수, 해양법포럼 회장, 외교통상부 국제법 자문위원, 해양수산부 자문위원

    저서 :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흥망사’ ‘영토분쟁과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판례 연구’ ‘동북아의 영유권분쟁과 한국의 대응전략’ ‘국제어업분쟁해결제도론’ ‘일본의 해양법정책’(역서)


    그렇다면 이명박 전 시장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가 전임 시장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당내 갈등과 네거티브 공세에 직면한 그로서는 이제 경제 외의 분야에서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즉, 당내 갈등을 치유하는 조정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시하라의 민족주의적 국익(國益) 추구 논리를 비판한 이 시장의 정치력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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