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산대중 위한 체제 지향’논문 썼다 구속된 류근일 ● 노재봉, 송복, 이수정 등과 진보서클 활동 ● ‘흡혈의 식인사회’ 목도하고 ‘개벽봉기’ 다짐 ● 신입생 의식화용 오리엔테이션 처음 만들어 ● 5·16 이후 지하운동권 장악한 도예종의 파워 ● 6·3 주도한 서울대 ‘불꽃회’, 김일성 정치적 정통성 인정 ● 남파간첩, 남부군 접하며 ‘反김일성 마르크스주의’로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민주화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金正剛·67)씨가 자신의 일대기를 ‘신동아’에 보내왔다. 김씨는 4·19, 6·3, 민통전학련, 신진회,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무명당(과학적사회주의당) 등 현대 좌파 운동사(史)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관계했는데, 그는 ‘반(反)김일성 마르크스주의’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1980년까지 독재체제 전복을 끊임없이 꾀했던 인물이다. 김씨가 보내온 글에는 4·19와 6·3의 실질적 배경, 인혁당과 통혁당의 실체, 6·29선언의 막전막후 등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자로, 제도권 정치가로 전향하기까지의 과정과 인간적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은 4·19에서 6·3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 후 1966년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대목까지를 담았다. 2차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 이후 6·29까지의 상황을 담은 글은 이들 사건이 여전히 첨예한 논란에 싸여 있는 만큼, 관련 소송과 정부의 과거사 조사가 완결된 후 소개하기로 한다. |
▼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다

어떻게 하든 초병 몰래 육사 구내로 들어가 직접 교장실을 찾아야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무리의 가족이 누군가를 면회하려고 육사 정문 초소 앞에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가족의 무리에 끼어들어 정문을 통과했다. 구내에도 여러 개의 검문초소가 있었다. 나는 초병의 눈길을 피해 첫 번째 검문 초소를 우회, 교장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앙 쪽으로 나아갔는데, 두 번째 초소에서 그만 발각돼 초소 안으로 연행됐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陸士
초소장은 군용 야전 침대봉을 들고 서서 엄한 표정으로 무단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교장각하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니까 돌아가라! 뒤로 돌아! 고향 앞으로 가!”라고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와서 죽었으면 죽었지, 그냥은 못 갑니다” 하고 떼를 쓰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마음을 바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상황을 보고하고 난 뒤, 초소장은 뜻밖에도 “교장실에서 데려오라고 한다”고 했다. 철테 안경을 쓴, 정한(精悍)한 인상의 대령이 들어왔다. 내가 육사 불법침입의 목적과 경위를 말하자, 그는 “육군 장교가 되면 최하급의 소위도 5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데 그 50명의 생사는 그 소위에게 달렸다. 그런데 지휘관이 눈이 나빠 관측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했다. 내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력은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심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최대의 노력으로 눈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해내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령은 육군 규정을 내세워 말을 끊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져도 소용없다. 육사 입학은 무조건 육군 규정을 만족시켜야 한다.”
나도 나름대로 대응했다.
“육사에 육군 규정이 있으면 제게는 죽음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단식하겠습니다.”